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여성신학

好學 2011. 12. 13. 21:14

여성신학


 

글은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의 교회여성과 여성목회자를 위한 통신교육과정의 하나로서 "환경과 여성신학"이라는 주제 하에 쓰여진 글입니다.

 

환경과 여성신학 

 

생태계의 위기와 여성신학의 과제

 

1. 들어가는

요즈음 언론매체를 통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이슈가 있다면, 아마 생태 문제에 관한 것일 것이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마구 자연을 이용하던 간들이 이제 이러한 행위가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생태계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것이다.

이미 강과 바다 속의 물고기들은 수없이 죽어가고 있고, 마음놓고 마실 있는 물은 구하기가 어려우며, 공기 또한 오염되어 있어서, 언젠가는 공기마저 사서 어야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대기중의 산소량이 23% 그리고 0.03% 이산화탄소 량이 지구가 생긴 이래로 계속 지속되어 왔는데, 산업혁명이 노래한 이후 지난 200 사이에 4억만년동안 동일하게 유지되어오던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불균형을 이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대기중의 산소량은 계속적으로 줄어들어가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대기중의 이산화탄소량이 2배로 늘어난 경우 전자구는 온실 효과로 인해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된다고 한다. 이러한 온실효과는 핵무기 보다 더욱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직접적인 원인이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자연질서를 유지 먹이사슬구조가 파괴되고 있는 또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미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지금 3000만종의 생명체가 살고 있는데, 중에서 학문적으로 연구되어 확인된 수는 10% 불과한 300만종 뿐이다. 그중에서 하루에 보통 100여종의 미생물들이 소멸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비율은 알려져 있지 않은 미생물의 수를 고려해 , 전체 생명체의 소멸의 비율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주에 살아있는 물체는 먹이사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바로 미생물체라고 있는데 이러한 미생물들의 소멸은 궁극적으로 생명체의 존속을 위태하게 하는 것이라고 있다. 또한 태아를 보호하는 양수막과 같이, 지구를 감싸서 우주내의 방사능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여주던 오존충에도 구멍이 생겨서 지구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대인들은 프레온가스라는 물질을 사용하여 에어컨, 스프레이, 모기향에 이르기 없이 많은 상품을 개발하고, 결과 이러한 것들이 일곱 개의 충으로 겹겹 쌓여 있는 오존충을 벗겨내고 이미 남극과 북극 대륙에 우주의 방사능 물질을 대량으로 투과 시킬만한 구멍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이 아닐 없다. 지구를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방사능 물질이 이제 지구에서 발전소등을 통하여 만들어 아니라, 우주로부터 반입되어 들어오게 되는 정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인간이 생존하기 더욱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17~18세기 이후 서구의 기술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 었지만, 동시에 상상할 없는 무서운 부작용을 가져다 것이다. 여름 우리 경험하는 이상기상은 한국에만 생긴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생겼다. 도는 가뭄과 함께 50년만의 일과가 몰아쳐 265명의 인명피해를 냈으며, 호주도 최악의 가뭄으로 농작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유럽에서도 폭서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기상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주된 이유는 지구의 기온이 높아졌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오존층의 감소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환경오염과 그에 따른 공해 문제를 사실상 인간이 자초한 것이라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생태문제의 위기의 원인을 단지 기술과학의 발전으로만 돌릴 있을까? 아니면 기술과학을 개발하고 이용하는 인간의 의식구조에 뭔가 주요 원인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 또한 역사 속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인간 으로 여겨져왔다는 사실과 자연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어떠한 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들을 가지고 글에서는 첫째, 생태계의 위기가 어떤 범주에서 문제가 되는지, 둘째, 여성과 생태문제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셋째, 생태문제와 기독교의 관계는 어떻게 있는지, 그리고 지막으로 생태문제에 대한 성서적 입장은 무엇인지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2. 자연과 여성

19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가지의 운동은 생태운동과 여성운동이라고 있다. 종류의 운동이 비숫한 시기에 출현하여, 여성들에 의하여 재기 었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연 여성이 역사 속에서 받아온 억압을 ‘쌍둥이 억압’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여성과 자연의 문제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 생태운동은 처음에는 자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아니라, 인간의 생존 문제 때문 환경의 파괴에 대하여 관심 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태운동이 점점 화산되면서 자연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까 자각하기에 이르었다. 우리 나라에서 행하여 지고 있는 대부분의 생태운동은 번째 단계, 인간의 생존문제 때문에 환경파괴를 막자는 의식에 머무르고 같다.

