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5과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7

好學 2012. 1. 7. 20:34

제55과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7



보아스의 약혼사(約婚辭)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7a)


(1) 보아스 역시 타작마당이 절정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서곡에 불과했다.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밤'(어둠)이라는 도화지에 아주 멋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왜 이러한 풍성한 삶이 가능했을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삶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출을 많이 하게된 부자이면서도 보아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한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우리 주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명 '어리석은 부자'로 명명된 사람이다(눅12:16-20) :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6,17-18).  

그러나 이 소리로 그의 일생은 끝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풍성한 소출이 오히려 멸망의 서곡이 되었다.  


(2) 그러나 보아스는 달랐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교만하지도 않았고, 한 밤의 불청객인 룻을 의심하지도 않았고, 다른 흑심을 품지도 않았다.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나타날 때만 해도, 특별히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떻게 진행될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분과 긴장이 룻과 보아스를 돌러 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이미 구상이 다 되어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아무 막힘 없이 척척, 그러니까 룻을 모델로 하는 아름다운 사랑, 행복한 결혼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곧바로 이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간다.  이것이 보아스의 다른 점이다.

10절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역시 보아스는 큰그릇이다.  그는 사람들이 복을 받아 사는 것을 이야기할 정도로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자연 사람을 보는 눈도 달랐을 수 밖에 없다.  룻의 청혼에 대한 보아스의 약혼을 위한 언약은 참 건강한 영성에서 비롯되었다.

(1) 한 사람의 영적 수준은 그 사람의 영적 파워를 결정한다
.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흐름을 빨리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어느 날 어두운 밤에 이불 속에 알 수 없는 -최소한 그녀의 목소리나 이름을 듣기 전에는- 사람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9절처럼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고 청혼할 때 우리는 긴장, 당황, 혼란스러움, 정리되지 않음, 혼돈 때문에 정신차리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보아스는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나는 어떤가?  어떤 문제 앞에 몇 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는 문제는 혹시 없는가?  하도 많이 풀어보아서 이제는 척척 풀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조금만 변형된 어떤 문제를 만나면 여지없이 두손 바짝 드는 경우는 없는가?  아직 어떤 문제 앞에 도대체 무엇이 옳고, 어떻게 해야 바르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지를 빨리 정돈할 수 있어야 그 문제가 풀리게 된다.  그런데 그 이유조차도 파악이 안되고 있으니, 해결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성도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 평소 연습은 잘하는데 어떤 사건을 통해 벌어지는 실전에는 매우 약한 경우를 종종 본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성경이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  "이 일을 만나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저 일을 만나면 이렇게 담대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이처럼 살면 하나님의 큰복을 받게 된다.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크게 얻어터진다."  뭐 그밖에도 많다.  그런데 정작 실전에 나가면 여지없이 패하고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타령만 Dr. 위콤처럼 '무한반복' 한다.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도덕시험 100점과 신호등을 지키는 것이 전혀 상관 없는 것이나, 성경을 아는 것과 그것대로 사는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어찌 거기에 소망이 있겠는가?   

(2) "네가 빈부를 무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룻의 기준은 빈(貧), 부(富), 나이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은 그런 것들이 불필요하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룻은 더 중요한 것을 보았다.  그것이 룻의 영성이었다.  룻은 나오미를 끝으로 꺼져가는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았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조금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줄 알았다.  이것이 자기가 만들어 가는 복의 몫(size)이다.

당신은 어떤 일을 결정하고, 처리할 때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가?  보아스와 룻은 결혼의 기준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빈, 부, 나이가 결혼의 기준이 아니었고, 또 그러한 것이 아닌 룻의 진짜 아름다움을 귀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볼 수 있는 보아스 역시 뛰어난 신앙의 소유자이다.

(3)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처음 모압을 뒤로 하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올 때는 미약할 때 그지없는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약한 시작을 오늘처럼 풍성한 것으로 이끈다.  이것이 룻의 잠재력이었다.  점점 더 풍성한 삶, 더욱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스런 삶의 한 부분이다.  점점 더 복되고, 긍정적이고, 풍성하고, 발전하고, 부흥하는 삶, 점점 나아지고, 탄탄해 지고, 커지고, 미래(내일)가 있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