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성령론의 주요 논쟁점

好學 2011. 12. 24. 21:43

성령론의 주요 논쟁점

- 신약성서신학적 고찰 -

성종현 교수 (장로회신학대학·신약학)


프롤로그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초대교회 성령강림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의 강렬한 불길은 유대, 사마리아, 소아시아, 헬라 땅을 거쳐 유럽의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확산되었고, 교회는 눈부시게 성장되었다. 로마를 정복한 기독교는 세속 권력과 결탁함으로써 점차 부패해져 가기 시작했고, 뜨거웠던 성령의 불길은 서서히 소멸되어 가다가 중세교회의 수도원 운동에서 맥을 이어가게 된다. 그 후 성령의 불길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고, 18세기 웨슬레를 통한 감리교 성령운동, 그리고 19세기 미국의 대각성 및 성결운동을 거쳐 20세기에 여러 형태의 성령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성령과 그의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예나 지금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성령론과 관계된 주요 문제점들을 신약성서신학적인 입장에서 하나 하나 점검해 보고, 마지막으로 21세기가 요청하는 성령운동은 섬김(디아코니아)의 성령운동이어야 함을 역설하고자 한다.

1.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계속성 문제

1985년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에 참석하여 [오순절파 성령운동의 평가]라는 제하의 논문을 발표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학 교수 리차드 개핀은 오늘날 오순절파 성령운동의 장단점을 분석하며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은 긴밀한 연관관계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 같이 성령강림도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사건이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단번에 성취하신 그의 사역의 정점으로 모든 성도에게 경험될 수 있는 모

델이나 패턴이 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요컨대,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

그리스도 사역의 보충적 사건, 즉 구원을 위해 보충적으로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구원사역의 정정적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유일회성을 강조한 R.개핀의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 많은 현대 성서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견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옳지 못하다. 성령은 천지 창조시에도 역사하셨고(창 1:1-2), 구약의 예언자들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통하여서도 역사하셨으며(삼상 19:20-24;삼하 23:1-2;시 51:10-11), 예수님의 공생애(막 1:10-12 ;3:22-29)와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행 2:1-4), 그 이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셨기 때문이다(행 4:23-31;10:44-48;13:1-2;16:6-10 ;19:1-7 ;21:10-11).

초대교회 오순절 사건은 물론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에서 성령의 사역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종결점이 아니라 일대 전환점이었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사역의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성령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2. 성령의 인격성과 비 인격성 논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신약성서에서 증거되고 있는 성령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을 역동적인 하나님의 힘, 혹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의 능력( )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성령이해는 신약성서의 일부 본문이 성령을 마치 비인격적인 능력이나 물질적인 성격의 것으로 표현하는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표현들은 성령을 준다(눅 11:13), 성령을 받아라(요 20:22),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28), 내 영으로 부어주리니(행 2:17),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 성령을 마시게 한다(고전 12:13) 등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약성서는 성령의 인격성을 전제로 하는 많은 진술들을 하고 있다. 성령은 영원히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히 9:14)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행하실 수 있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다(고전 2:10-11;눅 1:35;롬 1:4;8:11). 성령은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셨고(롬

8:27),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께서 말한 것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 주시는 분이다(요 14:26). 또한 성령은 감정을 지니셨기 때문에 근심할 수 있고(엡 4:30), 탄식하여 간구할 수 있는 분이다(롬 8:26). 성령은 또한 의지를 가지신 분이다. 그 분은 자신의 의지로 사도들의 선교계획에 간여하신다(행 16:6-7). 성령은 예수를 믿는 각 사람에게 은사를 골고루 나누어 주시되 자신의 뜻대로 그 일을 하신다(고전 12:10-11).

