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구약 성령론

好學 2011. 12. 24. 21:48

구약 성령론


-서론

제 1장. 성령론의 해석사에 대한 반성

1973년 제임스 패커는 "성령론은 기독교 교리의 신데렐라"라고 말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그가 자신의 대속적 죽음으로 사람을 구속하였음을 안다. 비록,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여도....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완전히 안개 가운데 있다"(J. I. Packer, Knowing God 1973:60). "신데렐라"로서 성령은 참된 공주이나, 현실에 있어서는 "유리 구두"만 남겨두고 사라진 존재이다. 즉 신데렐라로서 성령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정체불명의 존재로 남아 있다.

같은 해 (1973)에 독일의 신학자 딜슈나이더(O. A. Dilschneider)도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심각한 성령 망각증"에 걸려 있다고 말하면서, 현대 기독교 신학은 기독론에 몰두해 있다고 비판하였다 (성종현 1997:95). 슈츠 (C. Schuetz)는 그의 책 <성령론 서론>에서 서구신학계는 성령론을 "의붓자식"처럼 취급해 왔다고 말함으로써 또 다른 영상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었다 (1985:1).

1. 역사비평학의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

왜 성령은 서구의 신학자들이 볼 때 많은 사람들에게 "신데렐라"나 "의붓자식"으로 여겨지고 있을까? 그 부분적인 이유는 역사비평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몽주의 이후로 서구교회는 역사비평학의 큰 파라다임에 빠지게 된다. 성서해석사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비평학의 기여가 많지만, 성령론에 있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먼저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난 오십년 사이에 출판된 대표적인 구약신학 책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성령"이 하나의 독자적인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나온 구약신학책들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달라진 현상이다. 예로서, 욀러(G. F. Oehler, 1883), 데이빗슨(A. B. Davidson, 1926), 스네이스(N. H. Snaith, 1944)가 쓴 구약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아이크롯트(Eichrodt, 1967:46-68)는 그의 구약신학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능력"(the cosmic powers of God)으로 성령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구약신학을 다루는 학자들은 대부분 구약의 "성령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 들어 구약신학은 더 이상 신론-인간론-구원론의 틀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이스라엘의 종교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추적하는 것으로 흐르기 때문에 성령론이 도외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 비평학자들의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기 보다, 비인격적인 "힘"이나 "돌발적인 카리스마적 능력"으로 보는 그들의 신학적 전제에 기인하고 있다. 이들의 사상적 밑바닥 속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가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삼위 일체 개념은 후대 교회의 산물로서 구약 자체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이들은 갖고 있으므로, 아이크롯트조차도 성령을 "힘과 능력" 정도의 차원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뿐이다. 레온하르트 고펠트는 "고전 12:4-6과 고후 13:13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적 표현에 대해서도, 바울 자신은 아직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 (성종현 102).

발터 침멀리(Zimmerli)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야웨로 부터 나오는 역동적인 힘의 현상"이다 (1978:101; cited from Batteau:190). 람프(Lampe) 역시 성령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the mysterious power of God)으로 보며,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의 양상"(the mode of God`s activity)이라고 말한다(1962:626). 볼프(H. W. Wolff, 1977:66)는 영(ruah)이 "일차적으로 인식(heart, leb)이나, 욕망(desire, nepesh)이 아니라, 행동하려는 강력한 힘과 의지(a vital power and will toward action)"라고 본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의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과연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인지 아니면 인격적 존재인지를 결정하는데 있다.

같은 입장이 신약학계에도 나타나고 있다. 루돌프 불트만은 <신약 성서신학>에서, 두가지 성령이해를 발견한다. (1) 아니미즘적인 성령이해로서, 성령을 인격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이해하는 것, (2) 역동적인 성령이해로서 성령을 비인격적인 힘이나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레온하르트 고펠트역시, 성령을 "하나님 말씀의 힘"으로 정의한다. 그는 바울이 지혜, 율법, 죄 그리고 죽음을 의인화 한 것처럼,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도 의인화 시켰다고 본다.

서구신학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힘과 능력으로 본 결과 신학과 영성은 매마르고, 목회와 사회참여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는 빈약해져 갔으며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역동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2. 오순절 운동의 "열광주적" 성령론

역사비평학의 성령에 대한 "무관심"은 또 다른 하나의 극단을 배출하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이것은 오순절 신학의 "열광적 성령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순절 신학의 뿌리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와 몬타니즘에 나타나며, 이런 급진적 성령이해는 한국 교회에도 나타난다.

