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사상

好學 2011. 12. 13. 21:32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사상


 

장신大:한숭흥교수


 

I. 박형룡의 생애

박형룡박사는 한국신학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몇명의

신학자들 가운데 한분으로서, 한국 보수주의적 정통신학의 보루요, 그

기초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별명도 다양하며

그를 평가하는 목소리도 극에서 극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그를 "한국의

메이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의 신학사상들을 대표하

는 [교의신학](전7권)을 비롯한 [박형룡박사저작전집](전14권)을 "사실

뼝 한국신학계의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박형룡의 신학을 승계하면서 정통보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한

국 신학계의 거성"의 사상을 정통적으로 이어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박형룡은 1897년 3월 28일(음력) 평안북도 벽동군 운시면 운하동 220

번지에서 박기수 씨의 사남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

터 남달리 신학문에 대한 향학열이 뜨거웠고, 또 웅변에 재질을 가지

고 있었다."

그에게 신앙을 심어준 이는 그의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신앙으로

부터 박형룡은 점점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

한이해와 관심만으로는 그의 실존을 신자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압록강변 고향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매우 귀한 운명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의 가슴을 울리며, 그의 실존적 결단을 실현시킨 역사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였다. 김 목사의 설교에 감화 감동된 박형룡 소년은

벽동교회에서 "예수 천당의 종" 최 권능(본명 최봉석) 목사로부터 세례

를 받았다. 세례를 받으면서 "앞으로 목사걱 되겠다"고 결심했다 한다.

1916년 3월에 평북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

고 곧이어 평양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웅변력이 뛰어난 청년 박형

룡은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 전국 순회 강연회 연사로 발탁되어 목포에

서 강연한 내용이 문제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열달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0년 숭실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였고, 보다 더 넓은 학문의 세

계를 섭렵하려는 "불붙는 신항심과 신학문에 대한 뜨거운 욕먕"을 가진

청년 박형룡은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그는 먼저 중국으렵 가서 1921년

9월 중국 남경의 금륭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3년뒤

1923년 7월에 문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금륭대학을 졸업한 문학사 박형룡은 미국에 가서 시카고 맥코믹 신학

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려 했다. 그가 어려서부터 보수주의적 신앙에 젖

어있으면서도 당시 자유주의적인 신학풍을 갖고 있던 맥코믹 신학교에

서 공부하려했던 것은 그에게 감화를 준 여러 선교사들이 맥코믹 신학

교 출신 선교사들이었으며, 그들이 한국에서 열심히 개척전도와 봉사를

하는 모습이 그에게 매우 감명깊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부열 선

교사 모친의 친구되는 분이 그를 마중나와 프린스톤 신학교로 가서 공

부하기를 끈질기게 강권하는 바람에 박형룡은 마음을 바꾸어 뉴저지주에

있는 북장로교 직영 신학교인 유서깊은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0년대 미국 신학계에는 대륙으로부터 두가지 신학사조가 밀려오고

있었다. 첫째 경향은 알브레히트 릿출(Albrecht Ritschl)의 신학이 자

유주의 신학의 유입과 그 영향아래서 교회 중심의 관념론적이고 사변적

인 신학보다 윤리주의적 신학사상에 더 큰 매력을 느끼며 확산되어가던

시대였다. 릿출운 헤겔주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사변신학이 종교와 신

학을 탈종화할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을 왜곡한다고 하여 형성이상학을 배

척하였고, 동시에 교회의 형식교리도 형이상학과 종교의 혼학이라고 하

여 배척하였다. 그의 신학의 중심 주장은 종교가 사실진술이나 형이상학

화로서 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종교는 본질적으로 지고의 가치진

술로서 그 본래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릿출은 신학

은 형이상학에 따라서 전개되기 보다는, 윤리적 법주를 따라서 전개되

어야 한다걱 주장한다. 따라서 릿출주의 신학은 그 출발점을 "그리스도

의 도덕적 완전성"에 대한 윤리적 가치평가로부터 출발하며,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며, 그것은 지고의 종교적 선과

동시에 인간의 도덕적 이상"이라고 하는 점을 확신하는 신학이다.

또 하나의 경향은 19세기 말엽부터 독일에서 발달된 성서비평학적 신

학방법이 미국 신학계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신학사조에 동조하는 많은

신학자들이 새로운 신학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이처럼 릿

출주의와 성서비평학에 반대하는 근보주의신학운도이 곧이어 일어났으

나 그 영향력은 새로운 신학의 흐름을 차단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미국의 종합대학 안에 있는 신학부의 신학성향은 오히려 이러한

신신학의 흐름에 동조하면서 과감하게 이러한 신학확산에 힘을 쏟았다.

특히 바바드대학, 예일대학, 보스톤대학,시카고대학의 신학부는 특정

교파의 신학 노선에 동조할 필요가 없다는 점 때문에 비교적 자유스럽

게 신학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 이론의 수용이나 비판에 매

우 자유로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학문으로서 신학의 방향을 선도하는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 되었다.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의 신학도 자

유주의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 경향이 북미의 신학계에 돌풍을 몰고 올 때 프린스톤 신

학교도 그 바람을 피할수는 없었다. 본래 프린스톤 신학교는 미국 장로

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서 19세기 말부터는 "칼빈주

의적 정통주의 신학의 참된 보루(a veritable bastion of calvinistic

orthodoxy)" 였으며, 이러한 신학사상에 입각해서 신학을 가르치던 신

학교였다. 프린스톤 신학의 이러한 신학 노선은 첫번째 조직신학교수

였던 알렉산도(Archibald Alexander,1772-1851)로부터 출발해서 챨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그의 아들 핫지(Archibald Alexander

Hodge, 1823-1886) 벤쟈민 위필드(Benjamin B.Warfield, 1851-1921)

로 계속되었다.

프린스톤 신학의 특징적 강조점은 "영감된 무오한 성서의 권위(the

inspired and infallible authority of the Bible)"를 강조하는데 있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자연과학과 "성서 본문의 문헌학적 문학적 비평방

법(philological and literary criticism of the text)"이라고 주장했

다. 그됐湧 각각의 자료들을 관통하는 일반 원리를 추적하고 그것이 담

고 있는 특정한 명제를 강조함으로써, 종합하여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해서 근대 자연과학의 부흥과 더불

어 발전된 과학적 연구의 '귀납적 방법'을 성서에 적용했다. 이 방법은

단편적인 자료로부터 더욱 보편적인 윈리 혹은 법칙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 결과 탄생한 신학의 전반적인 윤곽은 17세기 칼빈주의 체제와 비슷

하였는데 이들은 그 체제를 따르고 현대화 시키려고 애썼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 밑에서 공부한 미국 읗藥慣 목사들은 대체로 칼빈

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매우 보수적인 면과 성

서의 권위를 영감된 무오류성(성서무오설)에서 주장하는 근본주의를 고

수했다.

그러나 1920년대를 전후로 미국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성서적 세계관과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 사이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혼란을 겪기 시작했

으며, 젊은 교인들 층으로부터 점점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관용

적으로 확산해 갔다. 이런 추세는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표되는

혁신적인 신학사상과 그 방법론을 수용하는 것도 허용한늠募 입장으로

신학의 태도를 변화시킨 것이다.

한편 1919년 뉴욕 제일 장록회는 포드딕 목사(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를 부목사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포드딕 목사를 장로교단으

로 영입한 것은 교단 분열의 불씨를 심은 결과가 되었다. 본래 포디딕

목사는 침례교 목사였지만,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에 대한 관용과 어느

정도의 수용적인 자세도 갖춘 비교적 신신학을 선호하는 목사였다.

