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基督論]성경.교회.예배.

Ⅵ.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

好學 2012. 1. 20. 22:05

.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

 

 

교회란 무엇인가?

죄로 죽었던 우리에게 성령께서 들어와 거듭나게 하시고 양자되게 하심으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하게 구별된 무리 곧 "성도"가 된 것이다.

즉, 성별(聖別)된 자들이다, 세상에서 불러낸 거룩한 무리, 성도의 모임체, 그것이 곧 "교회"이다.

 

제 1과 교회의 본질과 구별

1. 교회의 성경적 명칭

교회의 명칭은 신약 성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①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

② 성령의 집(고전 3:16)

③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

④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

⑤ 새 예루살렘(계 21:9)

⑥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⑦ 큰 집(딤후 2:20)

⑧ 하나님의 집(딤전 3:15, 히 3:6)

⑨ 그리스도의 신부(요 3:29, 계 19:7)

2.교회의 본질(정의)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택자의 무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참 의미는 어떤 외형적 단체나 조직의 형태보다는 보이지 않는 무형적이고 영적인 심령(성도)들의 회합과 교통이 그 핵심이다. 교회는 그 본질이 그것의 영성에 있기에 불신자로서는 도저히 참여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 맺어진 영적인 단체인 것이다.

3. 교회의 구별

① 교회는 아래의 도표에서 보듯이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다른 둘"이 아니라 "한 양면성(兩面性)"을 말한다.

유 형 교 회

(교인들이 모인 단체)

무 형 교 회

(성도들의 영적 공동체)

투쟁적 교회

(지상에서 마귀와 대적)

승리적 교회

(천상에서 안식할 새 예루살렘)

조직적 교회

(교회의 외적 조직과 정치)

유기적 교회

(성도간 영적 교제)

※ 여기에는 택자도 있고,

불택자(단순한 교인)도 있을 수 있다

※ 여기에는 택자만 있는 곳이다. 즉 "교인"보다는 "신자"가 속한 곳이다.

② 로마 카톨릭은 무형 교회를 무시하고 조직의 총수인 교황(Pope)의 신부(God Father)가 되어 구원의 주체자로 군림한다.

로마 카톨릭은 외부적이고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그 본질을 찾는다. 그것은 주교, 대주교, 교황의 최고 고문들, 또는 교황 등의 보다 높은 교권자들 의 단체를 교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골 1:18)는 이미 죽고 없으니 그리스도를 교회의 총수로 삼는 것은 "머리 없는 교회"일 뿐이라고 주장하여 인간인 교황(초대 교황은 베드로)이 교회의 몸이요, 머리이며, 신의 대리자로서 구원과 은혜를 베풀 수 있다고 궤변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격을 가했다(25장 6조).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머리되는 이가 있을 수 없다. 로마 교황 역시 어떤 의미로든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교황은 적 그리스도 일 뿐이다. 그는 죄인이요 멸망의 아들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리고 모든 이가 일컫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는 자이다"(골 1:18,엡 1:22)

a.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지상에 현존하는 교회는 거룩한 투쟁, 곧 "전투하는 교회이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이다.

① 전투적 교회: 지상에서 투쟁하고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거룩한 전투에 부름을 받았다.

② 승리적 교회; 현세의 전투와 수난과 사망에서 해방되고 영광 중에 거주하는

천상의 교회를 말한다.

b. 무형 교회와 유형교회

이 구별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적용된다. 교회가 무형적이라 함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영적이어서 육안으로 식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신앙 고백, 외형적 조직과 정치에서 유형교회라 한다.

① 무형교회: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통틀어 구원받은 자의 총칭이다

(엡 1:22-23, 골 1:18).

② 유형교회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기관이고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는 조직체이다(고전 1:2).


제 2 과 교회의 속성과 표지

1. 교회의 3대 속성

사도 신경(The Apostles Creed)에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했다. 또 거룩한 공회는 영문으로 one Holy Catholic Church", 곧 "하나의 거룩한 공동 교회"로 표기하고 있는데, 여기 "하나", "거룩한", "공동"의 3대 원리에 따라 교회의 속성을 통일성(하나), 거룩성(거룩한), 공동성(공동)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통일성

① 세계 만국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하나"(One)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몸이면 우리는 그의 지체(member)라는 것이다.

② 몸은 하나인데 지체는 많다(고전 12:12). 그러나 지체는 많아도 몸은 역시 하나이다(고전 12:2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성도들도 이와 똑같은 이치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많다고 해서 교회도 다른(異質), 많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나이다. 이것은 참되고 영적인 무형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2) 거룩성

① 성도는 세상에서 성별된 존재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했다.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거룩한 단체라는 의미이다.

② 교회는 땅에 속한 단체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구별된 단체이므로 거룩하다 (엡 4:1-32). 따라서 거룩성은 교회 특성의 핵이다(벧후 1;1). 이 원리를 따라 성도는 그 실천 생활에 있어서 도덕적 거룩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3) 공동성(Catholicity)

① 교회의 공동성을 보편성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에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차별 이 없기 때문이며(롬 10:12-13), 또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가족 공동체적 인 교회를 말함이다. 모든 교회와 그 성도는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비유할 수 있다.

 

2. 참 교회되는 표지(標識, Signity)

앞에서의 교회의 속성 3가지는 무형교회의 의미에서 생각한 것이나, 다음의 교회의 3대 표지는 유형교회의 면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교회의 속성은 무형 교회에 속하고, 표지는 유형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참된 교회란 교회의 크기나 그 수에 있지 않고 그 질에 있다. 또 진정한 교회는 역사와 전통에 있는 것도 아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전통과 역사와 단일 교회임을 자랑하나 그것들이 참된 교회의 표지는 아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가 참 교회인가의 여부는 다음 3가지로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참 교회되는 표지(기준)는 무엇인가?

