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4

好學 2012. 1. 29. 14:54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4

 

- 그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분석 - 정인교 박사(본 대학, 실천신학)

 

 

Ⅳ. 이 성봉 목사의 신학 경향성


목회자에게서 그가 가진 신앙과 신학은 그의 목회 방향을 결정하고 지탱해 주며 근거를 제공해 주는 주축인 동시에 말씀 선포에서 목회자 개개인의 특성 과 개성을 일반성과 전체성으로부터 구분하는 핵심적 토대이다. 따라서 한 설교 자의 설교를 분석할 때, 이 요소는 설교자와 그 회중이 처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전제요소이다.

 

학벌을 우선적인 판단기준으로 여기는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면, 서울신학교 에서의 3년 간의 신학수업, 그것도 학문적 깊이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이 발발 했던 '성경공부식' 학업이 공식적인 신학수업의 전부인 이 목사의 '신학'은 주목 의 대상으로 취급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위 학문적 신학에 정통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이루지 못하는 심령 의 갱신과 중생의 역사를 이 목사는 복음을 외칠 때마다 '사건'으로 만들어냈고, 바로 그 사건의 생성은 신학자들이 경시하는 그 '소박한' 신학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 목사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신학자라기보다는 부흥집 회 사역을 사명으로 알고 헌신한 부흥사요 목사이다. 당연히 신학이라는 이름 하에 기대하기 쉬운 본격적인 신학서적을 그는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신 학 경향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그가 남긴 설교와 자서전에 의존할 수 밖에 없 는데,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신학성격이 한국교회의 복음을 전해 준 선교 사들의 보수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는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보수적, 성서중심적, 복음주의적 청교도 신앙, 그리고 협의적 의미에서 이 목사가 속한 성결교회의 신앙과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이 목사가 신학 각론의 전개방식에서 어떤 형이 상학적인 새로운 개념의 논리적 전개보다는 해당 주제와 연결되는 성구의 문자 적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따 라서 이 목사가 지닌 성서관과 성서중심적 사고야말로 그의 신학을 결정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틀이다.

 

이 목사에게 성경이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유일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으로서 "사람의 진상을 알리는 거울이요, 시대와 사회상을 잘 알 려 주는 망원경이요, 우리 생명을 밝혀주는 현미경"이다. 이 성경은 죄를 깨 달아 회개하며(행 2:37; 히 4:12), 중생케 하고(벧전 1:23) 신앙을 낳게 하며(롬 10:17) 성결케 하고(요 17:17; 엡 5:26) 굳게 서게하는 능력(행 20:32; 벧후 1:5-7)이 있다.

이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 목사의 신관은 "거짓 스승을 삼가라"는 그의 설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신관에 대하여성부 성자 성령의삼위일체로 영존하시는 인격적하나님 을 믿고 가르치는것이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신을 믿고동정녀탄 생과 그의 무죄하신생활, 그의 이적, 그가 흘리신 피를통하여 성취하신 대속적속죄의 죽음과 그의육체의 부활과 승천하여성부의 우편에 계심 과권세와 영광중에 친히재림하실 것을 독실히믿고 전하는 것이요, 성령 에 관하여, 멸망받을죄인이 구원을 받기위하여 성령의 역사를통해서 중 생됨과 믿음으로칭의됨이 절대 필요함을이를 체험하여 증거하는것이 다.


이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 시오, 사랑의 주인이요, 사랑의 자본주"로서 하나님 없이 사랑이 없고 또 사랑 없이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외아들까지 주시 는 절대적이고 무보수이며 영원불변하시고 높고 길고 깊고 넓은 사랑이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 목사는 우주만물과 인생이 모두 하나님의 지으신 하나님의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멸망치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 때 문으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부흥의 비결, 57). 따라서 사랑이신 이 하나님을 믿 는 이 목사의 사역의 초점도 역시 사랑이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서로 사랑하도록 권고하는 데 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 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비해 인간과 인간들이 사는 이 세계는 어떠한가? 엄밀한 의 미에서 바로 이 세계관과 인간관이 이 성봉 목사의 신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 분고 동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가 보는 이 세계는 "아침에는 웃음이 왔으나 저녁에는 슬픔이 오고, 밤중에 는 평안히 자고 일어났으나 새벽에 무슨 고통이 올지 알수 없는 세상"이다. "환난 고통으로 버티어 놓은 거 같은" 세상, 환란 고통을 빼놓으면 무너질 것 같은 세상, 뒷집에는 한숨이요, 옆집에는 눈물이요, 곁집에는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 이것이 이 목사의 눈에 비친 세상이다.

