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5과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8

好學 2012. 1. 7. 20:35

제55과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8


11절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의 존재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룻을 가리켜 '현숙한 여인'이라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룻은 비록 짧은 3개월 정도의 베들레헴 생활이었지만 인정받는 사람으로 우뚝 선다.  "현숙하다"의 뜻은 "강한, 용감한, 남자다운, 능력, 수완"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룻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힘과 지혜가 있는 여인이라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가정, 친구, 학교, 직장, 교회 등등-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가?  나는 타인들의 기억 속에 어떤 사람인가?  골치 아픈 사람인가, 기억하기 싫은 사람인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드는 요주의(要注意) 인물인가?  아니면, 당신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기억) 속에 훈훈하게 살아있는 따뜻한 사람인가? :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다'(all) "룻은 현숙한 여인이다"고 인정할 만큼 지정의(知情意)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실 불과 3개월 전 나오미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할 때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1:19b)였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반대로 온 성읍이 '현숙한 여인'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12-13절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 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보아스는 타작마당을 약혼식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보아스는 룻의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본대로의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는 것으로 그녀의 청혼을 수락한다(10-11).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아스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앞세우지 않았다.  모든 일을 순리대로 풀어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10-11),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12-13)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그것만큼 그의 타작마당은 깨끗하고, 정결하고, 아름답다.

(1) "기업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그는 모세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규례를 정확하게 밝힌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룻의 청혼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씀의 빛 아래서 이 일이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다.   

(2) "아침에 …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욕심, 욕망, 자기 생각, 자기 열심이 앞서지 않았고, 자기 감정이나 기분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 혹은 흥분을 앞세움으로써 일을 그르치게 하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릇 우리의 신앙이 그래야 한다.  환경에 너무 민감하거나,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변하는 신앙은 깊은 신앙이 아니다.  또한 보아스의 지혜로운 신앙을 보게 된다.  그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전에 미리 차단한다.  좀 더 큰 일을 위해 사소한 것들을 절제하고, 구별할 줄 아는 넓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신앙에 있어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다.

(3)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 네게 행하리라."
 
보아스는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신뢰만큼 자유하게 된다.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고, 순종하기를 원한다.  사사로운 일을 말씀 앞에 두지 않았다.  자기 목적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았다.  

부스러기 묵상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
보아스의 영적 실력을 보라.  보아스의 통찰은 아름답고, 감격적이며, 룻이라는 보석을 알아볼 수 있을만큼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이었다.  그는 룻이라는 한 알의 밀알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알아보았고, 발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그러나 보아스는 모든 것을 룻의 입장에서 해결하기를 원한다.  자기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 중심이었다.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 앞에서는 단 1원이라도 분명하고 냉정한 현대인의 이기적인 모습에서 보자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했다.  이점은 룻이나 보아스가 다 같았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살았다.  모압을 떠났고, 이삭을 주웠고, 시모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으며, 그리하여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다.  이 점은 보아스도 마찬가지다.  이방인이요, 한 번 결혼에 실패한 여인이요, 가난했고, 말하자면 모든 면에 있어서 룻은 소위 '깜'이 아니었다.  함량 미달이다.

그렇다.  그것만큼 보아스의 영적 통찰(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보아스는 분명 '오늘' 속에서 '내일'을 보았다.  겉모양이 아니라 속사람을 볼 줄 알았다.  시시껍절한 '조건들'이 아니라 '룻 그 자신'을 볼 줄 알았다.  그것만큼 보아스는 건강한 삶을 살았고, 영육간에 청청한 삶을 살아가는 복있는 사람이었다.   

보아스와 룻은 역시 신앙의 명콤비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상호 신뢰가 보장된, 서로에게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영성이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볼 때 사소한 것에 목숨걸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길목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겠다.

나에게도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며, 세워주며, 하나님의 작품으로 지어져가는데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앙의 영적 동반자가 있는가?  그런 가정(家庭)이고, 부부(夫婦)인가?  그것을 서로 목표하는 교제요 만남인가?  두 사람은 과연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어떻게 될까?  다음 시간에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