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맥 도나휴의 땅의 신학

好學 2011. 12. 13. 21:23

도나휴의 땅의 신학


 

기독교에 있어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위한 새로운 이야기


땅의 신학의 저자인 도나휴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필리핀 민다나오에서의 15년간의 선교체험을 경험하면서 오늘의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3가지 영역에 대해 고민을 한다.

첫째 영역은 어떤 한사람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화, 특히 비서구문화의 맥락속에서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있겠냐는 것이고 둘째는 정의와 관계되는 , 부유한 국가들과 가난한 국가들 그리고 같은 나라 안에서의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간에 점점 격차가 벌어져 가고 있는 세계에서 예수의 복음이 요구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생태계의 위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현재와 같은 상태가 지속되거나 증폭될 경우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위협을 가하게 자연세계의 엄청난 파괴와 유해행위에 대해 예수의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다.

우리는 지난 모임에서 엔트로피에 대해 공부했었는 사실상 [땅의신학] 책의 주제도 생태계의 문제에 기초되어 있으며 저자의 문제재기는 사실상 우리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직면하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이나 고민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이책에서 몇가지 관심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1. 복음을 현지 문화 내에 육화시켜서 보다 의미있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이를 예식, 전례로 표출해내야한다.

2. 세계적인 빈곤의 문제는 자멸적인 군비경쟁과 부정부패등으로 얼룩진 대부분이 전통적 기독교 국가들인 1세계국가들의, 지구가 지탱할 있는 정도를 넘어선 자연 자원과 인적자원의 남용과 허비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시대의 세계 경제 상황은 기독교인들을 특히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머리를 눕힐 곳조차 없었던 예수의 추종자들 15억이 지구 자원의 3분지2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고 평균적으로 비기독교인 이웃들보다도 3 정도 부유한 상태 있으나 최근에 이르러 이런 문제 제기에 일부의 선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품위있는 인간적 삶을 영위하도록 세계의 자원을 재분배할 새롭고도 공정한 국제경제 질서를 세워 나가는 일에 힘쓰도록 도전 받고 있다.

3. 세번째의 중요한 도전은 자연 세계의 지속적인 파괴와 관계되어 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윤 지향적인 접근이 이미 우리에게 안겨 손상을 인식하고 지구의 강력한 복원력과 재생력을 적극적으로 돌보기 시작해야 , 새로운 세계와의 관계를 모색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에 있어서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수년동안 여러 기독교인들과 지도자들이 문화와 사회정의에 의해 재기되어온 도전에 응답하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며 휠씬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악화되고 있는 환경이 기독교 신앙 자체에 제기하는 도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이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상은 지구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들을 이끌어 어떤 포괄적인 우주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음으로 이야기로서의 땅의 신학을 요구한다.

예수에 복음에 대한 증거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관심, 그리고 지구를 돌보는 ,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 맞물려 함께 어우러져 나가야 한다.


1 지상의 생명에 대한 위협

생태학은 인간 존재들이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지구를 집으로 이해하며, 이제 인간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무너져 니리는 소리를 직접 듣게 되고 말았다고 경고 한다.

생태학은 역사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바로 지금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하나뿐인 안식처를 우리가 돌보기 시작 있기 위해 개인으로서는 물론 생명공동체, 살아 있는 것들의 공동체, 혹은 지구공동체로서의 우리 하나하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적은 내부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파악되지도 않을 뿐더러 제대로 대적되지도 않는다.

예컨대 종교적인 믿음들이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가운데 지구에 대해서 파괴적인 행위를 촉발시킬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의 충격적인 현상으로 체험될 밖에 없을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세게와는 다른 세계 차원의 실재로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자신들의 신앙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의라든가 지구의 파괴와 같은 문제들에 의해 도전받도록 하지를 않는다.

우선 지난 40여년동안 역시 1세계가 앞장서 3세계를 통헤 남용되는 각종 화학비료나 살충제,살균제,제초제 같은 화학약품들이 장기간에 걸쳐 미치는 유해작용들에 관한 포괄적인 지식도 없이 자연이 정교하게 이루고 있는 균형을 함부로 깨뜨리며 지구를 중증으로 중독시켜 왔다.