(1) 말씀의 참된 전파이다(요 8:31,32).

교회가 복음의 근본 원리를 바로 깨닫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참되고 바르게 전달하고 있는가?

그러하다고 하면 그 교회는(혹은 성도는) 참 교회이다.

(2) 성례(聖禮)의 정당한 시행이다(마 28:19).

성례란 세례와 성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당연히 그 "말씀의 진수"인 예수를 체험해야 한다.

그 표(Sign)가 "세례"(중생의 표)요, "성찬"(피와 살)이다.

성례는 말씀의 외적 표현이다. 곧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는 동질적 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참 교회는 설교에 뒤따르는 세례와 성찬을 반드시 실시할 것이다. 그러나 성례는 바른 제도에 따라, 합법적 성직자들에 의해, 성도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3)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다(마 18:18, 고전 5:1-5).

참 교회는 말씀(혹은 교리)과 성례의 거룩성을 보호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위해자(危害者)에 대한 엄한 책망이 필요하다.

진리를 왜곡하는 교리적 범죄, 윤리에 부정한 도덕적 범죄, 기타 교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교회가 엄한 권징을 실시해야 한다. 그것은 신실한 시행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법 단체가 아닌 이상 어떤 법적인 징벌을 실시할 수 없고 또한 권징의 참 의미는 교회의 "순결성 보호"에 있으므로 범죄한 자를 정죄하여 아주 파멸에 이르도록 해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권징은 그래서 항상 신중하고, 공의로와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비밀을 지켜 피고인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지 않도록 덕스럽게 실시해야 할 것이다.

"법과 징계의 참 목적은 밟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으켜 줌에 있다" (징계하는 자 - 용서, 징계 받는 자 - 회개)

 

 

제 3과 교회의 정치와 권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권세의 근원이 되심을 우리는 배웠다(마 23:10). 그리스도께서는 성도와 교회를 말씀과 성령으로 지도하고 다스리신다.

1. 교회의 정치(政治)

① 교황 정치(로마 교회, 헬라정교)

② 감독 정치

감독 정치체제는 교회의 정치를 감독이 집행하는 체제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정치를 직접적으로 또는 독점적으로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에게 위임하였다고 주장한다. 신자 단체는 절대적으로 교회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한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도였으며, 현재는 이 제도가 영국 교회 에서 성행하고 있다.

③ 회중 정치(침례 교회)

④ 에라스티안 정치(영국 국교회, 독일 교회)

⑤ 무교회 정치(퀘이커파)

⑥ 장로회 정치(장로 교회)

a. 개혁파 또는 장로교 교회의 정치체제로서 교회정치가 장도들에 의해 집행 되는 체제이다. 이는 모든 교회의 기본권이 성도에게 있다는 원칙 밑에서 성도들이 투표하여 뽑은 장로들(목사, 장로)에 의하여 민주대의(民主大義)의 정치를 행하는 교회를 말한다.

b. 그리스도는 두 가지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하나는 유기적 의미에 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를 그의 생명으로 채우시고 성령으로 지배하신다 (요 15:1-8), 엡 1:10). 또 하나는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의미 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마 16:18-19).

2. 교회의 직원(職員, officers)

(1) 특수 직원

① 사도

엄밀히 말해 사도란 예수님이 택하신 열두제자와 바울에게 적용되나, 또한 사도적 인물들에게도 적용된다(행 14:4,14; 고전 9:5-6).

사도의 자격은

a.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소명받고(막 3:14),

b.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며(요 15:27),

c. 하나님의 영감을 체험했고(행 15:28, 고전 2:13),

d. 이적의 권능을 행했고(고후 12:12),

e. 그의 사역에 풍부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이다(고전 9:1).

* 열두제자와 바울 외에는 그 후에 사도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가 설립되고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사도적 권능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로마 천주교와 영국 감독교회가 "사도 계승" 운운하여 교황을 베드로 의 후계자이니, 자기 교회 감독이 사도의 계승자이니 하는 따위는 전혀 근거 없는 거짓 선전이다.

② 선지자(先知者, Prophets)

이들은 교회에 대해 교훈을 말하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인물로서, 때로는

신비한 일과 미래사를 예고하기도 한다(행 11:28, 고전 12:10).

③ 전도자

성경은 사도들(12제자, 바울)을 수행하고 또한 돕는 이를 언급하고 있다 (행 21:8, 엡 4:11, 딤후 4:5 → 빌립, 마가, 디모데, 디도, 70인의 제자들). 그들은 사도에게 속하여 특별 파송을 받아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고, 장로를 장립하고(딛 1:5), 권징을 시행하고(딛 3:10), 권능을 행하기도 하였다.

(2) 통상 직원(보통 직원)

① 장로(Elders)

장로는 성경에서 감독과 동일 직분으로 말하고 있다(행 2:17). 그런데 장로는 나이를 강조한 칭호이고, 감독은 감시자(overseer)로서의 직무 를 강조한 칭호이다.

a. 가르치는 장로: 오늘날의 목사를 가리킨다(엡 4:1).

b. 다스리는 장로: 오늘날의 장로(치리장로)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목사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교회를 대표하고,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 서 목사를 도와 교회를 치리한다.

② 집사(執事, Deacons)

집사의 헬라어 "디아코노이"는 봉사란 뜻이다.

"장립 집사"(혹은 안수집사)는 장로와 마찬가지로 종신직이니 임의로 사면할 수 없고, 재판없이 파면시킬 수 없다. 그러나 봉사의 확장을 위해 임시로 세운 "서리집사"는 그 임기가 1년에 한한다.