1)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와 몬타니즘의 성령이해

교회사적으로 볼 때, 열광주의적 성령론은 초대교회 때에 먼저 폭발하였다. 이 당시에는 "영지주의"와 "몬타니즘"의 형태로 열광적인 급진적 성령운동이 나타났다. 노스틱 (영지주의적) 성령이해는 "종교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이교적 영성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몬타니즘은 "계시적 체험주의 성령론"을 중심 색갈로 만들었다 (배본철 448).

롤란드 베인튼에 따르면( <기독교의 역사> 이길상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72-74), "영지주의는 일종의 사색종교로서, 물질 세계를 경시하고 육체로부터 해방됨으로써 구원을 모색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궁극적인 것은 부정적인 점들로만, 즉 알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잴 수 없는 것,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는 존재의 거대한 심연이다. 이 심연은 역동적이고, 그 충만 (플레로마) 속에서 발출 (emanation)에 의해 상이한 것들이 발생한다. 그 발출된 것 중 하나가 지혜 (Wisdom)이다. 지혜는 플레로마의 비밀을 알려는 과도한 호기심에 잔뜩 사로잡혀 있다가 고통 속에서 물질을 발산했는 데, 이 물질이 데미우르고스의 도움으로 이 가시적인 세계로 조성되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물질 세계는 타락의 산물이며, 따라서 악하다. 인간은 물질 안에 갇혀서 거기서부터 해방되려고 애쓰는 영혼으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이 점에서 지혜의 역할이 뒤바뀌었다. 지혜는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참회하고서 인간에게 조명 곧 영지(Gnosis)를 줌으로써 그를 해방시키는 구속의 원칙이 되었다. 물질이 구원에 장애일 뿐 아니라, 시간도 구원의 장애이다."

이런 영지주의가 기독교와 결합했을 때,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았지만, 그의 기능은 인간을 육체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육체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단지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였으며그의 육체는 환영이었다. 말시온은 창조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영지주의자였다. 그는 세계가 악하며, 파리와 벼룩과 열병으로 가득찼다고 보았다. 이것을 지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 악한 데미우르고스였다고 한다.

심창섭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헬라주의적 이단으로, 신비적 초자연 지식을 믿으며, 플라톤 사상에 뿌리를 두고, 동양신비주의 영향을 받는다. 즉 당시의 점성술, 마술, 철학등을 혼합하여 철학종교로 구성한다. 그들의 교리를 보면, 할례, 안식일, 금식을 준수하고, 구약에서 유대교적 요소를 거절하며, 자신들은 높은 영적 지혜의 소유자로 인식한다. 자신들은 영적이고, 다른 이들은 육적으로 여긴다. 물질은 악하며, 매우 유치한 단계에서 매우 고상한 단계로 나아간다. 예수의 육체적 고난과 부활의 실재를 부인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환상이다. 창조는 신의 유출과정이다. 구원은 물질계를 해탈하고, 지식으로 가능하다. 감각주의나 혹은 금욕주의를 만들고, 알레고리 해석을 한다. 궁극적으로 이원론이다."

몬타누스는 스스로 성령을 자처하고, 성령의 체험적 은사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원시 기독교를 부흥하고자 하였다. 신앙보다 지식을 강조하는 것을 반대하며 (영지주의 반대), 엄격한 규율을 실천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 (금식, 고행장려, 재혼 금지 등)를 실시한다. 교회의 계급제도를 반대하고, 천년왕국이 임박성을 주장하며 재림에 열망하였다. 이들은 예언과 방언을 강조하며 사도적 계시의 지속성을 주장하였다. 현세 교회에서 이탈하여, 영적 선민주의를 만들고, 성령과 직접 교통한다는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가졌다. 독신생활 (재혼 금지)을 찬양하며, 극단적 말세 사상을 강조하였다. 순교를 추구하고 강조한다.

2) 한국교회의 급진적 성령운동

위의 두가지 형태의 극단적, 혹은 이단적 성령 이해는 한국교회사에도 여러번 반복해서 나타났다. 한국교회 성령운동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이것은 유형적으로, 또 시대별로, 혹은 둘을 합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100년의 전통을 가진 교회가 되었고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온건한 형태도 있고, 극단적이며, 이단적인 형태도 띠었다. 배본철은 아래와 같이 한국의 성령 운동을 제 3기로 나누고 있다.

(1) 제 1기(1903-1959)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들의 기도회가 열렸으며,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남으로부터 1950년까지로 본다.

한국 교회는 1907년 부흥운동의 모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풍부한 교회였다. 일제치하에서는 고난받는 순교자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이 성령충만한 성도의 모습이었다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황국주, 유명화, 백남주, 이용도 등을 통해 극단적인 성령 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이용도는 훨씬 기독교적인 신비주의 양상의 성령론을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신부 신비주의로 불려진다. 그는 현실적 고난을 신비적 체험의 신앙으로 내면화 시킨다. 결국 그의 신비주의는 강신극 같은 소동으로 이어진다.