그런데 이러한 생태운동의 발전단계가 여성운동에서도 비숫하게 전개되었다고 있다. 처음단계에서는 여성의 위치를 남성들과 똑같이 하는 데에만 주력하 였고, 다음에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 자체에 대하여 관심 하였는데, 현대의 여성운동은 모든 종류의 차별문제에 관심하고 있다. ,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실상 다른 차별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이다. 그래서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은 여성차별뿐 아니라 인종차별의 문제, 가난 자의 차별의 문제들에도 예민한 촉각을 세우고 있으며, 생태계의 위기를 가져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차별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렇게 여성운동이 확장되면서, 여성운동은 여성과 자연이 역사 속에서 받아왔던 압이 가지고 있는 연관성을 제기하고 시작하였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게 되는 근원적인 가치관에는 ‘이원론’적 사고라는 식구조가 있다. 이원론적 사고란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두가지 대립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자연의 부분 이라는 생각보다는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대상으로 보는 의식이다. 그래서 산에 오르는 것도 ‘정복했다’고 표현하는 인간은 사실상 산이란 인간에 하여 정복되어질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거대한 산의 일부분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잊고, 오만하게 자연을 파괴하여 왔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역시 역사 속에서 이러한 도식으로 나타나 왔다고 분석되어 진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서 간주되어 여성은 남성들의 정복의 대상으로, 또한 남성 들의 여러 가지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여성은 남성들의 성적, 물질적, 노동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이 여성과 자연의 문제를 동시에 이야기 하고 하는 사람들의 분석이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구조에서는 우주에 존재하 것의 서열을 나누게 되고 남성은 하나님 다음으로 높은 서열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결국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보이는 문제들에 변화가 있어야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원에도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있다. 남성들이 자연과 여성에 대하여 가져왔던 지배적이고 우월적인 의식이 변화되어야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게 , 생태계의 위기가 극복되어질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구조에 근원적인 화가 없다면, 결국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지배-종속, 우월- 등의 구조에 머물 밖에 없다. 따라서 생태계의 위기는 기술과학이나 사회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구조의 문제이기도 것이다. 여성과 자연의 제에서 근원적인 연관성을 보게 되면, 생태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범위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리라 생각한다.

 

3. 기독교와 자연

그렇다면 생태위기와 기독교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기독교 안에서 태문제를 이야기 하게 것은 사회적으로 이미 생태문제가 제기된 이후이다. 독교를 주된 종교로 받아들이고 있는 서구세계에서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 으며, 따라서 그러한 과학기술의 발전 이면에 밑받침이 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 라는 지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비판적인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 26-28절을 통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내용의 창조론이 구의 과학과 기술문명에 의하여 야기된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이 되었으며, 동시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획인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하 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적이 등장한 이후에, 기독교 안에 생태문제가 이야기 되기 시작했다. 과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 명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기독교인들은 묻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마음대로 권리를 부여하신 것일까? 인간은 마음대로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해도 되는 것일까? 무엇이 하나님의 올바른 뜻일까? 이러한 물음들이 나오면서 기독교 안에서 창조론을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고, 결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시 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정치기적 책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이 창조하신 자연을 가꾸고 보호해야 하는 책임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무제약적 지배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책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새롭게 자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 역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예를 들면 홍수후의 하나님과의 계약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아있는 것’이 포함되며 인간과 자연은 동등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간주되고 .