3. 교회의 회의(Assembly)

개혁주의 장로교회에서는 각 교회를 원활하고 합목적성있게 관리하기 위해서 크게 3가지의 "회집"을 갖는다. 그것은 각 교회 혹은 지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와 일정 지역 내에 각 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노회", 그리고 각 노회에서 파송된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총회이다. 각 교회의 당회는 모든 회의의 기원으로서 외부의 간섭없이 자치적인 대외정치를 운영해 나간다. 그러므로 당회를 확장시킨 회의가 노회요, 노회를 확장시킨 회의가 총회일 뿐 당회를 위에서 억압할 아무 단체도 있을 수 없으니 당회 위에는 주님 뿐이다.

4. 교회의 권세(Power)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필요한 권세와 권위를 부여하였다(계 2:26-27).

(계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교회는 천국 열쇠를 받아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는 권세를 받았으니 그것은 유형교회보다는 무형 교회적 권세를 말함이다.

① 교회의 힘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힘(권세)의 출처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계 12:1, 21:2).

② 교회의 권세는 인적(人的) 산물이 아니라 신적(神的) 산물이다. 그것은 교회가 온통 하늘 영광으로 둘러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③ 교회는 빛과 소금의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죄악 세상을 압도해야 한다.

교회는 다음 세 가지의 권세로 그 권위를 갖는다.

(1) 가르치는 권세(교리권, 교훈권 → 설교권)

교회는 순수한 진리를 전파하고, 모든 불순세력으로부터 진리를 보수해야 할 사명이 있으니 그것이 교회의 큰 권세가 되는 것이다(딤전 4:1, 딤후 1:13). 가르치는 것은 "설교와 교육"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사역은 교회의 권세의 핵심이 된다.

(2) 다스리는 권세(치리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교회가 안정되고 화평하기를 원하신다(고전 14:33,40).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교회에게 적절한 규범과 교헌을 실행할 재판권을 주셨다(요 21:15-17). 물론 권징도 이에 포함된다(마 16:19).

잘 다스리는 교회와 목사(장로)는 교회의 왕되신 그리스도의 권세와 교회를 사랑하시는 성령의 위로로써 교인들의 영혼을 보살피고 징치할 것이다(마 18:15-20).

(3) 봉사하는 권세(사역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생애 중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병고치는 권세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겼던 희생사역을 교회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병들고 가난한 자와 그리고 좌절하고 옥중에 있는 자를 심방하고 구제하며 자선을 베풀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하기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신약의 초대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신자끼리 유무상통(有無相通)하여 서로 구제하기를 강조하고 있다(행 4:34).

 

제 4 과 은혜받는 방편(수단, Means)

은혜란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초자연적 감화(感化)"이다. 즉, 하늘나라의 "영적 행복"이요, 하나님의 "총애"이다. 방편이란 어떤 목적의 수단, 방법, 요소를 말함이다. 사람이 성장하고 살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때 음식은 생의 수단, 방편 혹은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 곧 은혜를 받는 그 수단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고찰하고자 함이 이 과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은혜를 성도에게 전달하심에 있어 그 방편(수단)들을 바로 자신의 교회에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맡은 그 은혜의 수단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말씀과 성례"이다.

1. 하나님의 말씀

교회가 맡은 은혜의 방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성도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이때의 말씀은 "진리 자체 - 생명의 말씀(로고스)"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 전파된 말씀(化身) - 곧 설교를 가리킨다. 교회에서 전파하는 설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설교는 참된 복음(예수, 십자가, 부활)의 전파이어야 함은 앞 과에서 이미 말했다. 말씀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서만이 은혜의 수단과 효과가 있다. 그래서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던 것이다(엡 6:"17). 또한 성령은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구원과 은혜(축복)에 역사하니, 말씀을 떠나서 성령 단독으로 역사한 적은 없다. 교회는 항상 성령 충만한 "말씀"을 지니고 구원과 축복의 은혜를 베풀고 천국을 확장시키는 사명을 다한다(말씀 충만 = 성령 충만).

2. 세례(洗禮, Baptism)

① 세례 또한 은혜받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②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마 28:19).

③ 세례는 중생의 공적(公的)이고 외적(外的)인 표지(Sign)이다(행 22:16).

④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을 교회가 만민 앞에 인(印)을 치고 공표(公表)하는 예식이다.

그것이 예식이지만 세례받는 당사자는 그 순간, 말로 다 할수 없는 은혜를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다.

중생인은 먼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성령세례), 물뿌림(baptize → 씻어 정 결케 함)의 행사(물세례)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부자관계"에 놓임을 인 정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란 어느 교파에서 고집하듯이 반드시 침례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물을 붓든지, 뿌리든지, 그 양식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예식을 통하여 의미되 는 "정결과 중생"의 확신이 중요한 것이니, 그것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따르는 외적 표식(인침)이기 때문이다.

3. 성찬(the Lord's Supper)

성찬 역시 은혜받는 수단 중 그 하나이다.

① 성찬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유월절에 제정된 것이다(마 26:26-29).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이 성찬의 떡과 포도주의 먹고 마심은 곧 예수의 살과 피에 대한 상징이다.

② 성찬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최고봉이요, 그의 구속사역에 대한 계속적인 기념(記念)인 것이다.

③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표시임과 동시에 그의 십자가의 공로와 효과가 영적으로 임재하는 실제적 표시이기도 하다.

④ 성찬은 쯔빙글리처럼 단순한 "기념"만도 아니고, 로마교회처럼 떡과 포두주 자체가 곧 살과 피로 돼 버리는 "화체(化體)도 아니다.

그것은 성찬에 참예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셔서, 그의 마음을 감화시켜 갈보리의 십자가를 생각하도록 하는 실제적 은혜 체험의 귀한 수단인 것이다(칼빈).