그에따르면 "성서는 거룩한 진리가 정적이고 유일적인 권위를 지니며

전달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발전적인 하나님 경험에 대픗 기록으로 간

주된다." 이러한 그의 신학 노선은 1922년 6월에 그가 미국 뉴욕 제일

장로교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Shall the Fundamental

ists Win)"라는 설교를 한 뒤 1920년대 초기까지의 자유주의 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어떤 노선

을 택할 것인가 망설이며 보고 있던 미국 장로교회에 하나의 커다란

교리상 파문을 던졌다. 미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 입장이 양분되었으며, 따

라서 포스딕의 신학읗 옹호하는 측과 그의 신학을 비판하는 측으로 나

뉘어진 것이다.

이러한 양분된 신학 논쟁이 전 미국 장로교회를 휩쓸고 있을 때, 포

스딕의 신학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선 신학자가 곧 근본주의자인 매

카트니(Clarence Z.Macartney)와 프린스톤 신학교의 그레샴 메에첸 (

J.Gresham, Machen,1881-1937)이다. 매카트니는 포드딕의 설교에 "불

신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글로 응전하였고,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

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1923)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포스딕의 자유주의적 신학을 비판했다.

그러나 메이첸의 책이 출판된지 얼마 안되어 1924년에는 메이첸의 주

장에 반대하고, 포스딕의 입장을 옹호하며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것이 소위 [어번 선언](the Auburn Affirmat

ion)] (1924)이다.

한편 포드딕 목사를 이단 재판에 넘기려는 움직임 (1923)과 테네시주

의 데이톤(Dayton)공립학교 과학교사인 존 스콥프스(John T.Scopes)가

진화론을 가르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사건(1925)을 계기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이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

었다.

박형룡은 미국의 신학계와 교계가 독일에서 들오온 자유주의신학 운동

과 미국의 정통보수주의를 고집하는 근본주의 신학의 대립과 과학적 세

계관에 대한 논쟁이 심화되어 있던 그런 상황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의

근본주의적이며, 매우 보수주의적인 신앙의 입장을 더욱 다져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박아론 교수는 그의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신학"에서 박형룡의 신학

계보를 소개하고 있다. 박형룡은 "챨스 핫지로부터 청교도적인 신학사

상을, 그리고 B.B 워필드로부터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입각하

는 개혁주의적신앙 및 교회 체계를 배우고 터득하여 자신의 정통신학

을 세우는데 필요한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변증학을 가

르친 위리암 그린 교수의 학문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박형룡이

프린스톤 신학교 시절에 "윌리암 그린 교수보다 더 큰 신학적인 영향

및 신앙의 감화를 받은 교수가 있다면, 바로 그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

에서 신약신학 교수로 그 이름을 떨치던 그레샴 메이첸 박사였다.

메이첸 박사는 박형룡 신학생을 무척 좋아했고 그의 인재됨을 알고 교

실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지도와편달을 아끼지 않았다"고 박

아론 교수는 서술하고 있다. 메이첸과의 개인적 관계가 학문적 영향이

박형룡을 한국의 메이첸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레샴 메이첸이라고

불리우게 될 박형룡 신학생을 바로 알아보고 이 '위대한 인재'를 키우

기에 힘을 다했으니 말이다. 아! 이 얼마나 감개부량하며 마음에 흐뭇

한 일인가!"

박아론 교수의 진술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박형룡은 1920년대 미국

신학계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나뉘어져 서로 맹렬한 공격을 하고있

던 상황에서 공부하면서 그들의 변증적 신학태도를 그대로 받아됐湧

것이다. 이미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당시 프린스톤 신학교는 알렉

산더-핫지 부자-위필드로 이어지는 매우 학문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신

학 전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20년대 세계적인 새로운 신학 경향

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절대 배척을 주장하는 소위 근본주의자들과

새로운 신학을 수용하려는 자유주의자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대립적 입장은 이미 1869년 이전에 소위 '구학파(Old School)

와 '신학파 (New School)'에서 이미 표출되었다. 1920년대에는 자유주

의 신학 수용파인 신학파가 소수 집단이었으며,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

인 스티븐슨 (J.Ross Stevenson), 챨스 에르드만 (Charles R. Erdmann)

룃쳐(Frederick W.Loetscher), 스미드 (J.Ritchie Smith)등이 소수파

교수였으며, 메이첸,알리스 (O.T.Allis), 보스 (Gerhard Vos), 그린

(William Green)등이 다수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메이첸은

보수정통주의의 총수격이었으며, 가장 강한 근본주의 옹호자여 보수주

의신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메이첸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자유

주의신학 입장과 과학적 세계관 주장)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탁

월했던 근본주의 신학자였더, 그는 스스로 단순히 "한 칼빈주의 (a

Calvinist)"로 불리워지기를 좋아했었다.

 

박형룡은 프린스톤에서 메이첸의 신학노선을 택했다. 그러한 선택은

그에게 단순히 신학적인 경향만을 영향받게 한 것이 아니고, 메이첸

의 기독교적 행동방식까지 그대로 답습할 정도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메이첸은 포스딕의 신학을 반박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자유주의]란 책

을 썼는데, 이 책은 마치 교황 피우스 10세가 현대주의(modernism)에

대하여 반박했던 교서처럼 메이첸이자유주의(liberalism)의 모든 형

식을 과격한 자연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유주의를 기독교와 분리하려는

교리를 갈망했다. 그는 프린스톤 신학교가 근본주의적 경향을 버리고

자유주의적으로 전향하자 1929년 교수 8명, 학생 52명과 함께 필라델피

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1936년 교단 명칭을 정통 장로교

회로 바꾸었다. 창립회원은 목사 34명, 장로 17명, 평신도 79명이었다.

한국의 메이첸이 되기를 원했고, 또 그의 소원대로 한국의 메이첸으로

인정받은 박형룡은 프린스톤 신학교 시절에 메이첸으로부터 네걱 면

에서 영향을 받았고 형성되었다.

1) 자유주의는 자연주의로서 기독교가 아니며,또 다른 종교이므로

자유주의를 다르는 자들이나, 포드딕을 변호하는 [어번 선언]에 동

조한 자들은 교회부터 축출해야 한다. 박형룡이 한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 교수와의 신학 논쟁에서 사용하는 극단적인 보수주

의와 배타적이고 변증적인 신학방식은 메이첸의 방식이 그에게서

구현된 것이다.

2) 그는 프린스톤의 알렉산더-핫지 부자-워필드-메이첸으로 이어지

는 근본주의적이며, 칼빈주의적인 정통주의에 빠져들어 그의 신학

을 형성했다. 메이첸이 "한 칼빈주의자"라고 불려지기를 좋아했듯

이,박형룡도 칼빈주의자로 남아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박형룡은 칼

빈의 신학을 직접 연구한 것이 아니고 프린스톤에서 그의 스승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정통적 칼빈주

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3) 그는 변증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신학 논쟁에서 매우 강한 반론

과 비판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논쟁술은 높이 평가되거 있

다. 그러나 그의 단점은 기독교의 상황적 이해보다는 신학 이해의

개방적인 입장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비판 때문에 때로는 독선

적이라는 평도 받는 것이다.

4) 그가 메에첸에게 교단분열의 방법과 신학교 설립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구실을 찾는 기술을 철저히 배웠던 것은 한국 장로교회뿐

만 아니라, 한국의 여러 개신교 교파들의 신학논쟁이 곧 교단분열

과 신학교 설립으로 이어지는 선례를 남겨준 것이다.

메이첸이 프린스턴 신학교의 경향이 그의 입장과 차이가 난다고 뛰

쳐나가 독립 교단과 신학교를 만들었던 그 용단이 박형룡으로 하여

금 대한 예수교장로회의 신학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려하자

자유주의적으로 기울고 있다고 판단하면서 뛰쳐나가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던 것은 (물론 이것은 한 이유에 불과하며, 또 다른 여러 가

지 원인들이 있다), 바로 미국의 메이첸이 미국 장로교회에서 행했

던 일을 20여년 후에 한국의 메이첸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실행

한 것이다. 이 점 역시 그의 스승에게서 배운 기술이다.

