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성령론 [聖靈論]

好學 2011. 12. 24. 21:37

 

성령론 [聖靈論]


목 차

Ⅰ. 여는 말 -------------------------- 1

Ⅱ. 성령에 대한 진술들 -------------- 1

Ⅲ. 다가오시는 성령 ----------------- 2

A. 성령의 활동하심 --------------------------------- 2

B.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의 역동성 ---------------- 3

C. 인간의 이지러짐-새로운 길 ---------------------- 3

Ⅳ. 성령과의 만남 ---------------------------------- 4


A. 성령의 목적 ------------------------------------- 4

B. 성령과 그리스도 -------------------------------- 4

C. 성령의 역사하심(성령의 임재하심) -------------- 5

Ⅴ.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 5

A. 義認과 聖化 ------------------------------------ 5

B. 새로운 역동성: 미래에 대한 개방 ---------------- 7

Ⅵ. 닫는 말 ---------------------------------------- 8


Ⅰ. 여는 말

성령과 그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언급되어져 왔으며, 지금은 이 때문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성령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저마다 그 이해에 대한 제안들을 내어놓기도 하지만 그 입장들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

먼저 인간의 한정된 언어로 성령과 그의 역사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모습을 아주 신중하고 철저히 (한정된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 다루어야만 한다.

태초 이래로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진술되어진 성령에 대한 언급들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성령은 어떠한 모습으로 활동하시며 어떠한 형태로 우리들과 이 세계에 다가 오시는지 알아 볼 것이다.

인간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성령의 이질적인 모습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감히 성령에 대해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와 그를 통해 나타난 새로운 길도 다루어 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어떻게 성령과 만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열려진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봄으로써 현시대에 있어서의 성령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알아볼 것이다.


Ⅱ. 성령에 대한 진술들

성서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볼 때, 성령에 대해서는 수많은 언급들이 있다.

먼저 공관 복음서에서는 성령을 예수보다 더 신성한 우선권을 가진 분으로, 그리고 예수는 성령의 사자로 표시한다.

바울과 요한의 경우에서는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의 또 다른 관계가 나타나는데, 예수는 성령을 지닌 분(beaver)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령을 보내신 분이다. 심지어 바울은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는 영" 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개혁주의 전통의 경우에서는, 성령은 주로 역사적인 그리스도에 종속되고 그 임무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을 인간에게 적용해야 하는 방법으로, 보내시는 그리스도와 보냄을 받은 성령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그리스도 자신과를 유용하게 연합시키는 띠(bond)이다." 라고 언급한다.

20세기의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중심이 된다. 그는 지적 사색에 몰두하거나 실용적인 개념보다는 존재론적으로나 창조적인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 했고 로마서 8장 9절부터 11절까지에는 신실한 사람들 속에 거하는 거룩한 분을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Kyrios)와 성령(Pneuma)을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화된 표현" 으로 본다. 전통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位와 역사에 눈뜨게 하며 주로 성육(incarnation)과 속죄만을 다룬다.

이상에서 역사와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을 서술해 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령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는 성급하다. 이제 성령의 활동에 대한 본 이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Ⅲ. 다가오시는 성령

A. 성령의 활동하심

구약성서에서 성령은 ruah(이 낱말이 전부 성령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라는 낱말로써 나타난다. 히브리어 낱말 ruah는 원래 대기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자주 '숨' (breath)으로 말미암은 대기 운동을 가리키며, 상징적으로는 "생명의 근원" (principle of life) 또는 "활기"(vitality)로 변했다. ruah는 죽은 것에 반하여 무언가 살아 있는 것, 경직되어 있는 것에 반하여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뜻하였다. 하나님에 적용할 때 강한 바람은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창조자의 힘, 하나님의 멸망시키는 진노와 살리는 은혜의 활동을 나타내는 비유가 된다.(겔 13:13, 36:26)

동물도 사람도 ruah는 가지고 있고 하나님도 탁월하게 이 ruah를 지니고 계신다. 그는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약성서는 생명의 역동성을 공기의 호흡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ruah는 인간과 동물 속에 있는 생명의 숨과 생명의 힘을 뜻한다.

ruah가 하나님과 결합되고, 하나님이 ruah와 결합될 때, ruah와 dabar Jahweh(야웨의 말씀)이 매우 가까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초기에 '야웨의' ruah를 통해 부르심을 받는 반면, 후기에는 대개의 경우 '야웨의' dabar을 통해 부르심을 받는다. 시편 33장 6절에서 '야웨의 말씀' 으로 하늘이 창조되었으며, 창조하는 하나님은 ruah의 창조적 에너지로 말씀한다.