그러므로 성찬은 여건만 허락되면 자주 할수록 좋다. 그리하여 성도로 하여금 자주 갈보리를 연상하고, 흉악한 죄인이 주님의 피와 살로써 구원받게 됨을 감격케 하며, 이제는 그의 피와 살을 취함으로써, 약속된 축복을 풍요로이 누릴 수 있게 됨에 감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화체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찬을 물리적으로 생각하여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주장한다.

다시말해서 떡과 포도즙의 특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그 본질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주장의 근거는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두었다(마 26:26, 요 6:50). 그러나 이 구절들은 비유적이며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요 6;63).

그리고 화체설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의 법칙에도 위반된다. 어찌 물질의 속성과 본질이 서로 별도의 것으로 생각되어져야 하겠는가?

2. 루터파 교회의 견해(공재설)

루터파 교회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을 배척했으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신성과 연합되었으니 인성이 신성의 특성을 전달받아 편재(偏在)하게 된다는 원리를 주장하여 공재설(共在說)을 대용하였다. 루터는 성경에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가 그 떡을 가진 곳에는 그 안에, 그 밑에, 그것과 함께 내 몸을 가진다"는 의미로 오해하여 공재설을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육체를 가진 인성으로서도 성찬시의 떡 중에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을 잘못 해석한 불합리한 해석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내몸이니라"는 말씀을 "이것이 내 몸과 동반하느니라"고 하는 의미로 만들기 때문이다.

3. 쯔빙글리파의 견해(상징설)

쯔빙글리는 성찬이 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만 보고 다만 그의 신성이 행사에 임하는 것 뿐이고 그의 몸이 실제로 임재함이 아니라고 하는 상징설을 주장하였다. 즉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행하신 것을 기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표시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도 분명하다.

4. 개혁파 교회의 견해(영적 임재설)

칼빈은 쯔빙글리와 루터파의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은 "이 떡이 내 몸을 대표하느니라"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쯔빙글리가 성찬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과거의 속죄적 죽음에 의뢰한다는 점에만 강조했다고 비난하고 그리스도는 현재도 성찬에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하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임재는 오직 영적인 것이니 입으로 먹고 마실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만 계시고 땅에는 계시지 않으시니 그의 교통은 신앙으로만 추구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쯔빙글리의 상징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찬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여 주심을 믿었다. 바울 사도는 성찬에 대하여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26)고 했으니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전하는 것이다.


 

Ⅶ. 세상의 종말은 어떠한가?(종말론)

성경상으로 종말론이란 명칭은 이사야 2장 2절, 미가 4장 1절의 "말일"(the last days), 베드로전서 1장 20절의 "마지막 때(the last time), 요한일서 2장 18절의 "마지막 때(the last hour)의 구절들에 근거한다. 이 표현들은 신약시대 전체를 언급해 주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은 시기로만 구별을 했는데 하나는 "이 세대(this age)이며, 다른 하나는 "오는 세대"(the coming age)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의 메시아 강림과 세상 끝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메시아가 오자마자 즉시 세상 끝이 될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짓지 못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초림이나 재림을 모두 미래에 있어질 사건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구별을 못한 것뿐이다(벧전 1:10,11).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메시아의 강림이 이중적임을 분명하게 구별지어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때

오는 시대

말세가 왔다

(벧전 1:20, 요일 2:18)

말세가 오고 있다

(딤전 4:1, 마 24:14,24,27)

이것은 오는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초월을 의미한다.

이것은 미래를 의미한다(재림)

"주의 날"(벧후 3:10, 히 2:5, 엡 1:21)


이와같이 구분이 되는 것을 볼 때 미래에 메시아가 와서 왕국을 지상에 설립하시겠다는 구약의 예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종말론의 내용

종말론이란 명칭은 현재 세계와 인류의 역사가 마침내 그 종말에 도달하리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역사는 무한 무궁한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을 향하여 진행하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 종말은 굉장한 위기로 다가올 것인데, 그 위기와 관련된 사실과 사건이 종말론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사변들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종말론에서 취급되기 때문에 종말론을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신학계의 통례로 되어 왔다.

 

개인 종말론

개인의 종말은 사망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은 세 종류의 사망 곧 육체적 사망과 영적 사망과 영원한 사망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존재의 소멸이나 종결이 아니라 분리를 의미한다.

성도의 죽음은 천국행의 디딤돌이다.

그것은 멸절(滅絶)이 아니라 다른 영역(領域)으로의 이전(移轉)이라 할 수 있다.

A. 육체적 사망

육체적 사망

영적 사망

영원한 사망

몸과 영혼의 분리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

사람의 전인격이 하나님의

은총과 임재에서 분리


a. 육체적 사망의 개념

사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 하지만 육체적 사망은 결코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의 분리에 의한 육체적인 생명의 종결을 의미한다.


여기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① 몸의 사망

여기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영혼의 죽음과 구별함으로써 육체적 죽음이란 썩어지는 육체와 썩지 아니하는 영혼이 서로 분리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마 10:28).

성도는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천국으로 돌아간다(전 12:7).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니 그것은 불신자에게 해당된다(눅 12:5)

② 죽음은 죄값이다.

죽음은 저절로 오는 자연적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은 죄의 결과요 형벌이다(창 2:17, 롬 5:12).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며(시 90:7,11), 심판(롬 1:32)이며, 정죄요(롬 5:16), 저주(갈 3:13)의 표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완전인" 곧 "영생인"일 수 있었으나 죄를 지어 영적 사망이 왔으므로 결국 "죽어야 할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③ 성도의 죽음은 또 다른 생의 이전이다.

성도의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경역(境域)"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그것은 천국에로의 발판이다. 즉, 죽어야 부활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죽음을 "돌아가는 것"(왕하 22:20)이라 했고, 여호수아도 임종시,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간다"(수 23:14)고 고백했던 것이다.