 

박형룡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3년동안 공부한 뒤 신학사(Th.B)와

신학석사(Th.M)학위를 받고 1927년 9월 켄터키주 루이빌시에 있는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장로교인

으로서 침례교 신학교에 간 것에 대하여 박아론 교수는 그 이유를

(1) 그의 스승인 그레샴 메이첸 교수의 강한 추천과 당시 남침례

교 신학교에서는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고 있던 프린스톤

신학교보다 더 많은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교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형룡이 보수정통주의적 근본주의 신학 경향과 부합하므로 박형룡

이 선택했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남침례교 신학교에서도 박형룡은 변증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1929년 1월까지 박사과정에 필요한 모든 연구를 마쳤으며, 박사학

위 논문은 귀국 후에 완료해서 보내기로 하고 귀국하였다.

1929년 봄에 평양에 도착한 박형룡은 산정현 교회에서 교육담당

전도사로 청년들을 지도하면서, 숭실전문학교에서 종교과목과 성서

과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930년 4월부터는 장로회평양신학교의

임시교수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5월 10일에 결혼했다.

1931년 4월부터 전임교수로 봉직하였으며, 산정혀교회에서 평양노회

부터 목사안수도 받았다. 당시 평양 신학교의 교장은 좌부열 선교사

였으며, 교수진은 여러 선교사들과 한인 교수로는 남궁혁 박사와 이

성휘 목사가 가르치고 있었다. 박형룡은 이곳에서 변증학, 신학난제

기독교윤리등을 가르쳤다.

1932년 봄에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어 박사학위를 받앗으며, 학위

증서는 우편으로 보내왔다. 박아론의 진술에 따르면 박형룡은 평양

신학교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입각하는 '바른 신학'

을 가르치고 성경적인 보수신앙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일에 전

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당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파송받은 전도목사로 일하던 최권능

목사의 외마디 부리짖음이 '예수천당'이었다면 그에게 일찍이 세례를

받은 박형룡 청연 박사의 일편단심은 오로지'정통보수'를 외치는데

있다. 최권능 목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예수천당'과 '불신지옥'을

외치고 부르짖었다면 그와 못지않은 신앙의 열기를 가지고서 젊은 박

형룡 박사는 '정통보수'와 '이단 배격'을 고함쳤던 것이다.

과연 그 당시에 최권능 목사의 '예수천당'의 열기를 오히려 무색케

만들 정도였던 박형룡 박사의 '정통신학'에 대한 열성과 집념은 그를

서서히 그러나 바야흐로 한국 교회에 '그레샴 메이첸'으로 만들어 가

고 있었다고 양심적인 한국 교회사의 기록자라면 아무라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없으리라!"

이처럼 박아론 교수는 그의 아버지 되는 박형룡박사의 인물상을 아

무 주저없이곧 '한국의 메이첸'이라고 단정하면서, 박형룡의신학사상

은 바로 메이첸의 본질이며, 정통신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박형룡이 조선 기독교교계를 향해 "정통보수"와 "이단배격" 의

고함을 높이 외쳤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1935년 11월 그가 평양신학교에 부임한 이래 "강의한

것들과 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에 발표하였던 것들은 다시 정리하

여 그것을 기초로 하고,게다가 몇편의 미발표 논문을 부가하여" [신

학난제선평])이란 제목이 붙은 책을 출판하였다.

 

이 저서의 출판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천태만상의 이사상은 바야흐로 정통신앙의 존속을 위협하려 한다.

조선교회는 불과 5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소년교회로서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빈약한 교회로되, 비록 그 질에 있어서는 세계의

다른 부분의 그것과 비교할 바 못되나 오히려 그 수에 있어서는 보

다 적지 않은 이사상의 가지가지가 유혹의 촉수를 움직이고 있다.

이 참상 중에서 신학사상의 바른 자와 그른 자를 획별차단명하여 교

회대중의 신앙을 바로 지도하는 것은 실로 우리 일반교회의 당면한

요청의 으뜸되는 자이다. 본서는 조선교회의 이 참상에 감하여, 또한

이 요청에 응하여 만일의 봉사가 있기를 바람에서 감히 출필의 용기

를 얻은 것이다.

박형룡의 [신학난제선평]이 출판되기 1년 전 감리교 유형기 목사의

편수로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주로 [아빙돈

바이블 콤멘타리]를 편역한 것으로서 내용 가운데 일부는 한국 필자

들이 독자적으로서 내용 가운데 일부는 한국 필자들이 독자적으로 집

필한 것도 있었다. [단권 성경 주석]의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재군 박사는 [단권성경주석]의 출현을 50주년째 되는 해에 한국교회

에 던져진 "한 폭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보수적이었던 한국교회에 [단권성경주석]은 큰 충격과 파문을

몰고왔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선교의 첫 희년을 맞으면서 정통보수신학자들과

자유주의신학자들 사이에 신학논쟁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어수선한 때

를 맞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4회 총회는 1935년 9월 6일부

터 13일가지 평양서문밖예배당에서 회집되어 황해노회장으로부터 헌의

된 [단권성경주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 선포하였다.

황해노회장의 헌의 중 신생사 발행 성경주석에 대하야는 우리

장로회의 도리에 불합한고로 우리장로회에서는 구독자안코 그

주석에 집필한 본 장로회 사역자에게는 소관된 각 교회에서

살핀 후에 그들로서 집필한 정신태도를 기관지를 통하야 표명

케함이 가한줄 아오며.

황해노회의 헌의가 올라왔을 때 박형룡 교수와 길선주 목사는 이 성경

주석을 이단적인 책이라고 규정하면서, 집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

학자들 가운데 채필근 목사와 송창근 목사 등에게도 책임을물어 벌해

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특히 박형룡은 장로교 정통신학의 입장을 고수하며 교리에 알맞는 성

경주석의 집필과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총회로부터 조선예수교장

로회 "성경주석편집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했다. 총회는 1935년 5월에

박형룡 박사에게 성경주석편집위원장직을 맡겼으며, 집필자 25명과 서

기 1명(그 다음 해에 서기가 2명으로 증원됨)을 선택하여 성경주석 10

권의 준비에 착수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5회 총회에서 박형룡은성

경주석 편집위원회보고서에서

이 성경주석 전질을 준비하는 사업은 오직 백년에 1차나 경영할

수 잇는 거대한 사업이라 저희위원들과 집필자들은 태산갓치 무

거운 짐이 억개를 눌음을 늑기고 고민중에 로력하오니.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결의와 주

석에 참석한 집필자들의 긍지와 또한 자유주의 신학물결을 막겠다는의

지의 표명이 대단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통보수측의 혼신의 노력으로 1937년 가을에 곽안련 선교사

가 집필한 욥기와 시편 두권이 출판되었따. 제26회 총회에서 박형룡은

성경주석 편집위원회 보고서에서 "주석의 내용에 있어서는 되도록 학

구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통일적이며 실용적이 되게 하려하옵고 특별

히 신앙 선도를 목적으로 하여 서중에 정통신학의 표준을 확실히 세워

우리 교계 성경해석의 유일한 표준이 되기를 희망하와 표제를 [표준성

경주석]이라고 작정하였나이다"라고 하여 정통신학의 표준을 이루려는

대단한 욕망이 깃들어 있다.

이때 이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이 시작됐으며, 채필근,송창근

김재준 목사등은 자유주의신학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빌돈 단권성경

주석과 관련해서 채필근은 바로 제 24회 총회 석상에서 사과했으며,집

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김재준은 1934년 평양노회 특별심

사위원들 앞에서 심사받고 성명서를 내겠다는 다짐을 받고 심문을 끝

마치게 되었따. 송창근목사를 비록한 일련의 집필자들은 "신학의 자유

를 억압하려는 총회의 단독에 응할 수 없음을 표명하였따." 김양선 교

수는 이것을 한국신학 수립에 있어서 보수주의 신학사상에 대한 자유

주의신학사상의 도전의 효시라고 보고있다.