하나님의 영은 피조물들의 삶의 힘이요 그 속에서 그들이 자기를 전개시킬 수 있는 삶의 영역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부활로부터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그리하여 피조물들의 삶을 영원히 생동하게 만드는 부활의 삶의 힘이다.

그런데 현실의 모습은 어떠한가?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의 '생동성'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심령화된 삶의 '영성'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 '영성'과 '생동성'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갈등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성령)의 다가오심이 지체되고 있다. 그 문제 해결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인간들이 성령의 활동하심을 제한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한 성령의 다가오심은 기대할 수 없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난 행위를 멈추고 성령의 말씀하심을 들어야 한다. 그분의 행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로 이 때가 성령이 활동하시는 시간이다.

B.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의 역동성

사실 인간의 힘으로서, 성령을 알고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표현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하나님의 영)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의 생동성에 대해 이야기하여야 한다.

삶을 역동화시키는 것은 삶을 창조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삶을 자유롭게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는 역동주의(Vitalisum)를 삶의 권리와 의무가 균형을 이룬 것으로 이해한다. '폴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라는 것을 역동성과 결합시킨다. 문화적, 생물학적 언어로 역동성은 "존재의 힘"(Seinsm chtigkeit)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삶의 힘"을 의미 내용에 대한 "삶의 지향성"(Intentionalit t)과 결합시킴으로써, 참된 역동성을 자기 목적과 목적을 위한 수단 사이에 있는 것으로 발견하고자 한다. 즉, 역동성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자기를 초월하려는 힘이다.

그래서 '역동성'을 이제는 '삶에의 사랑'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삶에의 사랑은 삶의 병들, 장애들,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며 "죽음에 대항하는 삶" 으로 인도한다. 삶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생성하는 이 역동성은 참된 인간성이다.

이 역동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에 담겨 있는 한 요소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C. 인간의 이지러짐-새로운 길

하나님과의 단절과 인간의 이지러짐은 '죄'에서 시작된다. '죄'는 "창조자로서의 삶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에로의 결합이 그의 계명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즉 하나님을 저버린 인간은 자기의 삶의 원천을 잃어버리며, 삶에 대한 계명을 거역하여 행동하며, 삶 대신에 죽음을 발견한다. 죄는 교란된 하나님 신뢰이며 불구가 된 하나님 사랑이다. 로마서 7장에서, 노예화된 인간은 죄에 대한 그의 주체적 존재를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는 우주적으로 이 모든 세계의 시간을 지배한다.

성령이 '삶에 대한 의미'로 느껴질 때, 성령은 현존에 대한 저항과 죽음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세계로'부터(von)'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mit) 구원을 받는다. 기독교의 성령 경험은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희망하면 할수록, 세계의 고난과 탄식과 우리의 연대성은 더 깊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 자리에 세우는 인간은 자기 자신 안으로 구부러진 인간(homo incurvatus in se, Luther)이 된다. 이지러진 하나님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지 아니면 또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의 자기 신격화는 '교만'(superbia hybris)으로부터 일어난다. 이 때,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할 수 없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이지러지고 교만한 신들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의 피조성과 연약함과 사멸성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이것은 인간 영혼의 정점, 가장 내적인 방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성령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Ⅳ. 성령과의 만남

A. 성령의 목적

인간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 전체에 임한 성령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성령은 기능적인 개념으로 성령의 소유자로서 승귀된 주님이 성령을 통해 교회에 임재하여 역사 하신다. 이 성령이 자신을 인간에게 줌으로서 인간에게 체험하게 할 수 있을 때 성령은 주(Kyrios) 그리스도 자신이 된다.