이러한 사실들로 , 기독교인들은 창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자각해야 것이다. 첫째,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성서의 씀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나 허용이 아닌 청지기적 개념으로 이해해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며, 자연은 인간에 의하 착취되고 정복되어야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하여 자음받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물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엿새동안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 하시고 ‘좋다!’고 하심으로서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물들이 하나님의 사랑하 피조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의 창조론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서 독교인들은 현대의 생태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이면에, 자연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고 이러한 태도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생태문제를 극복 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측면임을 알게 된다고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생태문제를 이야기 , 창조론과 더불어 제기되는 이슈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이다. ‘기독교’라는 명칭에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도를 떻게 이해하느냐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도는 과연 인간만의 구속자이실까? 여성과 자연의 문제가 의식적으로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여성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으로 대하셨다. 나아가서 그리 스도는 창조의 근원이며, 동시에 창조물들의 궁극적인 구속자로서 이해된다. 러한 그리스도의 이해는 골로새서 15~20절에 나타나 있다.

"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 만물이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 . 그는 근원이시요, 죽은 사람 가운에서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살아나심은, 그가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려고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 스도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물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 (표준 새번역, 1: 15~20)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창조자시며, 구속자로 이해된다. 창조자이며 구속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현시이며, 우주를 창조하고 지탱하게 하는 하나님의 내재이며,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를 하게 하는 힘으로 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뜻이 땅위에 이루 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인 정의와 평화가 흐르는 사회에 대한 비젼을 갖게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비젼을 갖는 이들이다. 이러한 비젼을 지닌 이들은 여성이 라는 때문에 여성을 차별하고 비하시키는 이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성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 차별하는 이들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4.

골로새서 1 15~20절에서 있듯이, 그리스도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만물의 창조자이며, 구속자이다. 창조자이며 구속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시이며, 만물을 지탱하게 하는 하나님의 내재이고, 또한 하나님과의 불화를 치유하 화해하게 하는 힘이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하나님이며, 인간만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남자만을 하나 님의 형상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를 똑같이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 . 이러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의 의식구조에 자연을 복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든지 인간을 우주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며,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없다. 또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든지, 여성과 남성의 육체적 차이를 내세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은 그릇된 이다.

인간이 자연의 부분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인간 중심적인,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세계가 오염되고 더럽혀져서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적인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 . 또한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오랫동안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어서 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달란트가 발굴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왔다. 이러한 사실들은 남성의 자각과 회개가 있어야 하고, 여성들의 자각과 회개가 있어야 화될 있다. 이제까지 역사와 인류의 문화발전의 주역으로 간주되어왔던 남성들 여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에 대하여 새롭게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일들이 일어 나야 한다. 여성 역시 자신의 올바른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올바로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찾아내어 활용하는 것에 힘써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어떻게 하면 창조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할 있을 것인 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창조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는 일에 여해야 한다. 창조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또한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하여 올바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이 오래 전에 이루어졌 다면 기독교를 기반으로 전개된 서구의 기술과학에 의하여 자연이 지나치게 훼손 되고 파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연, 여성, 가난한 이들, 그리고 특정한 인종 들에 대한 모든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세계, 이러한 세계가 바로 하나님나라가 니겠는가? 올바른 의미의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은 창조의 본래 적인 모습을 회복하도록 힘써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디언에 의하여 쓰여 졌다고 하는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글은 인간과 자연의 없는 연관성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그리고 자연은 모두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존귀한 존재임을 자가하는 것이 생태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리라.

“…공기는 홍인종에게는 값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동물, 사람, 나무들은 모두 같이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없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 있을까? 만약 모든 동물들이 사라진다 , 사람들은 영혼의 거대한 고독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동물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똑같은 일이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모은 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토론를 위한 질문

1. 생태계의 위기가 생기게 가장 커다란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양한 차원에서 생각해 봅시다.

2. 창세기 1장과 골로새서 1장의 말씀을 여성과 자연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볼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습니까? 3. 3세계의 나라들은 개발과 발전을 해야하는 과제를 긴급하게 느끼고 있는데이 러한 과제를 수행해 나아가는 것과 생태계의 위기를 생각할 때에, 우리가 부딪히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기독교인으로서 현대사회의 생태계의 위기와 여성의 문제를 보면서 어떠한 세를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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