김재준을 비록한 일련의 조선장로교 자유주의신학자들이 평양

신학교 기관지에 글을 실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이들에게 정통보수와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암시한 것이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어떻게 기관지에 투고의 기회마저 박탈당

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 김재준 교수는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상황의 전개과정에 관하

여 진술하기를 1935년 여름에 "감격의 생활"이라는 송창근의 글이 문

제되어 기고를 금지당했다고 한다. "그것은 일종의 교계논편이었는데

전통신학자, 신비파,경건주의자, 교권주의자 등을 모조리 통박한 것이

었다. '정통이 밥통'이라는 속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배당을 지어야겠

습니다. 목사 주택을 지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부흥회를 열어야겠습

니다.성신이어 강림하사!... 그대들은 성신이 소사인 줄 아느냐? 운운

등등의 신랄한 표현이었기 때문에 결국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특히 젊은 친지들에게 주는 말"

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송창근의 "감격의 생활"이란 글에서 김재준의

주장을 문자적으로 발견하지 못했따. 다만 송창근은 "유치원 집짓기

위하여 성신이 필요하고 학교교육하기 위하야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

하고 학교교육하지 위하야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고 예배당 건축비

지출을 (위하야) 사경이 필요하다 합니다. 그러면 이해타산을 떼놓으

면 종교란 무용물같이 녁여지는 것입니다"라는 정도로 기술하고 있다.

김재준이 인용 진술한 것처럼 과격한 표현이나 비판적 내용은아니었다

2) 김양선 교수는 "김교수의 1935년 평양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지남]

제1월호에 기고한 권두언이 문제가 되어 그의 [신학지남]에의 기고를

적극 반대하는 박형룡 박사와는 완전히 대립 상태에 있었다"고 기록하

고 있다. 그러나 [신학지남]1935년 1월호의권두언은 "자각,정돈,건설

이란 제목으로, 그 중심 내용은 "미래 50년의 조선 교회는 장자의 권

리를 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교회여서는 안되겠다. 피동적 모방에서능

동적 창조에로 자라야 하겠다...쉰한살 먹고도 삼촌덕에만 살려는 못

난 아들 둔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새해를 마줌이 어떠할가"라는

새해를 맞는 그리고 새50년의 시작의 첫 각오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글은 전혀 문제 삼을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김재준 본인도 그의

권두언이 문제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3) 박아론 교수는 김재군의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라는 글 가

운데 축자영감설을 부인하면서 정통신학을 권위의식만 가진 살아 움직

이는 사상이 아니고 "과거적인 사물과 조문들을 가르친다"고 비난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단정죄가 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어쨌든 위의 세 경우 가운데 어느 한 이유가 자유주의신학자들의 기고

권을 박탈하게 했던 것은 거의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를 막론하

고 박형룡의 강한 변증학적 비판과 기고권 박탈에 대한 입김이 강했다

고 하는 것은 당시 여러 가지 상황과 기록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박형룡의 신학함이 곧 변증이요, 논증을 통한 이단정죄의 길로 이어진

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은 곧 정통이라고 그가 확신하는 사상에 대하

편견이라 할 정도로 신념과 충성을 쏟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신학함에서 신학의 본래성을 찾으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사상(New Thought)'과의 공존이나 교류는 철저히 거부했으며,

독자적이고 독선적일 만큼 강한 고집과 보수정통의 보수에 삶의 전부

를 바쳤다.

1938년은 박형룡뿐만 아니라 조선 기독교회에도 매우 서글픈 해가 되

었다.1938년9월10일부터 16일까지 평양서문밖예배당에서 모인 제27

회 총회(총회장 홍기택 목사)는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

응률의 신사참배결의 및 성명서 발표 제안이 가결되어 공식으로 신사

참배를 하게 되었다.한국예수교장로교회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조선교

회 전체의 수치이기도 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서명한 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

의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여행하고 추히 국민 정신 총동원에 참가하

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 작성을 다하기로 기함.

위 성명함.

 

소화 13년9월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홍택기

더욱 놀라운 사실을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나서 즉시 부회장

과 노회장들이 총회를 대표하여 신사참배를 실시했으며,이때부터 모

든 연대를 소화로 표기하기로 정한 것이다. 이것이 뒤에 한국교회분

열의 씨가 되었다. 총회 이전에 이미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문제

로 폐교되었고, 평양신학교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폐교당했다.

YMCA도 해산되었으며,소위 "기독교 황도선양 연맹"이라는 친일 단체

가 출현했다. 주기철,한상동,이기선 목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목사들

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고로 순교하거나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

었다. 1938년 총회는 이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 역사에서 가장 큰 수

치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었으며, 우상숭배의 공인 총회로서, 그리고

민족을 배반한 친일 어용 총회로서, 그리고 민족을 배반한 친일 어

용 총회로서 죄를 지은 것이다.

1938년은 박형룡의 역술 [칼빈주의의 예정론]의 출판과 더불어 성서

신구약개역의 완료로 성경전서를 4호자로 87만권 발행하여 반포한 해

이기도 한다. 오욕의 일면과 동시에 복음전파의 새 장이 열린 것이다.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박형룡은 반대 입장에 있었으므로 신변의 어

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정국의 분위기가 점점 경색되어 감

을 느끼고 1938년 봄에 주기철 목사의 전송을 받으며, 가족과 함께 일

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박형룡은 1943년 여름 일본에서 다시 만주 봉천시에 도착하여 봉천신

학교에서 교수로서 그의 정통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때 박윤선 목

사는 학교 총무과정의 일을 보고 있었다. 봉천신학교에서 교수 생활2

년이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박윤선목사가 먼저 귀국

하고, 안광국 목사도 귀국하였다. 박형룡은 10명 안팎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며 머물러 있기를 결심하고 봉천신학교를 동묵신학교로 고쳤다.

그는 동북신학교의 유일한 교수요 교장으로 신학교육에 전념했다.

중국이 점점 적화되면서 만주도 국부군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즈음에

부산에서 송상석 목사가 박 박사를 모시러 왔다. 박박사를 경남노회가

경영하는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모시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947년9

월23일 박형룡 가족과 그 일행은 인천에 무사히 도착했다.

귀국후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1948년 5월 장로회신

학교가 개교되면서 박형룡 박사에게 교장으로 올것을 요청했으며,같은

해 6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

여 학자로서 그리고 학교 경영자로서 그리고 "정통보수신학의 기수"

로서 한국 장로교회 목회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박형룡 박사는 1978년 10월 25일 새벽에 운명하였다. 그가 남긴 글은

그의 삶을 읊은 시조한수이다.

80평생 회고하니 한탄한일 한이없다. 집에서는 불고했고

나라일도 한것없네 교회위해 무엇했나 허송세월 뿐이로

다 산곡에 생긴몸이 바다건너 학을닦고 신사성직 받은것

은 천은막대 하건만도 이룬것은 유야무야 신전인전 부끄러워

- 1977년 5월 15일 주일 음3월28일 -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형성(3) 10/28 20:44 153 line

II. 그의 저작들

박형룡의 저술 생활은 1928년부터 시작된다. 그해에 [신학지남]

(1928.5)에 "차대에 종교가 소멸할까?"(10/3,5-10면)를 비롯하여 "종

교박멸은 왜"(10/4,15-22면), "美와 숭엄에 신공)"(10/5.5-19면),"심

리학과 영혼의 존재"(10/5,5-10면)등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한국 보수

신학의 보루를 구축하기 시작했따.

1930년에는 "인도주의 신종교"(12/2,7-11면)라는 논문으로 변증학적

종교비판의 글을 썼다. 그리고 1940년에는 "칼빈주의와 新 칼빈주의"

(22/5,10-12면)라는 논문을 실었다. 그의 저술활동은 여러해 동안 중

단되다가 1949년 [신학정론]에 "신학의 필요"(4-10면)라는 논문을 필

두로 다시 활발한 변증학적, 정통보수적, 헙증학적 신학주장을 부지

런히 역설했다.

1950년에는 "정통과 신정통"[신학정론] 2/1,9-24면), 1951년에는"근

세신학의 보수적 태세"(로고스 1,1951,12,5-9면)을 발표하였다.