다시 살아나 승귀된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성령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 하시고 존재하신다.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그가 지상 생활에서 시작했던 것들을 세계적 규모로 계속 확대시키면서 역사 하시는 분이 되셨다. 우리의 대리자가 되시면서 그는 두 가지 면의 역사를 행해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 전체가 할 수도 없고 기꺼이 하려 하지 않는 일을 그는 해야만 했다. 그는 몸소 순종하고 희생하고 부활하심으로 단번에 전체를 위해 그 일을 하셨다.

여기서 성령의 목적이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새로운 인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변화 받도록 하기 위해 생명을 주는 성령인 그리스도께서 인간들과 교제하기를 바라신다. 일반적으로 이 목적을 의롭다 칭한다는 개념으로 정의를 내린 다음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의 의가 되고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서 우리는 새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의 마지막 목표는 義롭다 稱함이 아니라 聖化되는 것이며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B. 성령과 그리스도

앞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지상에서 시작했던 일을 세계적으로 확대시키시고 역사 하시는 분이 되었다고 했다.

헤르만은 고린도후서 3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영적인 주님이 그의 임재 때문에 발전하는 현상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닮도록 변화시켜서 성령과 하나님께 동참하게 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성령의 주체이며 그의 목표는 그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이며, 바로 이것이 성령에 대한 신약성서 상의 증거의 중심적인 특징이다.

바르트는 그의 책 "교회론" 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힘이다. 그 힘을 통해 벌, 자유, 지식, 화평 그리고 생명의 기적을 일으킨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임자와 역사, 그의 활짝 펴신 팔, 부활 능력 속에서의 그리스도 자신 즉, 부활의 능력 속에서 시작하여 그 때부터 그의 역사를 계속해 온 것처럼 계시의 능력 안에서의 그리스도 자신일 뿐이다. 이제 성령의 역사 하심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몇 가지만 간추려 본다.

C. 성령의 역사 하심(성령의 임재하심)

성령의 역사 하심이 신약에서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해석되었는데, 그 예언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소망에 있어서 중추적인 주요한 위치에 성령을 두었다. 이스라엘 역사보다 나중 시기, 즉, 성령의 오심이 그 민족의 삶 속에 현존하는 실제로서 이해되어지기를 그치고 미래적 소망의 대상으로 되어 버렸을 때에 이러한 소망은 영구적이고 보편적이게 될 성령의 출현에 대한 예언 속에서 그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성육신 사건의 결정적인 점과 최종성에 있다.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그가 성취하신 일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 또 그것은 대체되어질 수 없다. 그리하여 성령의 임재가 그리스도의 임재와 동등하다고 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구분이 필요하다. 성령의 임재는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 늘 부수적인 그 결과로서 따라나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성령의 역할은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사업에 추종적인 것이며 수단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하시는 일은 본질적으로 재생산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재현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다.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리스도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정적인 만남과 동등하게 보고 있으며, 로마서 8-9장에서는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됨의 필수 조건(condition sene qua non)이라고 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관한 객관적 사실의 주관적 보완자이자 대응하는 짝(subjective c- omplement or counterpart)이며, 성령의 역할은 인간들의 가슴속에 이 외적 사실의 내적 체험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 나타나신 짤막한 기간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연속시켜 주고, 인간들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에 관한 내적 이해를 형성해 준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에 관하여 인간의 영에게 증거하고 계신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곳에는 그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는 자그마한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영으로 증거해 주시는 그의 거룩한 영이 존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현재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거듭 진실되게 하는 진리로서 당신이나 내게 모든 시대와 모든 족속에게 타당하는 진리로서, 한 가운데 세우시는 것이 성령의 기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초대교회의 오순절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거기서 성령을 참된 진실함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정황의 비참을 깊이 느끼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을 때 오순절은 이루어진다. 이 오순절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뤄질 때 하나님이 주인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게 된다.


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A. 義認과 聖化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고 성령을 통해 삶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義認과 聖化의 은혜이다.

義認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받을 때 죄인이 값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 받음을 말한다. 그리고, 약하고 부족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부자처럼, 더 결핍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聖化이다.