신약성서가 말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실 뿐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적인 의지의 일치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이고 또한 지(知)·정(情)·의(意)를 지니신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이시다. 따라서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은 ① 가르치시고(눅 12:12;요 14:26), ② 인도하시고(요 16:13;롬 8:14), ③ 말씀하시고(행 10:19;딤전 4:1), ④ 명령하시고(행 11:2), ⑤ 어떤 일을 금지하시고(행 16:6), ⑥ 듣는 것을 말하며 알리시고(요 16:13), ⑦ 예수를 증거하시고(요 15:26), ⑧ 생각나게 하시고(요 14:26), ⑨ 위로하시고(행 9:31), ⑩ 근심하시고(엡 4:30), ⑪ 책망하시고(요 16:8), ⑫ 도우시고(롬 8:26), ⑬ 탄식하시고(롬 8:26), ⑭ 간구하시고(롬 8:26), ⑮ 또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임명하기도 하신다(행 13:2).

신약성서에서의 성령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롬 8:9-11) 혹은 하나님과 함께(고전 3:16) 언급되기도 하고, 또 세분이 삼위일체론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마 28:19;고후 13:13; 벧전 1:2;고전 12:4-6;마 3:16-17;계 1:4-5). 그 중에서도 성령을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하시는 독립적이고 대등한 위치의 인격적인 구원사역의 주체로 밝히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 마태복음 29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3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1장 2절이다.

마태복음의 선교명령에서 부활예수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 )와 '아들'( )과 '성령'( )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을 명하신다. 여기에서 세분은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구원 사역의 주체로서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록 연대면에서 훨씬 앞선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바울의 본문도 마태복음의 본문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하나님'의 사랑과( )

'성령'의 교통하심이( )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성령의 교통(코이노니아)하심'에서의 속격은 주격적 속격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여기에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과 나란히 독립된 인격적 실체로서 그리고 교제와 나눔의 주체로서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구원사역의 주관자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므로 구원을 성취하신 분으로 그리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성령(spiritus sanctificationis)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진술들은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도와 신앙공동체 안에서 현존하시는 부활예수의 역동적인 힘이라는 진술의 울타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성령이 지·정·의를 소유하신 인격적인 분이면서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 구원의 의지와 사역에서 일치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영이심을 말해주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신약성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과 새창조의 능력, 혹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과 교회와 세상속에서 역사하시는 현존의 역동적인 힘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을 분명히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영,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3. 성령의 은사와 관리문제

신약성서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주로 '카리스마'( , 단수 중성명사)-카리스마타( ,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본래의 의미는 선물, 은혜의 선물, 성령의 선물 등이다. 신약성서에 총 17회 등장하는 이용어는 복음서나 사도행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바울서신(로마서 6회, 고린도전서 7회, 고린도후서 1회 등 총 14회)과 목회서신(디모데전서 1회, 디모데후서 1회), 그리고 베드로전서(1회)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카리스마'-'카리스마타'의 낱말만 가지고 성령의 은사를 다 표현하고 있지는 않는다. 때로는 '프뉴마티카'( , 성령의 선물, 성령의 은사;고전 12:1;14:1)란 중성복수 명사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여성명사 '카리스'( , 은혜, 은사;벧전 4:10;롬 12:6;고전 1:4;엡 4:7)나 중성명사 '프뉴마'( , 영, 성령 ; 롬 8:23 ; 고후 1:22 ; 고후5:5)도 간혹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사의 의미로 나타난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과 그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구체적인 계시요, 그 나타나심이다(고전 12:7). 은사는 선물이요(고전 12:11), 그 선물주심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벧전 4:11).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 )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각양 은혜( )를 맡은 청지기 됨을 의미한다(벧전 4:10).

따라서 은사받은 자의 사명은 봉사하는 것이고(벧전 4:10),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고전 14:12;고전 14:12). 이것은 모든 은사를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과 직결시키고 있는 본문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롬11:29;고전 7:17).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지만 여기에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과의 의지의 일치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는 은사의 공급자가 하나님으로도(롬 6:23;11:29;고전 7:7;딤후 1:6)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도 나타난다(고전 7:17).