 

이런 그의 세계인식은 물론 우여곡절이 극심했던 그 당시의 상황과 결코 무 관하지 않다. "더구나 이 시대는 세계적으로 환난이요, 국가사회적으로 환난이 며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이요, 종교적, 정신적, 사상적으로 심한 혼란 중에 있으니 앞으로 올 큰 환난의 시초인가 보다. 큰 비 가 쏟아지려고 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감이 있다"는 언급은 당시의 혼란 한 상황이 이 목사의 세계인식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웅변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의 세계관이 단지 이러한 외형적 상황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단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 평가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 세계는 동시에 이분법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속성을 가졌다. 즉 세상은 장차 두 가지로 갈리는데, 하나님을 잊어 버리기까지 자기만 사랑하다가 망하는 세상과 자기를 잊어버리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축복을 받는 세상"(사랑의 강단, p.13)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분적 분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적 사건에서 이루어지며, 오늘 날의 외적 상황의 혼 란은 바로 예수 재림의 징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축복을 받는 세상"이란 것이 이 목사에게서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소위 유토피아적 지상천국, 혹은 신앙의 철저성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물질적 복락이라는 기복적 결과나 차안적인 행복 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피안적인 것이다. 동시 에 이것은 인간됨의 참 가치를 실현하게 하며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금생의 의미도 지니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의 척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맞물려 있다.

그의 설교에 서 철처한 회개와 예수에 대한 신앙, 그리고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것이 금세에서 생의 의미를 이루고 내세의 영원한 세계를 상 속받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이 목사에게서 모든 세계와 인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구도 안에 갇혀 있는 한시적 존재들이며, 따 라서 주의 재림이라는 것이 그의 신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해 이 목사가 갖고 있는 인간관은 어떠한가? 이 목사에 의하면 인간은 철저히 '순간적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인 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북망산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로서, 그 인생 의 흐름이란 것은 "빨리 달리는 기차가 이 터널에서 나와서 어언간 저편 터널 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천국, 94). 이 목사의 인간이해는 특히 그가 찬 송가곡에 맞춰 작시한 노래가사에 잘 담겨있다:


 

세상 만사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집 문전 옥답도우리 한번 죽어지면일장의 춘몽

꿈결같은 이세상에 산다면 늘살까일생의 향락 좋대도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고난풍과 일장 춘몽이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달려가느냐

인삼 녹용좋다해도 늙는 길못 막고

진시황의 불사약도죽는데 허사라

인생한번 죽는길을 감히 피할소냐

분명하다 이큰사실 너도나도 다망한다


홍안 소년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뽐내지 마라

유수같는 세월은늘 재촉하고

저 적막한공동묘지는 너 기다린다.

 

이 목사가 인생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21세에 심각 한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부터이다. "죽음이라는 것을 제 삼자가 객관 적으로 생갈할 때는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겠지만, 참말로 그 죽음이 내게 닥쳐 보니 그처럼 무섭고 그처럼 잔인하고 그처럼 허무할 수가 있을까?"라는 그의 독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병상에서 심각하게 느끼게 된 인생의 허무는 그 후로 가장 처참하고 어려운 고난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지게 된다. 사실 위의 내용은 그 문자적인 의미로 보아 그가 인생을 허무 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일각에서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이 목사의 복음과 관련지어 다양하게 해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목사의 인생관은 인생 자체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허무주의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복음을 고난받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사회복음적 성격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이 목사가 보는 인생의 가치와 방향이라는 측면에 있고, 그 인생의 가치 유무의 판단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다.

즉 그가 병상에서 처음 인생문제를 심각하게 깨달았 을 때, 그에게 예수는 의미가 없는 분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야기하는 인생의 허무는 예수라는 '내용'이 빠져 있는 경우에 한정되며, 시간이라는 한계를 초월 하는 영원한 진리와 가치에 눈을 뜨지 못하고 인간들이 만든 가치와 물질적 행 복 안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경우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목사가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제한된 가치에 인생을 낭비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반영이며, 눈에 보이는 일차원적인 육의 삶에 대한 역설적 경고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적 세계와 천국세계에 눈뜬 성도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서 신앙이라는 토대 위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되, 그 최상의 가치는 언제 나 하나님께 두어야 하고, 그렇게 사는 내용있는 삶 자체가 동시에 주의 재림이 라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능동적 작업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최대 관심은 "어떻게 잘 사는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데 있고, 이 목표를 위해 인생의 내용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다. 이러한 일련의 인생관은 '인생 사시절'이라는 그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

 

이팔청춘 소년들아희망의 양춘이 왔구나

좋은 시절허송말고 조물주를 기억해

네 일생을주께 바쳐 향기롭게살아라

생명새벽 어릴때가살과 같이 지난다.