義認과 聖化는 은혜의 수행(Vollstreckung)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Handeln Gottes)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은 그의 참된 교회에서 완전하여진다. 참된 교회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지배자로 경배되고 찬양된다. 즉, 하나님 자신이 그리고 하나님만이 의롭다고 인정하고 聖化한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고 聖化하는 데서 인간은 믿고 복종한다. 신앙 안에서 의롭다 인정되고 그의 복종 안에서 聖化되는 사실은 전적으로, 기적으로, 은혜로, 하나님의 행위(Werk)로 간주하게 된다.

은혜는 율법(Gestz)이며 복음(Evangelium)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그의 교회에로 택하실 때 그리고 택하신 후에 그분은 우리를 복음과 율법, 이 둘을 통해 부르신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이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고 따라서 죽음에 빠져 있는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것이라는 사실, 즉 "나의 몸과 영혼은 모두 살든지 죽든지 내 것이 아니라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 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집행되는 義認과 聖化의 은혜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은혜를 붙든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있음에 대한 앎을 뜻하며, 하나님 면전에 있고자 하는 의욕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복종의 불가해한 의욕이다.

은혜는 은혜를 받을 공로가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만이 찾아지고, 포로된 자만이 해방되며, 가난한 자만이 부해지며, 약한 자만이 강해지고, 약한 사람만이 높여진다. 비워 있는 것만이 채워지며, 쓰러져 있는 것만이 일으켜 세워진다."

성육신에 의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객관적으로) 화해를 조성했다. 그는 그에게 속한 자들을 그렇게 해방시킴으로써 말씀과 사랑은 드러나고 은폐된 교만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 있음을 알게 하고 바로 세리의 구석진 자리에 서기를 바라도록 그들을 (주관적으로) 해방시킨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는 "죄인으로서 화해된 자" 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은혜의 전면적 투쟁 속에 들어감을 뜻한다.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선사된 성령의 신비 안에서 은혜의 역사는 단일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義認과 聖化로 인식한다.

義認을 聖化에로 해소시키거나 聖化를 義認에게로 해소시키는 것은 둘 다 오류다. 둘 다 경건한 교만이다. 은혜를 통해 우리가 끌려 들어간 투쟁의 현실에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사고를 생각하고 두 개의 언어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완전(gebrochen)해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말은 불완전하다. 인간의 말이 불완전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그것은 진리를 말한다.

義認은 지금 여기의 아직 제거되지 않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이다. 聖化는 이런 죄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청구다. 또한 義認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고 聖化의 은혜는 죄인으로서 우리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산 자에게 "죽으라!" 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성이 모든 단계와 가능성에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 즉 자비를 입은 후에 우리의 인간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義認으로서의 하나님 은혜는 하늘의 별들처럼 하늘의 별들처럼 위엄과 명료성을 가지고 우리 위에 있으며 법적 행위(actus forensis)이다. 그런데 聖化로서의 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의 말씀에서 肉이 되신 사랑에 따라서 인간적 신앙 행위와 복종 행위의 다양성, 불완전성, 상대성에로 들어온다. 따라서 聖化는 義認과는 달리 다양하고, 시작이 있고, 상대적이고, 불균등한 것으로 기술된다.

義認은 불경건한 자의 義認(justificatio impii)이고 聖化는 불경건한 자의 聖化(sanctif- icatio impii)이다. 우리는 둘 다 획득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에 대한 그의 권리를 선언하시며 우리를 사면하신다. 그의 용서하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고 죄로 인해 대립되었던 우리를 화해시켜 그의 빛 된 삶에 동참케 했다.

화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리스도교 복종이 희망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도래할 구원에의 희망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죄인들의 신앙과 복종이다.

B. 새로운 역동성: 미래에 대한 개방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의 새로운 세계에 동참할 수 없다. 그의 새로운 세계에 동참하는 것은 그의 역동성 속에 우리 자신이 몰입됨으로서 가능해진다. 거기서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이 시작된다. 충만한 사귐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회적 자기 경험'과 '인격적 사귐의 경험이 하나님 경험의 장소이다. 육체로부터 구별되며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분리하는 각자의 영혼은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신체화(Verlriblichen)시켜야 하며 사회화(sozialisieren)시켜야 한다. 사귐의 신비 없는 영혼의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활동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내적 경험은, 유한한 영혼을 하나님의 무한성 속에서 폐기하지 않고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본질적 영원을 지향할 수 없다.