1930년대에는 원산에서 유명화가 자신은 예수가 친히 재림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 하는 이단으로 변한다. 이 시기에 교계에서는 성령론은 이교적인 영성과 구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때는 신학이 부재한 상태였으며, 급진적 양상에 대한 분별력이 약한 시대였고, 신비주의와 이단이라 극성을 떨게 되었다. 타종교, 특히 샤마니즘, 불교, 도교, 신선술의 영능력 행사와 분별이 거의 없이 사용되어, "혼합주의적인 신령운동"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는 "기독교의 성령론을 타종교 영성으로부터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된 시기였으며 "기도와 회개, 기사와 이적, 사랑의 신비주의, 급진적 종말론과 혼합주의 (거짓 계시와 종교혼합주의 영향)"가 중심적인 특징을 띠었으며, "교회는 교리와 교단성을 강화하여 (이런 현상에) 대처하였다" (배본철).

이와 동시에 지나친 성령운동에 대한 경계 현상이 만들어졌으며, 말씀과 교리를 강조 운동이 해방 전후 교계를 휩쓴다. 이리하여 교리 논쟁이 격렬해졌다. 1923년 김익두 목사의 이적에 근거하여 장로회 헌법에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고 명시된 내용을 수정할 것을 헌의하였고, 총회는 "황해노회의 헌법 수정안을 채용하여 각 노회에 수의하도록 하였는데, 1924년 총회에서 이 헌의를 부결하였다 (이한수, 신학지남 1992:151).

그러나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급진적 성령 운동과 대조적으로, 1907년 장대현교회 사경회를 기점으로, 사경회 중심의 성령운동이 자리를 잡은 것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다. 1932년까지는 사경회를 통해 평신도들이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특히 1909-10년 사이에 이루어진 100만 구령운동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더욱 풍부하게 나타났다. 일제 시대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탈역사적, 탈정치적 성령운동과 길선주 중심의 말세운동이 나타났으며, 이 시기는 사회갱신보다는 내적인 신앙체험이 강조되었다.

김익두와 이용도 등에 의해 이루어진 신유와 이적 문제에 대해 총회가 논의한다 (이한수 <신학지남> 1992: 가을을 보라). 이 때 이성봉 목사는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토대로 세운다.

(2) 제 2기 (1960-1970년대): 오순절 성령운동

한국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순복음교회가 태어나고, 오순절 계열의 성령 운동이 은사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오순절파는 "삼박자 축복"과 "Second Blessing" (두번째 축복)을 강조하였다. 이 교리에 따르면, 칭의로 용서받은 성도에게는 여전히 "내적인 죄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것은 아담의 원죄의 결과이며, 두번째 은혜로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이들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인격적인 주 되심에 대한 역할의 간과로서, "성령의 능력에 의한 성결"의 은혜를 적용치 못하였다. 이리하여 "새 계시"가 자기에게 주어진다는 "신몬타누스" 유형의 신자를 만들 위험이 있다 (배 본철).

이 때 무미건조한 신학 논쟁과 교리 싸움을 피하고, 단순하고 직접적인 영성, 직접적인 영교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며, 기도를 통한 교회성장, 성령체험의 중요성, 은사운동을 통한 큰 교회성장이 강조되었다. "성령의 나타남" (고전 12장), 즉 "성령의 은사받는 운동"이 강조된다. "방언 못받으면 성령받지 못했다"는 극단까지 빠지기도 한다. 기도원이 우후죽순으로 세워지고 부흥강사들이 등장한다.

순복음 교회의 등장으로 성령론은 훨씬 생동감을 갖게 되었으나, 주로 은사와 교회성장 쪽에 치우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성령론에 대해서는 교리를 다듬는 것 보다는 경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카리스마 신학" 혹은 "열정신학" 혹은 "신비주의"로 부른다. "오순절주의는 교리 비판으로 무너질 수 없다. 이는 오순절 증거가 경험과 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의 위기가 있다. 우리 경험으로 교리를 형성하는 경험주의(experimentalism)에 빠진다. 결국 순복음 교회는 "기본적인 개인 위주의 신앙으로 폭을 좁혔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신자에게 있어서의 가난과 시련 그리고 질병의 의미를 극히 개개인의 이기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배본철, 439).