산업 오염으로서의 산성비는 급격히 증가한 자동차의 배기가스와 함께 우리가 숨쉬는 공기이며 물을 오염시키고 삼림과 토양에 파국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00년전의 지구] [가이아] 우리가 미처 상상 못할 만큼 상실될 수도 있는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는 자원을 지닌 행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땅과 공기와 물을 더럽히고 우리의 수목과 광물등의 자연 자원들을 낭비한다면, 만일 광범위하고 확고한 보존 조치및 오염 방지책들과 더불어 철저하게 지구를 돌볼 어떤 단호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들에게 닥칠 재난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인류는 현대의 산업과정들을 통하여 스스로 회복할 있는 지구의 생명체계를 망쳐왔다. 산업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지구가 갖고 있는 특색과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고 그대신에 황량한 지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는 확실히 소수의 보다 나은 삶을 보장키 위해 모든 생명체들이 때부터 갖는 권리를 온통 내동댕이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세계의 기후마저 영향을 미치는 공기 오염과 오존층의 파괴, 물의 오염, 상수도의 수질 악화, 먹거리에 대한 걱정과 엄청난 쓰레기의 처리, 토양침식으로 인한 표토층의 심각한 상실로 인한 땅의 볼모지화 현상, 벌목으로 인한 삼림과 열대우림의 파괴와 여러 종들의 멸종등등 그야말로 나사못 하나 빠져 나간 시작된 자연파괴가 마치 수천 수만개의 나사못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비행기를 보는 두려움을 갖게 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핵과 핵폐기물로 인한오염까지라니...

진정 지구는 유한한 뿐만 아니라 쉽게 상처받을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명심해야 한다.

이와같은 파괴로부터 야기되는 빈곤화는 우리들의 인간다움을 위축시키며 척박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생명공동체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류공동체가 이렇게 단견적이 되어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가?

여러 전문가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지구가 직면해 있는 대규모적인 도전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실패한 까닭에 토마스 베리 수사는 [새로운 이야기]라는 소책자에서 현대 우리의 불안과 방향감 상실은 대부분 현대 서구 사람들이 의미로운 정체감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설파한다.

현대의 서구인들에게 있는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야기들은 전혀 지구를 도외시하고 있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그리고 때로는 무익하고 매우 파괴적이기까지 지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베리 수사에 의하면 중세후반기까지는 주로 신플라톤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하여 해석된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 기초를 우주발생론이 있었다. 이야기의 일관성은 14,5세기의 흑사병의 창궐과 16세기 천동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흔들리게 되었고 1663년의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과 단죄이래 과학과 종교는 서로 갈려 다른 길을 걷게 되면서 종교계는 문화적 관련사들을 벗어나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으로 서구 교회는 완전히 갈라져 스콜라학파의 전통적인 자연신학을 거부하면서 구원의 우수성과 은총의 질서만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다.

후에 자유주의 전통을 따르는 신자들을 비롯한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계몽사조와 당대에 떠오르기 시작한 과학적 학문들과의 대화에 뛰어 들었을 카톨릭과 복음주위 계열의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이를 일종의 배신으로 보았고 당대에 떠오르는 우주 발생론적 통찰들을 토대로 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축하려는 일체의 시도로 부터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결국 이후 18,9세기 동안 대두된 우주적,행성적,지질학적,생물학적 발견들에 대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할 없게 되었으며 다윈, 칸트에서 베이컨,뉴톤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영의 차원들을 분리시키는 기계론적인 우주관의 결과로 과학의 만능시대를 이루었지만 결국에는 핵무기들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파괴할 수도 있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산업공해는 공기와 물과 땅을 파괴하고 있고,엄청난 다수의 인류가 빈곤 상태에서 점증하는 억압과 불평등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존로크, 아담스미스를 넘어 1880년경부터 미국에 석유 화학과 전기 사업이 대두되었고 아울러 유수의 과학기술 교육기관이 세워져 여기를 졸업한 사람들이 자연 세계를 바꿔놓고 댐과 다리.제철공장,화학제품 공장설비,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치명적인 무기 제조 공장을 짓는 참여해 왔다.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은 높아졌으나 기계들로 야기되는 소외로 말미암아 노동자는 생산과정의 개체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대대적인 선전을 통한 광고술의 발달은 소비자를 현혹시켜 수요를 창출한다.

상품선전은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만들며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소유하는 것에 의해서 가치 평가를 받게 된다.

주로 과학기술을 이끌어들임으로써 야기되어온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변화들은 지구에 대해서도 숱하게 상처를 남겨 놓는다.

물론 누구도 기업의 과학기술이 의식적으로 행성을 약탈하고 해독을 끼치기 위해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들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예컨대 화학제품 사업은 자체를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수혜자로 보고 있다. 원자력 발전 사업은 스스로를 산업체와 가정에 전력을 공급하는 시설들의 선두에 위치한다고, 무기 제조 산업조차도 자체를 인류공동체의 평화제조기라고 선언하고 있다.

아마도 십중팔구 현대 세계의 주요 산업 하나하나가 스스로를 평화와 기쁨, 행복, 쾌락과 평화가 가득한 시대를 선도한다고 보고 있을 것이고 때로는 종종 다른 관련자들에 의해 그렇게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구는 눈부신 외모 뒤에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겨 놓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있다.