(수 23: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 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사도 바울은 더욱 솔직히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음"을 죽음으로 묘사했고(고후 5:8),"장막을 벗고, 덧입는 것"(고후 1:1-3)을 죽음이라고 말함으로써 죽음을 전혀 "끝"(end)이나 "슬픈 것"(sadest thing)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④ 성도의 죽음은 성화의 한 과정이다.

성경은 육체적 사망을 형벌 즉 죄의 값이라고 했다(롬 6:23).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죄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 죄책에서 벗어났는데 어찌하여 사망을 맛보아야 하는가? 왜 신자들은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늘로 직접 휴거되지 않고 사망에 굴복하게 되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소극적인 면으로, 신자들의 사망은 형벌의 죽음이 아니라 징계이며(롬 8:1,2), 적극적인 면으로, 사망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성화를 위하여 선택하신 방편이기 때문이다.

b. 죄와 사망과의 관계

죄와 사망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펠라기안파, 소시니안파, 알미니안파에서는 아담의 원죄와 죄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을 부인하고, 인간은 범죄하기 전에도, 다시 말해서 아담이 죄를 범했든지 아니했든지 간에 사망의 법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가사적(可死的)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주의(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은 날 때부터 죄 아래서 출생하며 죄를 범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도 죄성을 가지고 출생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죄 때문에 사망이 온 것이다. 성경을 볼 때 사람은 본래 가사적으로 창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망은 죄 때문에 온 것이며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롬 5:12)

오늘날 과학자들은 인간의 사망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한다. 새 생명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계에서나 적용되는 이론이지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모두 성경의 교훈과 맞지 않는다.

죄와 사망과의 관계에 관한 성경의 교훈은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에 소개되었고 또 죄에 대한 형벌임을 명백하게 지적하여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가사적(可死的)으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망은 인간의 불순종에 기인하였으며 육체의 사망은 영적 사망의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다(롬 5:21, 고전 15:56). 이렇게 성경에서는 사망이 죄의 형벌인 것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창 2:17, 롬 5:12,17,약 1:15).

c. 사망에 대한 승리

성경은 몸의 부활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고전 15장, 롬 8:11).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 또는 죽은 자 중에 먼저 나신 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백성의 부활도 그의 것과 같으리라는 것을 함의하며 그의 부활이 육체적 혹은 신체적 부활이었으니 성도들의 부활도 역시 같은 종류의 부활일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몸의 구속도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롬 8:23, 고전 6:13-20).

제 2 과 죽음후의 중간상태(중간기 상태)

중간기 상태는 개인의 죽음과 일반적 부활과의 중간 기간에 육체를 떠난 영혼이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세계가 있다. 첫째는 모태에서 출생하여 죽을 때까지이고, 둘째는 죽은 후부터 일반 부활 때까지의 영혼의 세계이며, 셋째는 부활하여 영원 무궁 세계로(천국 혹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세계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기는 둘째 부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 중간기 상태에 대한 성경의 진술

(1) 육체의 중간 상태

인간의 육체는 그 본래가 흙(먼지,dust)이므로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의인이나 악인이나를 막론하고 죽어서 먼지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부활할 때까지의 각자의 무덤에서 쉬고 있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죽으신 후 사흘간 무덤에 계셨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부활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죽은 육체는 아직 "완전한 구속"에 도달치 못했다. 지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사실 "영혼의 중생"이지 육체가 완전히 거듭나거나 변화된 무엇이 아니다. 즉 완전 성화된 "부활체"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도의 육체는 여전히 죄성과 허물을 가지고 있어, 원치 않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점점 늙고 병들어 쇠퇴해 가고 있음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이 불완전한 육신이 부활하신 주님의 그 "부활체"와 똑같이 변화되려면 부활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할 때야 가능하다.

주님의 재림은 사망권세를 멸하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여, 성도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순간이다. 재림과 동시에 육체는 무덤에서 나와 천국에 있는 영혼과 결합되어 새로운 모습 곧 "부활체"를 얻어 천국에서 영생복락(永生福樂)하는 것이니 이것이 영화이다. 물론 살아있는 성도는 죽음없이 그대로 부활될 것이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간 육체는 주님의 재림 시까지 "중간상태"를 잠시 기다리는 "대기상태"로 있게 된다.

(2) 신자들의 영혼의 경우

신자들의 사후 상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눅 16:19-31, 눅 23:43, 살전 5:10, 히 12:23, 계 14:13).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했다. 이와같이 성도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들어가 모든 고역을 그치고 평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잠자는 상태는 아니다. 아래의 표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3) 불신자들의 영혼의 경우

불신자들의 사후 상태에 대한 성구는 별로 많지 않으나 다음 몇 구절에서 발견된다(마 25:46, 막 9:48, 눅 16:19-31).

불신자는 죽어서 그 육체는 흙으로, 그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진다(시 9:17, 눅 16:23, 벧후 2:9, 계 14:11).

지옥은 다른 말로 "음부(hell)"라고 하는데 히브리 말로 스올, 헬라말로는 하데스라고 한다(신 32:22, 욥 21:13, 마 11:23).

지옥은 "영원한 불"(마 25:41), "영벌"(마 25:46), "바깥 어두운 곳"(마 8:12),"영원한 멸망"(살후 1:9), "유황불꽃"(계 19:20)으로 묘사하여 그곳은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절하고 비통한 형벌의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다.

신자들의 중간기 상태

불신자들의 중간기 상태

① 살아서 완전한 의식을 가진 상태

② 안식과 영원한 행복의 상태

③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

① 의식을 가진 상태

② 고통의 상태

③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상태

인간의 육체는 죽은 후에 흙으로 돌아가 썩어진다.