(3) 제 3기 (1980년대 이후)

이 때는 "경배와 찬양" 통한 예배 갱신 운동, 존 윔버의 능력전도, 빈야드 운동 등 경건 운동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성령의 주되심"과 "인격적인 인도하심에 따른 능력과 이적을 동반한 복음전도에 중심을 둔다"(배본철). 이것을 사람들은 "제 3의 바람"이라고 한다 (이 재범의 "새 물결의 파고 `빈야드 운동`, 어떤 것인가?" (<목회와 신학> 1995년 6월호를 보라).

빈야드 운동은 "존 윔버 목사를 중심으로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쉽에 소속된 교회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을 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운동"으로 정의한다. 존 윔버는 1995년 (61세)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있는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십" 교회의 창립자이며 국제 사역의 회장이다. 그는 치유 사역과 은사 운동으로 급격한 교인수의 증가를 경험했고, 풀러에서 와거느를 만나 교회성장을 위한 강의를 부탁받고, "표적과 기사와 교회성장"이란 강의를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의 에어포트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었으며,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소위 거룩한 웃음, 진동, 동물적인 괴성, 넘어짐 등의 체험과 치유사역을 강조하고, 히 13:8과 요 14:12에 근거하여 성령 역사의 현재성과 구원의 표징으로 표적과 기사를 주장하며, 이를 통한 지상 왕국 건설(마 16:19)을 꿈꾸고 있다.

빈야드 운동의 중심 표어는 "능력 전도"이다. 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전도 혹은 선교 현장에서 능력대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윔버는 "내적인 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나, "분별의 은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내적 빛"을 체험할 수 있으며, 영감과 꿈과 환상과 성경 구절로 이것을 찾는다고 한다. 이들은 6가지의 영적인 체험을 제시한다.

(1) "몸의 진동과 떨림"이 나타난다. 이 떨림에도 평온한 진동은 "영적인 갱신이나 목회 사역을 위해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일과 연관이 있으며, 격렬한 떨림은 "성령께서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 혹은 어떤 심각한 상황에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나 마음의 상처와 연관된다."

(2) 꼬꾸라짐의 현상은 성직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며, 규칙적으로 머리를 땅에 찧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 체험으로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차게 된다.

(3) 술취한 듯한 행동은 "하나님의 은총을 새로이 깨닫거나 놀라운 용서를 체험한 후"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고 말조차 더듬거리게 된다.

(4) 몸부림과 경련 현상은 "뛰어 오르내리거나 손발을 움츠리면서 개발처럼 만들거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몸이 경직되는 형태 등"이 있다. 주로 성적인 범죄로 인하여 내적인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이다.

(5)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은, 몇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 동안 낄낄거리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인데, 정서적 치유가 필요하다.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 (흐느낌), 또는 그 분의 은총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 (웃음)일 수 있다.

(6) 장시간에 걸쳐 열렬하게 찬송하는 행위가 있다. 윔버는 이 경우 "방언의 은사를 받는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새로 부여받았다는 징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고 말한다.


3. 개혁주의 성령론

철저한 합리성에 근거하여 비인격적인 성령론을 만들고 결과적으로 성령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 역사비평주의와, 영지주의및 몬타니즘을 이어받은 오순절 운동의 열광적이고 급진적인 오순절주의에 비해 개혁주의 성령론은 대단히 "어정쩡한" 성령론 이해에 머물러 있었다는 느낌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토대 위에 "말씀" 중심의 성령론이라는 단단한 신학적 기반을 쌓았으나, 성령이해에 있어서 역동성을 잃었다.

우리 신학의 울타리와 기초를 세운 루터와 칼빈의 성령론을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성종현에 따르면(97쪽), "루터는 성령의 사역을 주로 하나님의 말씀과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는 성령과 대화하는 자이다.` 성령은 반드시 말씀과 설교, 그리고 성례전을 통해서만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 없이는 어떤 사람에게도 성령주시길 원치 않으신다."

칼빈 역시 성령 사역을 하나님 말씀 (성경)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은 어떤 외적 권위 (교회)에 근거하지 않고, 성령의 내적 증거에 기초하며, 성경의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께서 성경을 읽는 자의 마음과 이성을 비추신다. 이리하여 죽었던 문자가 살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된다. 루터가 말씀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면, 칼빈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성령의 역할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주로 구원론과 밀접하게 결부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분이시다."