1960년에는 "근본주의" ([신학지남]25/1,1960,9,12-24면)을 발표했으

며, 여기에서 그의 신학의 전체적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그리고

1961년에는 "근본주의 신앙"([파수꾼]106,1961.1,24-29면)을 발표했는

데, 여기에서 박형룡은 다시금 정통보수적 신앙형태의 정당화를 언급

하였다. 1962년에는 그의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의 원형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칼빈의 현대적 의의"([신학지남]29/1,1962.9,5-10면),"칼

빈신학의 기본원리"([신학지남]29/1.1962/9,5-10면),"칼빈신학의 기본

원리"([신학지남]29/1,1962.9,20-31면)를, 1963년에는 "성경 영감의

교회적 교리"([신학지남]30/4.3-10면)와 "복음주의 신앙의 현세"([로

고스] 15,1963.12,11-17면)를 발표했다.

1964년 한국신학계의 자유주의 신학운동을 지켜보며 박형룡은 "한국

교회의 자유주의"([신학지남]31/1,1964.9,3-14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곧이어 1965년,9-13면)를 다시 제창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신학지남]34/1,1967.6,1-2면)을 강조했다.

1970년에는 "하나님의 시험과 진노"([신학지남]37/3,1970.9,9-18면)

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1976년에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43/3,1976.9,11-22면)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그

는 끝까지 선교사들이 전해준 전통신학을 보수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

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한

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이 웨스턴 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다.

라고 전제하면서 (1)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신념.(2) 하나님의

주권에의 확신 (3)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4) 성경진리의

성실한 실천 (5) 천년기전재림론을 갈파했다. 즉 한국 장로교회의 신

학적 전통이 바로 이 5가지 요소에서 구축되고 있으며, 그것의 보수가

정통주의 임무임을 강조한 것이다.

박형룡은 1928년 5월에 첫 글을 발표한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50년동

안 [신학지남]을 비롯하여 여러 학술지에 수백편의 신학논문들을 발표

했으며, 논평,설교를 비롯한 신앙의 글들과 역서 및 저서 등, 그 수를

하나하나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양적으로도 많은 글을 썼다. 1935년에

출판된 그의 [신학난제선평]은 그 당시 평양신학교의 강의록을 모은것

이었지만, 그 뒤로도 평양신학의 교과서로 사용되는 정도로 오랫동안

한국 장로교 교역자들의 인상에 남았던 명저이다. 박형룡 박사의 글들

을 모아 1978년에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에서 [박형룡박사저작전집]

(14권)을 출판하였다. 이것이 그가 1928년에 첫 논문을 발표를 하고나

서 50년 뒤의 외곬 신앙이 절절이 깃든 설교집,주석서 등을 비롯하여

10여권의 저서들이 한국교회에 유산으로 남아있다.


 

III. 평가의 장

현재 몇명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박형룡이 그들의 스승

혹은 선배 신학자들의 신학 노선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다.

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조건 박형룡 박사의 인간성이나 저서까지도

고의적으로 깎아내리려하고, 평가절하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학문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감정적인 비판의 글은 독자들로부터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형성,

그리고 박형룡의 신학과 한국교회사에서 의 위치에 대하여 공정한 평

가를 내리지 못했다는 평을 받게 될 것이다.

박형룡의 신학을 평가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박형룡에게는 신학이

없다고 평하는 신학자도 있고, 그를 "수입된 외래신학의 시녀'라고 비

판하는 신학자도 있다.

필자는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신학 자체도 100% 외래신학이며, 더

욱이 그렇게 비판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몇사람은 그들의 신학역점을

몇년도 고수하지 못하고 철라 옷을 바꿔 입듯이 '유행 신학'에 민감

하게 추종해 가는 것을 보면서, 반보수주의란 그때그때마다 일어나는

신학의 물결에 확고한 신학입장없이 맹종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두

는 입장인가 반문해 보았다. 기독교 신학이 외래학문이 아니고, 순조

선 토종학문이란 말인가? 신학이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강조하

고 있으며, 그래서 해석학적 방법을 필연적으로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

는 것을 잘 아는 이러한 박형룡비판가들(신학자들)이 박형룡 당시의

시대, 박형룡의 학문적 성장기, 1930년대 한국에서의 학문적 수준과

의식, 그리고 당시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주류 등등을 역사 문화적 차

원에서와 사회, 정치학적 차원에서 참작했다면, 박형룡에 대한 평가

를 그렇게 몰가치적이라고 단정하는 무지함과 다혈적 감정표출은 자

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필자는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형성에 관한 진술을

마무리 지으면서, 몇가지 결론적 평가를 내려 보겠다.

1) 김정준 박사는 "박형룡 박사는 한국보수주의 계통의 교회와신학

형성, 그리고 그 지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교

파적인 관점을 떠나서 한국신학사라고 하는 차원에서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박형룡의 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 이 봉우리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

에 함부로 다룰 수 없다"고 예찬하고 있다. 김박사의 표현대로 라면"

박형룡"이라는 그 봉우리가 너무 커서 아직까지 누구도 그 봉우리의

정상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김박사의 평가는 김박

사의 참된 학자적 인품과 겸손함을 나타낸 표현이다. 한 인물의 사

상을 어떻게 완전히 정복했다고 하겠는가? 박형룡의 직선적 언행과

배타적 성격,변증과 논증을 통한 독선적 자기주장 정당화가 문제점

이 많기는 하지만, 그러한 단점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신

학과 신앙을 초기 선교사들의 "순수하고"청교도적인 신앙을 이어가

는 것으로 초지일관 주장하고 보수하려고 노력했던 공로는 그 결과

가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기 이전이라도 긍

정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과만을 갖고 원인과 과정 자체마저

평가하는 것은잘못된 평가 방법이다.

2) 주재용 교수는 "어떤 신학도 만고불변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전통이 역사로 극복되어야 정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박사는 전

통을 문자적이고 전통적으로 이어가려고 했다. 이것이 그의 입장이

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오늘과 내일이 없다. 어제만이 있을 뿐이

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어제의 인물이다" 하

면서 또 박형룡의 성서관에 관하여 평가하기를"그의 신학적 입장이

성서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과학적 세계관에 철저

히 몰두한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

이다. 그러나 불가시적 존재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믿으면,그

것이 그 믿는자들의 신앙이 되듯이 정통보수만이 참된 신앙이요 신

학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옳은 것이 아닐까? 서로입

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편의 신앙이 다르다고 하여 틀리다

거나 "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고 비판하는 것은 또 다른

비판의 비판만을 낳게 될 것이다.

3) 몇몇 신학자들은 박형룡이 그의 [교의신학]머리말에서 겸손하게

솔직하게 표현한 내용을 붙잡고 그의 신학이 전무함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교의신학]은 그가 여러해동안 강의해 온 강의록을 출판한

것이며, 교과서이다. [교의신학]머리말에서 박형룡은"이 책은 역시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에 지나지 못한다. 이것

은 물론 필자의 아는 것이 적은 탓이지만 또한 본의에 맞는 일이기

도 하다. 필자의 본의는 칼빈주의 개혁파 정통신학을 그대로 받아

서 전달하는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옛사람이 말한 바 술이부작의 태도라 할 것이다. 팔십년 전 이 땅

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전하여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

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

다. 이 고백은 오히려 그가 겸손하고 정직함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박형룡 비평가들의 대부분도 그들의

저서에서 대부분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고 그대로 자기의 독창 사상

인 것처럼 옳겨놓은 곳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과연 자기 사상이나 주장이 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사상은 없다고 역설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4)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꺾어모은 꽃다발"도 창조적 조화를 이

룰수 있지 않을까" 훌륭한 꽃꽃이나 잘 엮어진 꽃다발은 그 자체가

화원에 핀 꽃들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모자이크 예술작품은

그 모자이크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낱낱의 조각들보다 더 훌륭한,창

조성을 발휘한다. 박형룡은 보수신학이란 화원에서 벌코프(Louis

Berkhof), 핫지(Hodge),워필드(Warfield),답프네(Dabney),쉐드(She-

dd), 스미드(Smith),카이퍼(Kuyper),바빙크(Bavinck),보스(Vos)라

는 꽃들을비롯하여 스트롱,메이첸이라는 꽃도 꺾어 그 자신의 "박

형룡 신학"이라는 꽃다발을 엮은 것이다.