혈기방장 장년들아근로의 하절이 왔구나

땀흘리며 애를쓰는 그대 사업어떤가

예수없는 그사업은 성공같은 실패라

예수위한 수고밖에영원한 것 없구나


4,50의 중년들아 수호가의추절이 왔구나

알곡이냐 죽정이냐심판날이 가깝다

선한 행실천국복락 악한 행실지옥은

금생내세 따라오는원일원칙이로다


백발노인 부노들아엄동의 설한이 왔구나

일생향략 좋다해도바람잡이 뿐이요

험한 세월고난 풍파 일장춘몽이로다

예수 생명소유한 자 영원무궁살리라.


 

이 목사의 인간이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인간을 철저히 죄로 물든 죄인으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가 가진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죄인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그들이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며, 이것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 한 길이다.

 

이러한 입장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 문제의 해결과 개개인의 구원만이 인간과 세계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한국교회의 전통적 구원관과 일치 하는 것이다. 즉 모든 구조적인 사회의 죄나 모순까지도 사회복음이나 진보주의 신학 진영에서 주장하는 왜곡된 구조의 정치적 조정을 통한 해결방식을 이 목 사는 거부하면서, 결국 그 모든 구조조정의 실무자요 결정자일 수 밖에 없는 인 간 그 개인의 교화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가 예수중심 의 가치와 엄격한 신앙실천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그의 관심이 인간 그 자체의 변화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이성봉 목사의 신론, 세계관, 인간론이나, 디모데후서 3장 16절 을 가감없이 받아 들이는 동시에 축자영감적 입장에 선 성서관, '하나님이 계신 궁전, 사랑의 뜨거운 가정, 진리를 배우는 학교, 안식을 주는 평안의 방, 작은 천국' 등으로 해석하는 그의 교회관은 내용상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신앙개조와 일치한다. 이것은 그가 성결교회의 목사라고 하는 지극히 외면 적 이유 외에도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 '순복음'을 전하고 성서적 신앙을 고수함 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신앙과 신학이야말로 "영계의 계통 에 속한 순복음 신본 신앙전통"이라 주장하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고 십자가의 구속도 믿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 다시 오실 예수를 그대로 믿 지 않고, 그저 예수를 한 선생으로 모범적 인물로만 모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의협심에서 정의를 위한 자기 개인의 죽음"으로 주장하는 자들을 "이도(異道)의 당파", "육에 속한 인본주의자"로 정의한다.

 

이 목사의 신앙노선이 그가 속한 교단의 신학방향과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우 리는 이 목사에게서 소위 신유의 교리와 관련된 독특한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성결교회의 신유해석은 기도를 통한 병고침을 믿으며 동시에 의약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목사의 신유관이 어떠한가는 다음의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변치 않기 때문에오늘도 그 권능, 그 사랑으로 치료하시는여호와시라. 그래서 나는신유의 신앙으 로 30년간의약을 의지하지 않고그의 손에 치료를받아 오늘까지 나았다. 물론 의약을 쓰는것이 죄가 되거나구원 문제는 아니다. 의약으로 치료하 는 것은자연의 요법이요 신유로구원받는 것은 초자연의요법이다.


그는 여기서 의약을 쓰는 것과 신유를 나름대로 정의하는데, 그 근간에서는 교단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입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론적 접근과 달리 이 목사가 병상에서 보여준 의약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 목사는 사역 중에도 건강상의 어려움을 많이 겪었 다. 초임 목회지인 수원교회에서의 발병에서 비롯하여,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회 의 부흥집회, 해남 부흥시의 맹장염 등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럴 때마다 이 목사는 모든 의약과 의술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 어 려움을 극복하였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의술에 대한 불신에 있다기보다는 이 목사 자신의 표현대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 지하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함을 사명으로 알고 정진하던 그의 투철한 신앙에서 비롯한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의 신본주의적 신앙이 그로 하여금 신유를 체험하게 한 것이다. 즉 그는 교리적인 측면에서 자신이 속 한 교회의 입장에 충실하면서도, 생명을 잃은 문자만으로 전락하기 쉬운 교리의 자구(字句)에 의존하기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는 전인적 신앙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 성봉 목사는 이러한 복음주의적, 성서적 신앙과 신학적 토대 위에 굳건히 서서 하나님 제일주의, 그리고 민족과 세계 모든 영혼을 구원시키려는 불타는 구령열이라는 두 바퀴에 평생을 싣고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라는 좌우명으로 초지일관한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