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 米豆취인소

好學 2011. 10. 14. 22:14

인천이야기/ 인천 米豆취인소

 

 

한때 지수 1,000선을 육박하던 주가가 연일 폭락세이다. 매스컴들이 일제히 '미국 악재' 때문이라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 가운데 수 많은 투자자들은 애 타는 가슴을 달래며 등락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옛날 곡물을 경매하는 사람을 '미두(米豆)꾼'이라 불렀다.

인천 제물포가 바로 그 흥망의 무대였는데, 전국 각처에서 미두꾼이 몰려들었다.

그때 불현듯 등장한 인물이 미두왕 '반복창'(潘福昌)으로 그의 행적 또한 세기말적인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에 의하면, 고아 출신인 반복창은 어린 시절 미두 중매점의 점원으로 들어갔다. 비록 공부는 없었지만, 두뇌가 명민해 경매 대리인 등을 거쳐 급성장했다.

급기야 그는 인천과 일본 오사카의 시세를 좌지우지하는 거물이 되었다. 자신의 결혼식을 조선호텔에서 치르면서 하객들을 위해 2등 객차만을 연결시킨 경인선 임시 급행 열차를 대절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그는 일거에 가정 파탄을 맞고 40에 요절하고 만다.

미두꾼들의 무대는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이하 인취)였다.

1899년 6월 9일 문을 연 '인취'는 우리 나라 최초의 경매소로 쌀, 콩, 명태, 석유, 방적사, 무명 등 7개 품목에 대한 현물, 외상, 정기거래를 목적으로 업무를 개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기 거래만 행해졌고, 얼마 가지 않아 거래 상품이 쌀 1종류로 한정되었다. 정기 거래는 3개월 기한부 매매인데 기한이 되었을 때의 시세에 따라 현미로 청산하는 방식이었다. 청산할 때의 시세가 올랐으면 투자자는 이득을 보았고 그렇지 못하면 손해를 봤던 것이다.

그만큼 투기성이 강해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기도 했다. 1920년대의 종합지 '개벽'(開闢)은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인취'를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이라고 말하고 있다. "28년이나 되는 동안 조선인으로서 그 이윤을 입은 자는 몇몇이며 그 해독을 입은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농부는 괭이를 던지고, 장사꾼은 주판을 버리고… 신주까지 들어먹고 형제처자가 이산하여도 어느 누가 불쌍하다 않는 것이 미두쟁이 노름이다…미두 시세가 아무리 좋다한들 인천 부민이나 인천부의 번영에 무엇이 도움이 되며 무슨 관계 있으랴."며 그 폐해를 질타하고 있다. 한번쯤은 새겨들을 만한 말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