우리들의 과제는 박형룡이 남의 꽃밭에서 꽃을 꺾어 모았다거나, 그

꽃다발이 창조적 미가 없다거나 잘못 엮어졌다거나 하는 문제만을 갖

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할 것이 아니고, 적어도 박형룡이 남의 꽃다발

을 만든 최초의 사람이라는 점과 그 꽃다발이 어떻게 엮어졌는지 그

의 조화의 예술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고 계속 논의를 해가야 할 것이

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에 영원히 묻혀버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어제의 인물"이 아니고, 어제는 꽃다발을 만들었고, 오늘은 많은 사람

들에게 그 꽃다발의 향기를 향유케하고 있으며, 내일에는 아마도 그

자신의 화원도 경작해갈 끈질긴 작업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계속 숨쉬고 있는 인물이다.

박형룡은 많은 단점과 비판점을 갖고 있으며,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에 직접 나쁜 영향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어떤 모습으로

든지 지금도 살아있는 현재의 인물이다.


 

박형룡의 보수정통주의 신학사상(II)

장신대:한숭홍교수

"성경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기

록된 책으로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교훈을 성령의 감화 밑에서 일

점의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다고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성경에 대한

정통신학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그리고

이렇듯이 높고 진실된 성경관은 전혀 선지, 사도 및 그리스도 자신의증

거에 의한 것이다."

- [기독교 현대신학난제선평](1975),P.30.

 

I. 글머리

 

죽산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그가 한국 장로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작업이 될수

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학사상을 분해하여 낱낱의 개체들

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보수정통주의 신학

자로 자처하고, "한국의 메이첸(Gresham Machen)"으로 불려지는 그는 신

학사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불변의 신학으로, 그의 삶 전체를 철저한 칼빈

주의 정통보수에 온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서는 '박형룡신학'의 중심사

상을 그의 작품들 가운데 몇 편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평가해 보고자한

다.

 

II. 박형룡신학의 중심사상

 

1. "종교의 권위"(1930)

보수정통을 추구하는 박형룡의 신학 경향은 그의 신학사상의 성격을결

정지어준다. 박형룡의 신학사상은 1930년 5월 [신학지남]에 발표한 논문

"종교의 권위"에서 표명된 이후 전 생애를 통하여 변함없이 주창되어 왔

다.

그의 신학사상의 핵심은 성서 영감성과 성서 무오설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는 인간을 초월하야 神의 묵시에 절대권위를 발견하고 신의 묵시

의 기록인 성경으로 신앙과 행위의 무오한 법칙을 삼는다. 기독교의 절

대 권위의 소재는 성경이다"라고 분명히 단정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기독교의 절대권위를 성경에서 논증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과학적 증명을 병행하고 있다. 금수와 인간의 비교로부터 출발한신

의 절대권위와 그에게 대한 복종을 핵심으로 주장하며 교육학적 권위,사

회학적 권위, 인식학적 권위로서 권위의 종류를 대별하고 나서 성서적권

위를 부정 혹은 상대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형룡은 이미 18세기 전반기부터 영국에서 출현한 자연신

교나 18세기 후반기부터 독일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합리주의적 신학, 헤

겔(W.Hegel)의 정신현상학이나, 에른스트 트륄취(Ernst Troeltsch)의 종

교적 선재설(religious apriorism)은 물론 종교사학파의 신학입장도 거

부한다. 또한 그는 슐라이 에르마허(Schleiermacher),릿츨(Albrecht R-

itschl),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등의 종교적 입장도 신학적 절대

성의 결여로 보기 때문에 철저히 부정하면서, 이른바 합리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 등은 성경의 권위에 반역하는 신학사상이므로 신학의 타

락을 불러 일으킬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사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

는 대표적 문장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의 권위에 반역이 실제에 주는 악영향이 막대하다.

절대권위가 없는 이성이나 경험이 人의 양심을 구속하

지못하는 결과로 성경멸시자의 신앙타락은 면치 못할

사실이다.

성경의 권위를 포기하는 동시에는 도덕의 기초가 동요

되야 비참한 도덕적 타락을 또한 초래함은 人의 이론

이나 경험에 의한 격언교훈만으로는 人의 양심을 호령

하지 못하는 연고이다.

그는 이렇게 비판하면서 그의 주장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있다.

어시에 오인은 결론하대 신의 묵시인 성경에 최고 권

위를 헌하야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을 작함이 실

제적 견지에서도 최선의 정책이라고 한다.

 

2. [신학난제선평] (1935).

성서의 권위와 절대무오의 주장에 온 생애를 기꺼이 바친 박형룡은

[신학난제선평]을 집필하고 1935년 9월 28일자 '자서'에서 말하기를 현

대를 "(기독교 신학) 사상의 무정부시대"로 단정하였다. 그는 "오늘의

기독교는, 환경에 물들었음인가 세계의 기독교 전체가 역시 사상적 혼

란으로 말미암아 수난하는 바 그 참상이 실로 극심하다. 천태만상의 이

사상은 바야흐로 정통신앙의 존속을 위협하려 한다... 기독교의 근대제

신학난제를 연구하여 그 진상을 밝히는 일은 일생애의 대사업이다"라고

자신의 신학적 사명을 천명하며, 정통신앙을 위한 투신을 다시 역설하

고 있다. 이렇듯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물결을 막고, 성서의 권위에서그

위용을 자랑하는 정통신앙(신학)을 보수하는 일이야말로 일생의 대사업

으로 삼고있다.

그러면 박형룡 신학사상의 중심이며, 그가 일생의 대사업으로 주장하

는 정통신학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박형룡 신학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3. 박형룡의 정통신학 이해

박형룡은 당대에 유행하던 여러가지 신학학설을 분석.비판.하기 위

한 목적을 갖고 먼저 정통신학의 입장을 정의해주고 있다.

정통이란 무엇인가? 정통에 관한 이해나 정의는 교파에 따라 다르므로

일정한 모범틀이나 규칙에 맞추어 옳다거나 틀리다고 하는 판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교파나 교단에 다라서 새로운 신학사조를 수용하는

입장이 그 교파나 교단의 대다수가 될 때 그 사조는 정통설로 인정될수

도 있겠고, 교단의 대다수가 새로운 신학사조를 무조건 반대하여 전통

적 신학사상 보수를 고집한다면 낡은 신앙체계가 그대로 정통으로 계승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약

간의 규범적 틀은 마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박형룡 박사는 정통을 다음과 같이 크게 구별하여 정의하고있다.

1) 정통이란 좁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대체로 한 교

파에서 그들이 승인하는 신앙개조나 신앙고백 등에 신학의 전체 내용을

포괄하고 그 신앙개조나 신앙고백을 그 교파의 근본적 신학입장으로 하

묘, 각각의 지엽적 교의에서도 이러한 입장이 통일적으로 적용될 때 정

통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된 정통이란 표현

은 한교파에 국한된 것이므로 여러 교파 사이에서는 정통이란 말이 통

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파의 신조에 따르느냐 새로운 비정통이냐 나

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정통이라는 것도 전기 정통의 경우

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교파 안에서 생겨지는 일일 것이요, 결코 여러

교파를 포괄한 어떤 이단이 될 수 없다."