성령의 은사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예수를 믿고 세례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은사요, 둘째는 개개 성도들에게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눠주시는 개별적인 은사이다. 세례와 말씀선포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은 은혜요, 칭의요, 영생이다(롬 6:23;롬 5:15;롬 1:11;15:27;고전 1:4).

신약성서에서는 또한 예수를 主로 고백하고 믿는 성도들에게 세례를 통해서 주어지는성령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보고 있다. 이 선물은 은혜입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보고 있다. 이 선물은 은혜입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처음 익은 열매요(롬 8:23), 부활과 영생의 보증으로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주신 것이다(고후 1:22;5:5).

그러나 은사는 현재 눈에 띠게 역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도들의 몸 안에서 부활과 생명의 원동력으로 역사하게 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은사의 대부분은 성령이 믿는 성도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의 은사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은사와 은사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신약성서에는 대체로 다음 27가지의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다.

① 예언의 은사(고전 14:1;고전 14:32;롬 12:6;고전 12:28-29)

② 가르치는 은사(고전 12:28-29;14:26;롬 12:7;엡 4:11;행 18:24-28)

③ 지혜의 은사(고전 12:8;2:4-12;행 6:3,10;약 1:5-6;벧후 3:15)

④ 지식의 은사(행 5:1-4;고전 12:8;2:14;13:8)

⑤ 믿음의 은사(고전 12:9;행 11:24;27:25;고전 13:2)

⑥ 사랑의 은사(고전 12:31;13:1-3)

⑦ 찬양의 은사(고전 14:26;엡 5:19;골 3:15)

⑧ 방언찬양의 은사(고전 14:15)

⑨ 영 분별의 은사(고전 12:10;행 16:16-18;요일 4:1-6)

⑩ 구제(나눔)의 은사(롬 12:8;고전 13:3;고후 8:2)

⑪ 능력행함의 은사(고전 12:10,29;행 9:36-42;19:11-20;롬 15:18-19)

⑫ 신유의 은사(고전 12:9,28,30;행 3:1-10;5:12-16;9:32-35;14:8-10)

⑬ 방언의 은사(고전 14:14-15 ; 12:10,28,30 ; 13:8 ; 14:18 ; 행2:2-4, 19:6 ; 10:44-46)

⑭ 방언통역의 은사(고전 12:10,30;14:26-28)

⑮ 계시의 은사(고전 14:6,26;고전 14:30;고후 12:1-4,7)

귀신추방의 은사(막 1:23-27,34,39;마 10:8;행 8:6-7;행 16:16-18)

환상을 보는 은사(행 10:9-19;행 16:9-10;행 18:9;고후 12:1)

꿈(해석)의 은사(행 2:17;구약참고 창 37:1-11;단 1:17;욜 2:28)

섬기는 은사(롬 12:7)

목자직의 은사(엡 4:11;행 20:28;요 21:16;벧전 5:2;딤전 3:1-7)

권면의 은사(롬 12:8;12:1;15:30;딤전 4:12-13)

긍휼의 은사(롬 12:8;마 5:7;눅 10:25-37;막 9:41;행 16:33-34 참조)

돕는 은사(행 9:36;롬 16-1-2)

전도의 은사(엡 4:7-11;행 21:8;딤후4:5;행 5:5-6;14:21)

지도력의 은사(고전 12:28;딤전 5:17)

사도직의 은사(고전 12:28;엡 4:11;고후 12:12)

독신생활의 은사(고전 7:7-8;고전 7:32)

혹자는 여기에 추가하여 선교의 은사, 손님 대접하는 은사, 행정력의 은사, 중보기도의 은사, 순교의 은사, 자원하여 궁핍하게 사는 은사 등을 추가 시키기도 하고 또 혹자는 여기에서 언급된 은사들 중 사랑의 은사, 찬양의 은사, 방언찬양의 은사, 환상을 보는 은사, 꿈해석의 은사, 귀신 추방의 은사, 계시의 은사 등을 은사속에 포함시키지 않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가급적 성서 본문에 충실하게 종합적인 고찰을 해보고자 시도했다. 사랑의 은사, 찬양의 은사, 방언찬양(영으로 하는 찬양)의 은사, 계시의 은사 등은 본문들을 통해서 충분히 뒷받침되는 성령의 은사들이고 환상을 보는 은사, 꿈해석의 은사, 귀신추방의 은사는 내용적으로는 은사에 속하나 본문의 뒷받침이 불충분하거나 덜 명료하기 때문에 논란이 될 수 있는 은사들이다.

