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청사 金在魯 초상화
서울올림픽 그 이듬해였다. 필자는 당시 모 지방지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웬 중로(中老) 한 분이 찾아오셨다. 손에는 대대로 모셔 왔다는 조상의 초상화와 말로만 들어왔던 한적(漢籍)을 찍은 사진 열 댓 장이 들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그 길로 소장자 댁엘 가서 유품을 대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한 문화재를 인천 지역에서는 입때껏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소장자의 8대조로 숙종·영조간에 네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던 명문 거유 청사(淸沙) 김재로(金在魯)였다. 특기할 것은 당대 어용 화사(畵師)로 이름을 떨쳤으나 초상화 작품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던 국수(國手) 변상벽(卞相壁)이 한종유(韓宗裕)와 동사(同寫)한 조선본과, 청사가 진청사(秦淸使)로 연경에 갔을 때 그 곳 궁중화사 시옥(施玉)에게서 그려 받은 중국본이 고스란히 함께 보존돼 있었다는 점이다. 한중 양국의 이름난 화사들이 한 인물의 초상화를 남긴 극히 드문 예가 현실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필자는 부랴부랴 문공부 문화재위원인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安輝濬) 박사와 옛 문헌에 정통한 서지학자 안춘근(安春根) 선생을 찾아뵈었다.
두 분은 모두 "국가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할 중대한 사료이다. 우선 흩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몇 번씩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 후 이 문화재들은 인천시 지정 지방문화재가 되었고, 소장자는 필자의 권유에 따라 이를 인천시립박물관에 '영구 위탁 전시'를 하게 되었다. 흐뭇한 일이었다. 그런데 요 몇 해 전, 이 초상화가 느닷없이 모 TV방송 골동품 감정 프로에 등장하였고 감정가가 2억 원을 넘어 세간의 화제를 낳기도 했으나 그 후 초상화는 끝내 시립박물관에 돌아오지 못하고 모 민간 박물관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사실 속수무책이었다. 광복 이후 인천에서 발굴된 첫 국보급 문화재요, 남동구 운연동 소재 청사의 묘소까지 지방문화재로 지정한 판에 이를 지켜 내지 못했으니 국내 최초의 '시립박물관'이라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보 제276호 '초조본 유가사지론'을 비롯해 보물 13점 등 여러 유물을 꾸준히 수집해 명성을 쌓아온 가천박물관과 수준급 도자류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송암미술관에 비견돼 온 시립박물관에게는 이 또한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측에게도 서운한 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물 구입비를 운운하기에 앞서 지역 사회에 이 같은 사정을 알려 유치 방안을 마련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인천서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조차 반환할 수 없다며 학예사들이 '눈물'로 버티는 판인데, 우리는 문화재로 지정해 전시 중이던 유물조차 지키지 못한 채 영문도 모를 일제 때의 난방 용구인 '유단뽀'와 일인 경영 양조장의 술병, 6·25 직후에 썼던 '제니스 라디오' 등을 보란 듯이 전시하고 있는 실정이니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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