대체로 박형룡의 정통의 대한 정의는 이런 일면을 갖고 있다. 그렇다

면 그의 신학은 정통을 보수한다고 하면서 사실, 비정통에 대한 관대한

이해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수용태도에 따라

서 교단적으로는 공통적으로 정통과 비정통을 구별할 수 없으며, 비정

통이라고 한 교파에서 비판받는 교리도 다른 교파에서는 정통교리로 받

아 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보수정통신학에 대한 그의 강한 신학선언은 결

과적으로 '상대주의적 정통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일

생의 대사업으로 정통신앙을 보수하겠다고 했던 대선언 자체가 진리수

호나 전통적으로 신앙고수를 위한 힘있는 선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은 사실 어떤 교리나 신앙생활 가운데 어떤 새로운 상황, 변화,신

학등에 따라서 부단히 변하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으며, 정통신학

이란든가 정통신앙이라고 하는 소위 정통주의 신학 역시 항상 보수되어

왔다고 하는 형식상의 의미 말고는 실제적으로 한 교파의 신조나 신앙

고백에 제한되어 변천하여 왔을 뿐이다.

박형룡 신학사상이 성서의 권위를 수용하는 것을 정통보수파라고 했지

만 초기의 박형룡은 정통보수의 입장에 매우 상대적인 면을 갖고 있었

으며, 신학논쟁의 발단과 격화되는 김재준 교수와 신학입장의 대립으로

점점 정통에 대한 이해가 극단화되고 철저히 보수화되어 타협을 베제한

거의 독단주의로 빠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보수 정통주의의 상대화

에서 철저히 절대화로의 전향 동기를 추적이 거의 어려운 미묘한 상태

이다.

2) 정통이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박형룡은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런 입장의 정통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모든 교파를 포괄한 기독교 전체를 단위로 할 때에 거기도 또한 정통

과 비정통이 섞여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넓은 범위의 신학적 내

지 교리적 분야에 전기 양자를 구별하기는 극히 곤란스러운 일이라고보

지 않을 수 없다." 박형룡은 이렇듯 넓은 의미에서도 정통 신학과 비정

통신학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래서 "기독교 전

체 가운데서 정통신학과 비정통신학이 필연코 구별된다는 각오 때문에

생긴 가장 정통적인 신앙을 찾아본다는 노력의 결과"가 그의 신학함임

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박형룡이 그의 신학노선을 정통신학과 비정통신학을 인정하는 그

런 관용적 태도를 견지하며 그의 신학관만을 주장해 나갔다면, 다시말

해서 그가 그의 신학을 스스로 고백하듯이 구프린스톤학파의 영향으로

'메이첸화'한 입장임을 그대로 공포하고 이끌어 나가면서 다른 신학사

조에 관용적 혹은 무관심적 태도를 보이며 신학했다면 오늘날 한국신학

계에서 던지는 준엄한 비판의 돌을 맞지 않았을 것이며, 자기신학의깊

아니 폭도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모두 틀리다고 비판만 함으로 말미

암아 한국신하계의 분열과 더불어 한국장로교회에 분열의 방법을 이식

켜준 효시요, 원초자가 된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점은 그의 아들 박아

론 교수도 솔직히 인정하고 있으며, 한국 신학자들 모두가 이점을 박형

룡 박사를 바라볼 때 아쉽게 여기는 점이다. 그는 몇년뒤에 이른바 그

가 말하는 비정통신학에 대한 상대주의적 인정을 철회하고, 비정통신학

을 무조건 이단이라고 독설에 가까운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3) 정통이란 피상적인 의미에서 정의한다면 "일반적으로 우세를 가진

기준에 가장 적합한 종교적 의견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에

어떤 영속적 성질을 인정하기 곤란하다. 그것은 채용된 기준, 혹은 우

세를 가진 기준이 시간과 장소를 따라 변동되기 때문에 그렇다. 때와곳

에 따라 전변하는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는 오늘에 이곳의 비정통이 내

일에 저곳의 정통이 될 수도 있고, 오늘에 이곳의 정통이 내일에 저곳

의 비정통이 될 수도 있다." 피상적이기는 하나 이런 정도의 정통에 대

한 이해를 했던 박형룡 박사가 철저히 자신의 신학 노선과 입장만을 정

통으로 고집하려했던 것도 매우 의아한 일이다. 분명히 그는 자신의 신

학 정통도 다른 곳, 다른 때에는 비정통이 될 수도 있음을 의식할 수있

었을 텐데, 그의 주장은 거의 중세 가톨릭주의자들이 역설하던 것과 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독선적이고 일방적이다. 참된

학자라면 한 사상에 대한 이론의 다양성과 여러가지 해석의 가능성이있

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없을 것이다. 그는 학자적 양심으로 이 점을 충

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다른 의견이나 다른 사

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다른 이론에 대한 충분한 가치도 인정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여러 자유주의적 신학 운동을 비판하면서, 인기를 얻어 보

려는 행동으로 낙인찍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인본주의(H-

umanism)를 비판하면서 철저히 신본주의의 단조로운 성서권위론으로 빠

져들어 갔다. 아마도 이것은 그의 자기모순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비정통이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다른

정통도 때와 곳에 따라 비정통으로 변할 수 있는 것만 주장했던 것이다.

4) 정통이란 말의 어원 풀이에 있어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사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정통(Orthodoxy)이란 말은 '옳은 의견(orthodoxos)'이

란 말이다. 다수인, 혹은 주권자에게채용, 혹은 우세를 얻었거나 말았

거나 '옳은 의견'이면 정통신학이다." 따라서 옳은 의견이란 "오직 하

나뿐일 것이다." 그는 정통신항의 유일무이의 "하나", 즉 정통을 "영원

한 종교적 권위를 절대적이요, 불변적인 소위 인식학적 권위가 아니면

안된다." 고 하는 그의 투철한 정통신앙 방법론에 입각해서 자기 주장

을 자신있게 피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식학적 권위에 기초한 정통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절대적인 인식학적 권위는 오직 천계와 영감에 의

하여 기록된 성경에 있는 것이다. 순전히 성경에 따라서 거기 기초하고

거기 부합하는 종교적 의견이면 옳은 의견, 즉 정통 신앙이라고 인정할

수 있어서 다수인의 권위나 선생의 권위에 따르지 않는 바 아니다.

그러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다. 그 의견이 성경과 합하느냐 않느냐를

를 상고하여 성경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의견을 정통이라고 해야할것이다.

박형룡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른바 네번째 유형의 정통에 관한 정

의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정통이란 사도시대에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바른 교훈"(딤전1:10,딤

후 4:3,딛1:9), "바른 말"(딤전6:3),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2

15),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며"(딛2:15),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딤후2:15), 등등의 말씀을 증거로 정통에 대한

사도시대의 성서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성서에 근거하여 보

면 사도 시대와 사도들의 정통은 "바른 말"(=성경)을 표준으로 하여 정

통이란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그 뒤에 성경이 정경으로 됨에 따라 교

회는 정통이란 말을 신앙의 정통, 즉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교회시대에 접어들어 감에 따라 "교회는 신앙의 기준인 성경을 소유하

는데만 그치지 아니하고 일보 더 나아가 그것을 해석하여 조식적인 교

리들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성경을 옳게 해석하여 기독교 신앙의 영구

한 기초를 확인하는데 있어서 필요불가결의 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정통의 역사적 근거를 철저히 수립하려 했다. 심

지어는 그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역시 성서에 근거한 정통신학 회복운동

이었다고 해석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두 원리로서"(1) 성경은 신

앙과 행위의 유일법칙이라는 형식적 원리와 (2) 신앙만으로 칭의된다는

실질적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박형룡은 정통신학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통신학은, 신구약 성경을 천계와 영감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인정

하는 초자연적인 성경관을 가진다.

정통신학의 가장 명확한 표현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되어있다.

이런 철저히 보수정통주의 입장에 선 그의 신학은 그가 "비정통주의적

신학"이라고 부르던 이른바 절충주의적 신학, 자유주의신학 등을, 신도

의 신앙을 타락시키며 신앙건설과 유지능력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신앙

파괴적 선전에 불과한 현대이론이라고 거절한다. "그것의 (비정통) 결

국은 신앙을 중독타락시키는 비정통 제설에 도달할 것 밖에 아무것도없

다"고 확신하고 있다.