그러나 결코 죽거나 잠들지 않는 그들의 영혼은 불멸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그때 거룩함으로 완전케 되어, 지극히 높은 천국에 영접되며 거기서 빛과 영광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육체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 그러나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지며, 거기서 고통과 칠흙같은 어둠 속에 지내면서 최후 심판을 위해 유보되어 있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가게 될 이 두장소(천국과 지옥) 이 외에 성경은 어떤 곳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제 3 과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A. 그리스도의 재림

1. 재림에 대한 성경의 교훈

신구약 성경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훈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성경에 있는 예언의 중심이 무엇인가? 성경의 중심 대지는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구약은 메시아로 오실 것을, 신약은 이미 오신 메시아와 앞으로 재림하실 메시아를 가르치고 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은 1845번이나 언급되었고 신약에만 318번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구약에는 신약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분명히 구별하지 아니 하였으나 대선지서와 소선지서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여호와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들이 초림 후에 재림이 있을 것을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으니 크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2. 재림에 관한 그릇된 주장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으나 이 재림을 의심하거나 또는 재림을 믿되 오해하는 자들이 있다.

① 정신적 재림설

자유주의자들은 세계가 기독교의 감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으로 통치되는 것이 곧 재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이 점점 악해질 것과 그리스도께서 몸소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으니 이것은 역설이다.

② 성령 강림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이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을 오해한 주장이다. 그 이유는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도들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계속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③ 영적 재림설

이것은 마태 복음 28장 20절과 요한 복음 14장 8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영적으로 임재하여 계심이 곧 재림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도 유형적으로 재림하신다는 성경 교훈에 배치되는 주장이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④ 임종시의 재림설

이것은 성경 누가복음 23장 42,43절과 사도행전 7장 55,59절에 근거하여 성도가 죽을 때 그 영혼을 받기 위해 주님께서 내려오심이 재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을 왜곡한 주장이다.

B. 그리스도의 재림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모든 예언의 중심 사상이다. 그러므로 재림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성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인식하지 않으면 그의 왕직을 이해하기 어렵고 또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예언도 재림과 관계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참된 요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유일한 소망(딛 2:13) 순교자들의 열망(계 6:10)이며 만물의 대상(롬 8:9)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역사의 절정을 이루며 타락 후 죄에 대한 최종적 승리가 된다. 또한 만물까지도 대망하던 만물의 회복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될 천년왕국을 통해서 성취되기 때문에 이 재림교리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사실 아담이 범죄한 후부터 세상의 모든 역사는 재림과 함께 성취될 천년 왕국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아담이 범죄하자 세상에는 저주가 임하였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까지도 고통 중에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창세기 12장 3절에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부름을 받고 그의 자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예언이 있는 이는 천년왕국시대에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다(히 11;9,10). 그 후에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암시적으로 예언하고 있다(출 15:17, 신 32:41-43).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 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C. 재림 전의 대 사건들

성경에는 주의 재림 전에 몇 가지 중대한 사변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교훈하고 있다.

(1)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됨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 이스라엘의 회심

이스라엘 백성은 확실히 하나님의 특별하신 언약으로 사랑을 입은 선택민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주님 재림 전까지 수많은 언약된 백성이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될 것임을 성경은 누누이 "비밀(신비)"이라는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다

(롬 11:25-29, 슥 12:10-13:6, 고후 3:15).

2500년간이나 독립을 잃고 세계 각처 107나라에 산재하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20세기에 와서 성경의 예언대로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140여 년 전에는 유대에 약 3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했고 전 팔레스타인에 8000명 정도가 거주하였으나 70년 전에는 41000명 정도에 이르렀고 세계 2차 대전 후에는 50만, 지금은 300만 이상이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1948년 5월에 독립을 얻어 1949년 5월 19일 와이즈맨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여 국가를 재건하였다.

현대 20세기의 기적이 무엇인가? 역사가는 핵에너지의 발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독립이라고 말한다. 2500년 간 독립을 잃었던 나라가 독립한다는 것은 기적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3) 배교 사상의 편만

성경은 말세에 사람들이 점점 악하여질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신신학자들은 성경의 예언과 반대로 점점 나아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세상의 부패상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사 59:13-15, 마 24:24, 살후 2장, 딤전 4장, 딤후 3장, 벧후 2장, 계 13,17장)

특히 다니엘 12장 10절과 계시록 22장 11절의 사실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것은 일반적인 것(국가적 반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에 있어서는 교회 안에서 배교 운동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장한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국가와 더불어 하나님을 반역하는 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언된 사건과 사실이 20세기에 이르러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중시해야 할 것이다.

배교의 형태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도덕적인 면(유 4장, 벧후 2장, 딤후 3:1-5)

유다서 4절에 예언한 대로 도덕적 면으로도 배교가 있을 것을 말한다. 즉 성경을 악용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노아 때와 같고 소돔 고모라와 같다고 하셨다.

② 정치적인 면(계 13장, 유 8절)

정치적인 면에 나타난 배교적 운동은 세속적 세력과 타협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계시록 13장에 나타난 첫째 짐승은 머리가 상하였으나 다시 회복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다니엘 7장에 있는 넷째 짐승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세속적 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둘째 짐승은 양처럼 나타나 용처럼 말한다고 했는데 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동시에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며, 용은 사단을 의미하는 것이니 외부적으로는 기독교처럼 나타나지만 용처럼 말을 하니 곧 배교적 기독교 단체인 WCC 세력을 의미한다.

③ 종교적인 면

계시록 17장 나타난 음녀는 종교적 배교를 의미한다. 말세의 종교적 배교는 음녀적 운동인 것이다.