 

이 밖에도 혹자는 영서(靈書), 영무(靈舞) 등을 은사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영서는 방언이 글의 형태로 쓰여진다는 점에서(자기가 배우지 않은 생소한 외국어나 그와 유사한 글 혹은 전혀 다른 영적인 글/영서도 영서해석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자신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으나 영서해석의 은사를 받은 자는 그 뜻을 풀이할 수 있다. 단 5:1-30 참조) 어떤 이들은 영서를 넓은 의미로 방언의 은사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영무는 성령의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하여 추던 춤이나(삼하 6:121-15)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그의 제자들이 "자기들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던 몸짓과 연관시켜(막 11:1-10;눅 19:28-40) 이해하기도 한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신약성서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확정된 틀을 제시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약성서는 어디에서도 완벽한 성령의 은사목록을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표적인 은사의 장인 로마서 12장은 예언, 섬김, 가르침, 권명, 구제, 다스림, 긍휼베품 등 7가지 은사를 언급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12장은 지혜, 지식,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통역, 사도, 교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등 13가지를, 그리고 에베소서 4장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 5가지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

모든 은사는 한 성령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벧전 4:11) 그리고 교회의 덕과 개인의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서(고전 14:1-4) 주어진 것이다. 모든 은사자들은 받은 은사를 선한 청지기의 자세로 관리하며 사용하여야 한다(벧전 4:10).

성령은 자신의 뜻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고 누구에게나 은사를 주시지만 대체로 ①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② 말씀(복음)을 들을 때에, ③ 은사를 사모하며 간구(기도)할 때에, ④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에, ⑤ 하나님께서 교회의 부흥과 개인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에 가장 적절하고 요긴한 은사를 주신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인간의 일반적인 재능은 구분된다. 은사를 주신 성령께서는 그 은사를 다시 거두어 가실 수도 있고, 또 성령의 활동은 제도화된 집단이나 조직으로부터 억눌림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권면한다(살전 5:19-21). 성령의 은사가 있는 것처럼 악령의 역사도 있다. 악령도 그의 추종자들이나 그가 사로잡은 자들을 그의 능력으로 무장시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여 신앙을 혼란케 할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일서 기자는 모든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고 분별할 것을 촉구한다(요일 4:1).

4. 성령세례와 물세례

신약성서에는 ① 세례요한의 세례(물 세례), ② 예수 제자들의 세례(요 4:1-2), ③ 불 세례(마 3:11;눅 3:16), 그리고 ④ 성령의 세례(막 1:8;행 1:5)가 언급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 세례는 회개와 정결, 불 세례는 심판과 능력, 그리고 성령세례는 메시야의 구원과 영적 무장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물 세례)와 성령세례(막 1:9-11)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요한의 세례(물 세례)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다(행 2:1-4). 예루살렘교회가 탄생되고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부터 모든 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행 2:38), 혹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28:19)으로 (물)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것은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새신자에게 주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성 문제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물 세례)를 받는 성도는 그와 동시에 성령세례도 함께 받는가, 즉(물)세례와 성령의 오심이 불가분의 관계인가 아니면 별개의 분리적 관계인가 하는 점이다.

