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비행사 안창남

好學 2011. 10. 14. 22:11

인천이야기 / 비행사 안창남

 

 


어린 시절 내용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에 이런 것이 있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보아라, 엄복동 자전차-' 단 2줄의 민요조 가락이었는데, 그 노래의 참뜻은 커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게 꿈만 같던 때에, 그것도 일본인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조선 최초의 비행사가 된 안창남(安昌男)은 문자 그대로 '국민 영웅'이었다.

소학교 때 외국인들의 시범 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휘문고보 중퇴 후,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당당하게 비행사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1922년 그의 노고를 기리고자 '안창남 군 고국 방문 후원회'가 비행회를 개최했다.

그해 12월 2일, 요코하마에서 보낸 비행기 '금강호'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안창남은 이를 여의도 항공대로 옮겨 며칠 동안 조립에 착수했다. 조립을 끝낸 5일 이후, 각급 사회 단체가 연일 열렬한 환영식을 마련했다.

8일 서울 시범 비행에 이어 9일에는 인천 방문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 10일 예정이던 비행은 중지되었다. 13일 오후 4시23분 경, 마침내 안창남은 역사적인 인천행 비행에 나섰다.

4시 43분 인천에 도착해 저공 비행을 하며 '공중에서 인천 시민에게 고한다.'라고 적힌 오색 선전지 수천 장을 뿌렸다. 그는 1923년 '개벽' 지에 실린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란 글에서 이렇게 전했다.

"오- 인천!, 비행기 위에서 혼자 소리치면서 나는 그야말로 뛰는 중에도 뛰어갈 듯 달려갔습니다... 길거리에서 모여 서서 비행기를 쳐다보고 손뼉을 치는 모양과... 공설운동장으로 난 세 갈래 신작로를 달음질하면서 모여드는 것까지 보여서 반갑고 기꺼운 미소를 금치 못했습니다...나는 고등 비행술 여러 가지를 하여 인천 여러분이 되도록 만족히 보시게 했습니다.

다시 시가 위를 두 번 돌면서 가지고 간 종이(선전지)를 뿌려 경의를 다하여 인사를 올리고 돌아서서 여의도에 착륙할 때는 날이 저문 때였습니다." 폭죽을 터뜨려 환영의 뜻을 표했던 부민들에게는 큰 긍지와 감명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안창남은 1925년 중국 망명 후,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 등 항일 투쟁에 나섰으나 1930년 4월 불의의 사고로 추락해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오늘 저 세상 하늘에서 인천국제공항의 웅자를 내려보신다면, 그 상전벽해를 크게 기꺼워하실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