(4) 국제 정세의 악화

예수님은 말세에 일어날 징조를 예언하실 때 종족 상쟁과 나라와 나라의 전쟁 그리고 국제 정세가 혼란해질 것을 예언하셨다(마 24:6,7; 눅 21:25).

100년 전에는 민족과 민족이 싸웠으나, 세계 1차,2차 대전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1898년이래 1974년 어간에 국제적으로 일어난 무력 충돌은 128건인데 그 중에 73건(57%)이 가까운 20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5) 자연에 나타난 재해

예수님은 지진과 기근과 각종 질병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셨다. 근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엄청난 지진으로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의 손실이 있었던 것을 지구촌 사람들을 다 알고 있다. 그밖에 심한 공해와 기근은 날로 그 심도를 더해가고 있다.

(6) 고통과 지식의 발달

(단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7) 적그리스도의 출현

헬라어의 "안티크리스토스"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즉 반(反)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처럼 가장을 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짓으로 유혹하고 주님의 양떼를 갈취해가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체이다. 그것은 또한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에게도 해당된다.

말세에 이를수록 이러한 거짓 선지자는 도처에 나타나 내가 "예수"라느니, "예수동생"이라느니, "감람나무"라는 등 온갖 궤휼로 성도들을 미혹하려 들것이다.


D. 재림의 시기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무화과나무가 푸르고 잎이 연하여지면 여름이 가까워 온줄 짐작하듯이 혹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습도가 높아지면 비가 올 줄을 알 듯이, 우리는 세상의 되어져 가는 죄악상을 볼 때 주님의 재림과 심판 날이 가까워 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재림은 언제나 임박한 것이다(히 10:25,약 5:8).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성경을 너무 문자적(여자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재림"과 "천년왕국"을 왜곡하여 신비주의와 안일도피 사상으로 빠져드는 자들이 많다.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진리이다. 기독교의 축복 개념을 "무환난"이나 "물질축복"에 치중하여 "요행주의 신앙"을

부채질 했을 때, 믿음이 약한 성도는 자연히 "환난도피 사상"에 빠지는 것이다. 대환난전에 성도가 하늘로 "들림받기"(속칭 휴거)를 기대하는 사상은, 성경을 성경에 의해 해석하려는 의도보다는 자기 만족의 심리에서 나온 아전인수격 해석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가난하고 병들어 실패의식에 물든 소수 민족일수록 "환난전 휴거소원"은 강하다. 우리는 이 해석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적어도 참된 성도라면, 핍박과 순교의 "일사각오"에서 탈피하려는 무책임한 도피근성만은 버려야 할 것이다. 더욱 눈물 흘려 기도하고, 몸바쳐 기도하고, 물질로 구제하고, 시간으로 희생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말세에 처한 성도의 자세이다. 참된 재림관은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사는 것이다. 성도는 "중생의식"과 "재림(종말)의식"을 동시에 조화하며 살아가야 한다.

E. 재림의 모양

(1) 몸소 강림하심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재림하실 것을 교훈하고 있다(행 1:11, 빌 3:20).

오늘의 합리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과 사회 복음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재림을 부인한다. 이들은 재림의 찬란한 묘사들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재림은 점진적인 영적 방법으로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복음의 점진적 발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부러 이단들은 특정 인물을 재림하신 그리스도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같은 해석은 모두 그릇된 해석이다.

(2) 육체적으로 강림하심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가셨으니 성령으로 대신하거나 우리의 마음에 영적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실 때에도 육체를 가지고 오신다. 그러나 그 육체는 그의 지상 비하의 생활 중에 가졌던 육체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귀하신 영광스러운 몸이다(행 1;11, 히 9:28, 계 1:7).

(3) 볼 수 있게 강림하심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는 것이다. 계시록 1장 7절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고 볼 터이요..."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오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께서 1914년에 불가견적으로 재림하셨다고 한다. 두말할 것없이 이단적인 주장이다(행 1:11, 마 24:30, 막 13:26, 히 9:28, 골 3:4, 딛 2:13).

(4) 돌연 강림하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훈을 마치시고 축복하시다가(행 1:9, 눅 24:51) 돌연히 올라가셨으니 돌연히 오실 것이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임할 것이다(마 24:44, 막 13:33, 계 16:15, 살전 5:2,3).

(5) 영광스러운 승리로 강림하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는 초림시와 같이 비하의 신분으로 오시지 않고 백마를 타고 오시며 구름을 타고 천군 천사들과 하나님의 성도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F. 재림의 목적
그리스도께서 7년 대환난 후에 지상으로 강림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1) 악의 모든 세력을 파멸하기 위해서 오심

대환난기에 환난의 동인이 되었던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그들의 군대를 파멸하고 특히 사단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지기 위해 오신다(계 19:11-21, 계 20:1,2).

사단을 결박하여 즉시 유황불 못에 던지지 않고 무저갱에 던지는 것은 천 년 간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천년 후 지상에 남은 자들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계 20:7-10).

(2)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는 그의 초림과 같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시기 오신다(계 19:11-13).

(3) 의의 왕국을 세우시려고 오심

구약 시대부터 예언한 의의 왕국 혹은 천년 왕국을 건설하시고 만왕의 왕으로서 친히 통치하시려고 오신다(계 19:15, 사 11:3-5).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나 그 때는 만왕의 왕으로서 친히 군림하여 통치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서 정의와 평화가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성도들도 분봉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계시록 20장 4-6절에 "보좌들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혼자 시판하시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다스림을 보여준다(시 149:5-9).