신약성서는 여기에 대해서 몇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용서를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선포한다(행 2:38). 여기에서는 (물)세례와 성령받음이 불가분의 결합적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고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이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안수를 받음으로 비로소 성령을 받게 된다(행 8:14-17). 여기에서 (물)세례와 성령받음(성령세례)은 별개의 분리적 관계로 나타난다. 사도행전 10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기도 전에 성령세례를 먼저 받은 이방인 고넬료 집안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이것

은 성령이 (물)세례를 받기 이전에도 임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행 10:44-48). 이러한 본문들은 우리의 물음에 대한 양자택일식의 결론내림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서신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어느정도 해결되고 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선포되고 있는 베드로의 입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5. 성령세례와 성령의 내주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는 자라고 말하고(롬 6:3), 그의 모든 과거의 죄가 용서받아 그는 이제 은혜( )아래 있는 자요(롬 6:13),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은 자라고 선언한다(롬 8: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다(롬 8:9). 고린도 전서 3장 16절과 6장 19절에서바울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성도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입장은 신약성서의 전체적인 흐름을 대변해주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주된 입장은 누구나 예수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그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셔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이 성령의 내주는 반드시 성령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의 내주 현상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성령충만의 현상은 성령이 임하시는 성령세례시에 혹은 성령이 내주하신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성령충만의 현상은 여러 성령의 은사를 수반해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다(그 밖에도 행 4:23-27;10:34-48 참조). 성령충만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이미 '성령안에서의 삶'( ) 즉 성령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삶인 것이다. 진정한 크리스챤의 삶은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성령충만함을 받으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후에 역사를 바꾸는 능력의 공동체로 탄생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초대교회에서 역사하신 성령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도 동일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성령은 과거에도 역사하셨고 오늘도 역사하시며 미래에도 역사하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의 영이시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의 자유와 사랑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21세기가 요청하는 성령운동과 디아코니아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디아코니아' 곧 '사회봉사'에 있다. '디아코니아' (diakonia)란 신약성서에 나오는 헬라어 낱말로서(막 10:45;롬 15:25;고후8:4) '섬김과 봉사'를 의미한다. 상처투성이 한국사회가 원하는 교회는 '섬기는 교회', 즉 디아코니아형 교회이다. 교회의 생명력은 섬기고 봉사하는데 있다. 한국교회의 최대 위기는 교회가 섬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섬기기를 거부하고 섬김 받기를 원하는 교회는 내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교회이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겨야 할 교회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의 섬김으로 풍요로워져 가는 우리의 현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디아코니아 운동'은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를 사랑하시는 성령께서 일으키신 새로운 형태의 '성령운동'이다. 이천년의 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교회 안에서의 '디아코니아 운동'은 언제나 '성령의 운동'이었다. 예수의 '디아코니아 운동'이 그렇게 시작되었고, 또한 초대 교회의 '디아코니아 운동'이 그러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예수의 '디아코니아 운동'이 예수 시대 유대사회에 개혁과 갱신의 불길로 솟아오른 것처럼, 또한 초대 교회의 '디아코니아 운동'이 마침내 세계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가 갱신되고 거듭나서 제 2의 힘찬 도약을 하는 길은 오직 이 '디아코니아의 길' 밖에 없다. '디아코니아의 길'은 성령이 함께 가시는 길이다. 성령에 사로잡힌 예수께서는 바로 이 길을 걸어 가셨다. 누가 예수로 하여금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눅 7:34), 가난한 자와 병자들의 메시야가 되게 하셨는가?