죽음에 이르는 현대적 병을 앓는 이 세계 속에서 참된 영성은 삶에 대한 사랑의 회복, 생동력의 회복이다. '삶에 대한 단호한 긍정'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단호한 사랑은, 쓸데없이 "삶의 원천"(fons vitae)이라고 불리지는 않는 하나님의 영의 첫 경험들이다.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파괴의 냉소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파괴에 대한 내적인 습관(Gew hnung)을 우리 자신 안에서 극복해야 한다. 고약한 것은 대량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이에 대해 우리가 천천히 습관화되어 가며 희생물들의 고난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다시 회복된다.

새로운 세계는 인간이 참으로 신앙 속에, 또한 참된 사귐 속에서 살기 시작하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무엇보다도 공동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은사를 말하고 있다.

성령을 통한 인간의 새로운 창조는 인간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와 함께 고통 당하며 그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데" 에 있다.

인간이 자기를 이 세계와 유대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며, 자기가 이 세계와 다르게 종교적일 수 있거나 기도할 수 있다고 전혀 주장하지 못하게 되는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가 성령을 우리와 모든 세계에 행하실 것에 대한 보증으로 이해하게 될 때 성령을 바르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되어서 그는 궁극적이고 참된 생명을 창조할 것이며 우리를 "영적인 몸" 으로, "하늘의 인간" 으로 만들 것이다.

성령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결정하며, 신앙하는 자로서 인간이 경험하고 행하며, 듣고 말하며, 고통과 기쁨으로 느끼는 모든 것 안에 있다. 따라서 "성령" 이란 인간이 신앙하기 시작하였을 때 하나님 자신이 그에게 선사하신 것임이 분명하다. 즉 예수께서 이 사람의 생명 속에 들어 왔을 때 시작된 생명이 곧 성령이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피조물들을 충만케 하고, 본향으로 초대할 수 있는 시간이 올 때까지 언제나 그들 가운데 함께 있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사건이다. 연약함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달린 바로 이 예수가 인간을 해방한다는 여기에 성령의 기적이 있다.

새로운 세계는 이미 창조되었으며, 예수와 함께 이 세계 속으로 들어 왔다. 그리고 인간이 예수와 함께 살기 시작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성령을 통해 실현된다. "지상의 생명과 궁극적인 부활의 생명의 연속성은 우리로부터 만드신 것을 살아 있게 유지하시고 완성시키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은 말씀이 과거의 단순한 반복이 되지 않게 한다. 그는 오늘날 인간의 고통을 보게 하며 그리하여 과거의 말씀이 오늘날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묻게 한다. 또한 성령은 종말의 완성을 가져다주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는 이 세상의 제한된 시간 내에 있어서 하나님의 현재를 말한다.


Ⅵ. 닫는 말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 1-2)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義롭다 인정하시고[義認], 그의 절대적인 손으로 우리의 삶을 돌보아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聖化] 하셨다.

우리는 성령을 알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한 철저한 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인간의 언어로 쉽게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역사 하셨지만, 우리들은 단지 성서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힘차게 용솟음치는 생명력이 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우리와 이 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온전히 하나님으로서 경배 받게 될 때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계에 들어 왔으며, 성령을 통해 실현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본래 원하는 것을 아신다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하나님에 대한 자기 개방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로부터 미래에 대한 준비성이 형성된다.

성령은 결코 우리 현실과 멀리 떨어진 분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현재하심이 성령이다. 즉,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실을 사람들에게 현재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본질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현재화된 성령과 만날 수 있다. 성령과의 이 참된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백성과 그의 세계에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참 고 도 서>

1) 조오지 헨드리 저, 기독교 신학과 성령 황승룡 역(기독교문사,1991)
2) J. 몰트만 저, 생명의 영 김균진 역(대한기독교서회,1994)
3) 칼 바르트 저, 의인과 성화 전경연 역(복음주의 신학총서,1990)
4) 헨드리쿠스 벨콥 저, 성령론 황승룡 역(성광문화사,1993)
5) E. 슈바이처 저, 성령 김균진 역(대한기독교서회,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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