제 4 과 부활, 심판, 신천신지

1. 부활(Resurrection)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위의 말씀과 같이 주께서 세상 심판권을 가지고 성도는 구원하고 불신자는 지옥에 갈라놓기 위해, 공중에 재림하실 때 드디어 세상은 종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눈 깜짝할 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동시에 이제까지 무덤에서 쉬고 있던 죽은 성도가 먼저 일어나 공중에 들림받고(휴거),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성도들이 산채로 또한 주님 앞으로 끌려 올라오게 된다(살전 4:13-17). 이 신비롭고 숨막히는 장면을 가리켜서 보통 말하기를 "휴거"라고 한다.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가 이미 이런 체험을 했고(창 5:24, 왕하 2:11), 신약의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온 것(고후 12:4) 등이 곧 휴거의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들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리우신 "승천"이 가장 유력한 표본이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주님의 승천 그 모습으로 공중에 들림받게 되는 것이다.

(1) 부활에 대한 성경적 증명

① 구약에서

부활에 대한 신념이나 예언의 모습은 족장시대부터 선지시대까지 계속된다.

② 신약에서

복음이 부활에서 그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성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밀접하게 따라다닌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 부활의 특성

a. 부활체(復活疜란)?

① 성경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언급했다.

정통 견해에 따르면 첫째 부활이란, 중생하여 영혼이 부활된 상태를 말하고(요 5:25), 둘째 부활이란 육체적 부활 즉 재림시 영육이 결합되어 새로운 부활체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요 5:28-29).

그러므로 중간상태에 하늘나라에 들어간 "영혼의 독립적 상태"는 첫째 부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는 그리스도의 부활체에는 미흡하다.

그래서 육체의 부활은 필요하며 드디어 중간상태까지 나뉘어있던 성도의 "영혼과 육체(시신)가 결합된 새로운 부활체"는 그리스도의 그것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둘째 부활로 본다. 여하튼 성도는 재림시 전혀 새로운 형상의 부활체를 얻게되는 것이다.

② 부활체는 현재의 신체(body)와 동일모습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전혀 시공(時空)을 초월한 불사(不死)의 영원한 모습이다.

③ 부활제는 썩지 않으며, 고통을 받지 않으며, 병들지 않으며, 죽지 않으며, 가하고 영광스럽고, 최고로 아름다운 신령한 몸, 곧 "영체(靈體)일 것이 분명하다(요일 3:2, 고전 15:44)

부활체는 세상처럼 육을 중심한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중심한 영체이다.

b. 악한자의 부활이란?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는 불신자가 주고 그 몸과 영혼이 흙이나 먼지가 되어 아주 멸절되어 버려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그들도 역시 다시 살아서 그들의 지은 죄악의 보응으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생이 있듯이 영벌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마 25:46). 그러므로 악한 자도 그 영혼과 육신이 결합되어 마지막 심판대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 원리만 믿으면 악인의 형통이나 그들의 핍박과 억울한 누명을 자신있게 무시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2. 최후 심판

부활은 최후 심판과 바로 연결된다. 부활된 신자와 불신자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최후 심판은 한마디로 천국갈 성도와 지옥갈 악인을 갈라놓는 것이다(마 25:31-46). 양과 염소를 갈라놓고(마 25:33), 알곡과 쪽정이를 분리하며(마 13:30),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것이다(요 5:29, 계 14:14-20).

(1) 심판주

만왕의 왕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가 될 것이다.(요 5:27, 행 10:42, 빌 2:10)

이 심판 권세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부여한 것이다(요 5:23, 요 9:39).

그것은 성자가 하나님이요 인간인 구속자로서, 친히 대적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어 죽으셨고 그만이 부활하사 바로 인간을 심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십자가의 구속사업에 대한 보상으로 이 명예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빌 2:6-10). 천사들도 그의 심판 사역에 보조할 것이다(마 13:41).


(2) 심판 대상

① 온 인류 개개인이 심판대 앞에 서야할 것이다(전 12:14, 마 12:36, 롬 14:10).

② 마귀도 심판을 받게 된다(마 8:29, 고전 6:3).

3. 신천 신지

이 신천 신지는 "재림 → 부활 → 심판" 그 다음에 되어질 최후 상태를 말함인데, 우리는 여기서 "재림부터 최후상태까지"의 진행 사역을 몇 일 혹은 몇 달 혹은 몇 년 걸리는 기간으로 생각지 말 것이니, 그것은 거의 동시성을 띠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구성보다는 논리적 구성에 강조한 순서임을 알자.

(1) 악인의 최후상태

한마디로 불붙는 지옥 그것이다.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형벌을 받는 상태이다.

(마 13:42, 막 9:47,48, 계 14:10).

지옥의 헬라어는 "게헤나"인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게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인출된 말인데, "힌놈 골짜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을 불길 속으로 지나가게 했던 끔찍한 제사장소를 가리킨다.

그곳은 후에 예루살렘의 쓰레기 등을 태우는 더러운 불길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골짜기가 되었고, 혹은 "가시골짜기"라고도 불리워졌던 곳이다.

이와같은 말의 어원과 배경을 볼 때 지옥이라는 곳이 어떠한 상황이겠는가를 우리는 가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믿지 않았던 악인들은 이 영원한 형벌장에서, 그들의 죄값을 치루면서 통곡하며 후회하고, 자책하고, 실망하며, 끝없이 음침한 흑암의 깊은 곳에서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마 8:12).

(2) 의인의 최후 상태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신부되는 성도가 최후에 가는 곳은 천국이다.

천국은 추상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장소이다(요 14;2, 마 22:12,13).

이 천국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다.

① 새 하늘과 새 땅이다(사 51:6, 계 21:1).

우리가 있는 지구와는 비교도 안되는 전혀 새로운 천지이다.

② 영생을 누린다(계 21:6, 요 3:16, 눅 18:30).

③ 영화로운 곳이다.

천국은 극치의 화려한 미(美)로 단장되어 있는 곳이다(계 21장).

찬란한 예루살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