바로 예수를 사로잡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무엇 때문에 임하시는가? 성령은 무엇 때문에 예수께 임하셨고, 또 초대교회에 임하셨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시는가? 예수께서는 나사렛 취임설교(눅 4:.16-21)에서 성령이 임하시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성령강림은 파송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신의 뜻을 위하여 파송하고 사용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무장시킨다. 예수의 파송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위한 파송이었다(눅 4:18). 즉 세상 속으로의 파송, 당시 사회의 소외 계층을 향한 파송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교회가 있고 여러 종류의 신앙공동체가 있다. 이 여러 종류의 공동체들은 크게 다시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한 부류의 공동체는 사회와 세상 일에 대해 무관심하고 탈 세상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들의 관심은 개인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울타리 밖을 뛰어 넘지 못한다. 다른 부류의 공동체는 사회와 세상 일에 깊이 관여한다. 때로는 너무 깊이 관여하는 나머지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실하기까지 한다. 소금이 소금의 맛을 상실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형 교회는 사회와 세상 일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교회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 중심적인 교회이면서도 사회봉사와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이상형 교회를 찾기는 심히 어렵다. 대체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다. 소위 말해서 보수적이고 복음적이라는 교회들은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고 반면에 사회문제와 현실 참여에 적극적인 교회들은 복음적이고 말씀 중심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가오는 21세기가 요청하는 교회는 이 양극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는 통전적인 '디아코니아형 교회'이다. 한국 사회가 요청하는 이 '디아코니아형 교회'는 첫째로, 말씀 중심적이고 복음중심적인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한 교회는 설령 선행을 산더미처럼 쌓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복음의 진리 위에 바로 섰을 때만이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디아코니아형 교회'는 사회와 세상을 향해서 항상 열려 있는 교회이다. 교회와 사회를 나누는 울타리를 제거하고 언제나 세상 속으로 파송된 교회로서의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현실 속에 안주하는 교회가 아니라, 늘 깨어있는 출애굽형 교회이다.

셋째로, '디아코니아형 교회'는 늘 성령을 향해서 열려 있어야 한다. 교회를 세우신 분도 성령이시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의 도움없이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 성령을 향해 열린 교회는 늘 기도와 찬양으로 충만한 교회이다. 성령은 찬양하는 공동체를 좋아하신다. 옛 노래로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으로 늘 새 노래를 지어 새로운 찬양으로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 성령께서 특히 좋아하시는 찬양은 '삶의 찬양'이다. '삶의 찬양'이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성도들의 영혼의 찬양이다.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의 입술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과 평화의 찬양이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충만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회 속에서는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성장한 교회들의 배후에는 항상 성령의 특별한 역사하심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성장한 교회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반드시 제 2단계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이 제 2 단계는 곧 '디아코니아의 단계', 다시 말해서 '사회봉사의 단계'이다. 이 제 2의 단계로의 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성장은 정지되고 만다. 말씀 선포는 힘을 잃어가고 교회는 영적으로 무기력해져 간다. 교회가 영적으로 무기력해져 가면 다음 단계로 교회 내에 여러 가지 갈등 상황이 야기된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점점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늪에서 헤어나오는 길은 교회가 자기 껍질을 깨고 교회를 둘러치고 있는 울타리를 허물고 지역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지역사회는 교회를 기다리고 있다. 지역사회의 산더미같이 쌓인 일들이 교회가 잠에서 깨어 걸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서 먼저 나아갈 때 지역사회는 반갑게 인사하며 교회를 향해서 나아오게 될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이렇게 만나 껴안고 포옹함으로써 없던 정도 생기고 새로운 사랑도 싹트는 것이다. 이것이 곧 21세기형 전도요, 21세기형 교회성장의 길이다.

교회는 봉사(디아코니아)에 대한 이해를 새로이 하여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 하면 '교회봉사' 만을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 밖에서의 봉사, 즉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의 봉사활동이다. 이 '사회봉사'는 교회를 내적으로 단결시키고 성도들의 신앙을 더욱 성숙케 할뿐만이 아니라 교회 요소 요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정신이 실천되어지는 디아코니아의 현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 하신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바로 교회성장의 원동력이다.인간적인 방법을 통해서 시도되는 교회성장을 위한 모든 노력들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기가 더욱 힘든 시대가 될 것이다. 말씀만 가지고 교인들을 붙잡을 수가 없다. 그들을 모으고 하나로 결속시킬 힘은 바로 '디아코니아'에 있다. 디아코니아 활동을 통해서 성도들의 믿음은 강화되고 교회와 사회는 성령의 띠로 결속되어 어깨동무를 나란히 하고 새 시대를 향해 전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도시교회들의 연간 사회 봉사비 지출이 교회 전체 예산의 5%도 되지 못하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교회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물론 그리스도로 인해서,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교회의 사랑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교회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때이다(마 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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