루터와 칼빈 이후에는 개혁신학을 체계적으로, 교리적으로 정리하는 일들이 이루어진다. 우리 나라의 신학사에서는 박형룡과 김재준이 <성령론>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제 박형룡 신학도 재조명의 필요성을 느끼는 때가 되었다. 또한 박윤선은 성령론에 대해 독자적인 글을 쓰지 않았지만, 주석에서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에 썼다.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순복음 교회의 "삼박자 구원"의 출현으로 한국교회에서 성령(폭발)에 대한 강조가 본격화된 60-70년대 이후로부터, 성령에 대한 논쟁은 주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지속성의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70년대는 한국교회에 성경신학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보수교단의 성령론 논쟁은 주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개핀과 차영배의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진다. 개핀의 기여는 성령을 구속사의 큰 틀 속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중요성을 잘 부각시켰다. 그러나 너무 도식화 시켰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 논쟁에 차영배가 등장한다. 차영베의 개인적 성령 체험은 이론적 체계를 거의 완벽하게 갖춘 개핀의 틀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이 큰 논쟁의 틀 안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문제와 정경의 완성 및 그 이후의 예언과 방언 은사의 지속성 문제가 다루어져 왔다.


4. 새로운 시작과 종합을 향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동안의 성령론 논쟁이 주로 신약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구약신학자들이 거의 완전히 소외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성령을 보는 시각은 창조가 거의 배제된 구속사적 시각에 한정되어 왔기 때문에, 성령론에 대한 논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파라다임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신학에서 성령론이 방치되어 있는 현상은 신약신학에 있어서 성령론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대조적이다. 성령론이 없는 신약신학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성령론이 담긴 구약신학은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는 현상에 처해있다. 구약에 있어서 성령론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미약하다. 소수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성령론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Payne, 1962:172-76; Wood, 1978). 특히 클라인(M. Kline, 1980)의 작품 Images of the Spirit 은 구약의 성령론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구약성경 속에 이미 삼위일체 개념의 싹이 있다고 보며, 구약성경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본문 속에서 성령의 인격과 그 사역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이 논문에서 나의 중심 관심은 구약의 성령론을 숲을 보듯이 총체적으로 보는데 있다. 구약의 성령론이 오랫동안 방치된 주제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개체적 본문이나 용어 연구에 그치지 않고, 먼저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속사의 틀 속에서, 주제 중심으로 성령론을 살피며, 궁극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뿐 아니라, 불연속성도 함께 보고자 한다. 그러나 본문으로 들어가지 전에 구약의 성령론과 연관하여 세가지 전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1) 성령의 인격성

구약에서 성령은 간헐적이고 외적인 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체험으로 성령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구속사의 흐름에 따라 성령은 능력과 힘으로 보다 인격으로 더욱 나타나게 된다. 성령은 인격이며, 하나님 백성의 인격적 삶의 기초가 된다. 그들의 전인격적 변화 속에 나타나고 있다. 예레미야는 새언약으로 이것을 본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새 마음, 새 영, 새 언약은 인격적 영으로서의 성령의 사역의 결과이다. 성령의 인격성은 친밀성을 가져온다.

(2) 성령의 윤리성

성령의 인격성은 윤리성을 가져온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내재성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더욱 명확하게 되었다" (아이크로트, <구약신학> 2:53). 성령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주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 동일시 되었으며,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힘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이어네스 1972:53). 시내산 언약의 윤리성 (학2:5)은 성령으로 더욱 새로워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으로 능력으로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사 28:5-6). 성령은 미래의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환상과 연관된다. 성령은 메시야 왕 (사11:2)과 주의 종 (사 42:1; 61:1)에게 주어진다.

(3) 성령의 역사성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성령은 구원 역사의 발전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구속역사의 큰 틀과 흐름 속에서 성령이해가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살펴야 한다. 이 때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더욱 뚜렷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개인의 중생과 성화의 차원에서 주로 성령을 다루어 왔으며, 그곳도 주로 조직신학의 틀 속에서 다루어져 왔다. 게다가 신약신학자들 역시 구약의 성령이해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바로 신약 성령론으로 뛰어 들었다. "바울은 신약시대의 성령을 구약시대의 성령과 대조하여 종말론적인 성령으로 이해하고, 그리고 이것을 그의 성령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최갑종 1992:125). 판 브루헌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우리는 그들 가운데 성령이 영원히 내주하고 있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번이고 이스라엘에 멸시를 받으신다"고 주장한다 (1988:164). 게다가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도식 하에서 구약의 성령 강림 약속은 오직 신약에서만 성취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김지찬 1996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구약신학의 견고한 발판 위에서 새로운 성령론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4) 성령의 은사와 교회성장

(5) 성령의 은혜와 실천적인 삶



<기초 참고문헌>

김지찬, "구약사의 지평에서 바라본 성령의 사역," <성경과 신학> 20 (1996).
최갑종, <바울연구 1>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성령과 율법>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Van Bruggen, J. "성령으로서의 세례," <고려신학보> 1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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