 

4.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

정통신앙 혹은 전통신학에 대한 박형룡의 열정과 주장은 일생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논문인 1976년 9월 [신학지

남](제174)에 발표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서 그의 신학 초

기의 정통주의 신학사상을 거의 같은 필치로 재연하고 있다. 그의 신학

입장은 거의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독창성이 없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이 논문은 모두 3장으로 나

뉘어져 있는데, 제1장은 영미에서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 제2장은 한국

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 제3장은 우리의 신학적 전통의 보수로되어 있다.

이 논문의 첫머리는 그의 신학 입장의 총괄적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이렇게 되어 있다.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

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한국 장로교회의신

학적 전통이란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

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개되고 성장한 과정이다.

위의 진술에서 보듯이 그의 신학이해는 철저히 칼빈 개혁주의의 웨스

트민스터 표준을 최고최대의 장로교 진리체계로 확신하면서 한국 장로

교의 자리매김으로 이해하고 있다.

칼빈주의(Calvinism)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학의 중심을 (1) 하나님의

주권과 (2) 성서의 권위에 두고 있는 신학이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

은 (a) 전적타락,(b) 무조건 예정,(c) 무한구속,(d) 불가항적 은총,(e)

성도의 견인 등을 5대 강령(TULIP)으로 삼고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도계요 등은 6년동안 (1643-1648)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인 청교도

신학회의 (영국목사121명, 스코틀랜드국위원 5명,평신도 대표30명)에서

제정된 것으로서 신도계요,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교회정치 및 권징

조례, 예배모임에 관한 것이며, 이것이 뒷날 영미 장로교회 신앙의 표

준이 되었다.

박형룡은 이것에 철저히 추종하려 했고, 이런 입장, 즉 칼빈주의적 개

혁주의 사상과 웨스트민스터 신학표준을 장로교의 정통교리로 인정하며,

한국 장로교의 정통신앙이란 바로 영국의 청교도적, 열렬하고 경건한칼

빈주의적 개혁주의 신학태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으로 삼

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입장의 진술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서 (1) 성령의 역사를 강

조하는 생활과 (2) 일요일은 안식일로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의 진술

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a) 성령의 역사란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타난다.

(b) 성령의 역사란 성서의 권위로 증거된다. 그는 여기에서 성서는 하

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생활과 신앙의 법칙이라는 것과

성경무오설과 신적 권위에 대한 확신은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는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役事에서 유래

된다는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제1장,2,3호)에 근거하여 제시 한다.

(c) 확신있는 전도가 청교도적 신앙 실천, 즉 전도 실천임을 강조한다.

박형룡은 이 논문의 제2장을 마무리지으면서 결론적으로, "요컨대 영

국에서의 청교도 신학은 성령의 사역에 치중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주

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전도의 실천에 매진하며 주일의 안식일

화와 경건생활의 엄격을 노력하는 것을 특징으로 가지기를 상술 한봐

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 온 청교도들도 거의 이러한 신앙입장

이었다고 하겠다. 박형룡은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음으

로써 한국 장로교회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

런 전통을 충분히 이어가는 것이 정통신앙 보수의 입장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한국 장로교회 선교 이래로 항상 (1) 성경의 신성한 궈위

를 믿는 신념을 갖고 있는 교회, (2)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을 갖

고 있는 교회, (3)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하는 교회,(4) 역

사적 천년기 전 재림론을 강조하는 교회로 성장되고 형성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것이 제2장의 핵심사상을 간략하게 간추린 개요이다.

박형룡은 제3장에서 장로교의 신학적 전통을 보수할 것을 역설하고있

다. 먼저 그는 장로교회 창립 50주년이 되는 1934년까지 보수정통신학

이 무난히 유지되어 왔으나 희년을 맞으면서 자유주의신학의 도전이시

작되고, 신사참배 강요 핍박과 교회탄압을 만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전성과 정통보수주의 신학의 위기로 신학논쟁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하

고 있다.

 

1945년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자유를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

에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이 심화되는 계기를 준 때이기도 하다.

그는 이 기점을 전후하여 교회분열의 시기를 잡으려 했으며, 그 최대

의 요인은 자유주의 신학의 행동에서 일어난 도발이었다고 발단과정을

진술하며, 더 깊은 요인 추적을 시도하려 했다. 그의 진술을 간추려소

개하면 다음과 같다.

1) 1945년 8.15 해방후 자유주의 세력은 WCC 에큐메니칼운동에 가담하

면서 더욱 기세를 왕성하게 하여 교회를 분열하고 있으므로 정통보수의

입장은 "이 땅의 거룩한 씨로 영구히 수호되어야 할 것이므로" 자유주

의 세력의 멸시와 천대를 참아가며 고군분투해야 한다.

2) 한국에 청교도 신앙을 전해준 미국이 1967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

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도계요를 버리고 새로운 신앙고백을 채택함으

로써 자유주의 세력이 이러한 "타락 속화된" 미국 교회의 발자취를 답습하고 있다.

3) 금일 세계교회의 대세는 자유주의와 WCC 에큐메니칼운동에 기울어지

고 있으며, 철저한 정통보수를 내세우는 복음주의 소수파 가운데서도그

일부가 WCC 에큐메니칼운동에 따라가려는 분자들이 생기고 있어 매우 경계해야 한다.

4) 미국교회에서도 신복음주의운동이 복음주의자들 안에서 분열된 파로

나타나고 있다. "신복음주의운동은 3거두(Harold John Ockenga,Carl H-

enry, Billy Graham)의 지도 아래 사회복음을 주장하여 WCC의 사회적활

동에 따르며 교회합동을 역설하여 WCC의 사회적 활동에 따르며 교회합

동을 역설하여 WCC 와 로마 교회에 아첨을 자행하면서 재래의 정통주의

복음주의는 교의 문제로 교회를 사회적 의무에 등한한다느니, 교의문제

로 교회를 분리하는 분리주의자들이라느니, 과학을 무시하는 몽매주의

주의자들이라느니 하여 정통주의에 비판을 퍼붓는다. 신복음주의는 사

회복음을 전하되 구령복음을 전하기에 태만하지 않으니 WCC 와 다르다

고 그들은 스스로 변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활동의 방식에서

WCC 를 따라가니 결국 WCC 가 하듯이 무신론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

와 악수하게 될 때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은 교회합동운동에 찬동하되

성경을 믿으면서 그리하는 점에서 WCC 와 다르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과학에 맞도록 해석한다. 하여 진화론과 성경고등비평에

게 문을 열어주니 큰일이다.

5) 그의 단호한 결심은 다음과 같이 표명되어 있다. "금후 우리의 환경

에 천변만화가 있더라도 우리는 결코 다른 사상에 따라갈 수 없다. 우

리 교회는 우리 고유의 신학적 전통을 버리고 다른 사상을 따르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기도 하나님 앞에 서약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표명은 후기의 박형룡 사상이라기 보다는 젊은 박형룡의초

기 신학의 재판에 불과한 것이다. 너무 진부한 내용과 철저한 배척주의

는 그의 말을 빌리면 일생의 대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WCC 에

큐메니칼에대한 철저한 배척과 불신, 그리고 잘못된 견해는 전혀 수정

되지 않고 있는 점에서 그의 초지일관된 신념을 다시한번 평가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III.글맺음

지금까지 우리는 정통보수를 항상 강조하고 있는 박형룡 박사의 신학에서 정통이란 무엇인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초기 논문 "종교의 권위"(1930), 초기 저서 [신학잔제선평](1935) 미치 그의 마지막 논문인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을 비교하면서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시차가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변화된 사상을 발견할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분석해 보았으나 동일한 주장과 동일한 변증방법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신학사상이 정통보수 혹은 보수정통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나 사상의 다 변화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보수되어 온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철저한 신앙, 철저한 신념, 철저한 보수정신에서 그의 신학이 정립되었기 때문에 그는 가히 "한국의 메이첸"이라 불려지는 것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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