정말이지 지구의 출현에 관한 어떤 새로운 이야기내지 신화가 있어야 한다.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이야기진술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과학계로부터 차츰차츰 대두되었으나, 과학계와 대다수 종교인들간의 뿌리 깊은 반감과 오해로 말미암아, 여기에는 영적인 이해를 결하고 있다.

사제이자 고생물학자인 떼야르 샤르댕은 우주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완성되게 진술하는 데는 우주세계의 정신적인 차원이 내포되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인간의 정신도 포함해서 인간의 모든 측면은 산과 ,동물과 그리고 지구공동체의 다른 구성체들이 그렇듯이 지극히 지구의 일부를 이룬다.

떼야르는 처음부터 영적차원에 집중하고 끊임없이 이런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고전적인 뉴톤의 과학전통의 상당부분을 밑밭쳐온 이원론적이고 물질론적인 접근방법을 극복한다.

새로운 이야기의 일련의 흐름을 살펴보기에 앞서, 떼야르는 통찰하기를 서구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영적전통에 있어서 강조점의 중요한 전이를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세시대 이래 특히 종교개혁이후로 서구의 신학적 전통에 있어서 상당부분이 아우구스티누스계열의 신학에 닿을 있는 타락, 구속신학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신학적 전통에는 합당한 창조신학이 전혀 수용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이 나타났던 200억년이 단지 인간 구원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로, 혹은 자체로 철저하게 죄스러운 것으로 변모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다.

떼야르가 종교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공헌은 창조계에 관한 시대의 이해를 포용하기 위해서 균형점을 이동시켜 놓은 데에 있다.

그는 바울과 요한의 주제인 우주적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새롭게 발생하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의 견지에서 해석해 나간다. 그는 20세기의 종교는 우주적 진화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이해에 입각해서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떼야르는 이런 맥락속에서 과학자들에 의해 진술된 이야기에다가 성스럽고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 우주이야기, 지구, 인간존재들의 출현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다.

2 새로운 신학에의 부름

인간을 지구 공동체안에 다시 이끌어들이고 안에 자리잡게 하는 노력은 그리스도교 신앙내지 신학에 바탕해 있는 체험에 관한 체계적인 성찰에 가닿게 한다.

심각한 생태학적 황폐화가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종교적 신앙체계들의 경우 이와 관련하여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나 카톨릭교회는 생태학적 위기에 대하여 입을 다물어 왔다.

교회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지나치게 다른 문제들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창조의 신비는 밀어 놓고 신학자들은 전적으로 인간 역사에 촛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세계에 대한 성찰을 일체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겨 놓았다.

창조 중심의 신학으로부터의 일탈은 나아가, 사도신경에 몸의 부활을 천명하는 신앙고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이해는 자연의 세계를 거부한 , 오히려 자연적인 세계로부터 사람들의 영혼만을 구속하는 것에 집중하는 영적 선호로 말미암아 창세기, 2이사야, 시편과 지혜문학에 담겨 있는 풍부한 창조 전승이 잊혀져 버리게 것이다.

겨우 지난 30년동안 주로 떼야르의 여러 저작이 가해온 자극에 힘입어서 다시금 신학자들이 새로운 창조신학을 추구하고 발견해 내기 시작한 이들은 현재 과학자들과 다른 종교 전통들 그리고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층부와의 창조적인 대화에서 영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우선 지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음으로, 여러 많은 부족 사회들에 있어서의 없는 것들에 대한 - 신적인 존재는 보통 우주와 지구와 자연 현상들 속에 충만하게 퍼져있는 영적인 현존으로 나무와 바위, , , 화산들 - 접근 태도와 제의를 성서적 전통과 함께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느님에 있어서의 성의 문제를 직시해 수십세기에 걸쳐 여자들을 억압하고 남자들을 야만스럽게 만들어 언어와 정신 상태가 자연세계를 지배하고 복종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약탈하려는 남성의 노력과 공조체제를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여성인권운동과 생태계보존운동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전통을 깊이 숙고해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새롭고도 창조적인 인간-지구 관계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구축하고자 도모되었던 전세계 차원의 생태계 운동의 탄생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며, 창조계에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그리스도로 육화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이 200억년이 지난 지금에도 창조계를 이끌고 계심을 믿으며 하나님을 체험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자연세계로부터 물러나야할 이유가 없음을 안다.

창세기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다스리라는 본문은 확실이 성서의 인간-지구 관계를 형성하는 관건이 되는 본문으로 인간들이 지구에 대해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좋다는 허가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매우 좋다고 체험하셨던 지구를 착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명위임은 인간 존재들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들의 부왕(副王)들로서 행위하라는 초대로 이해할 우리는 그저 정의롭고 정직한 청지기로 관리자인 것이다.

홍수 이후에 창세 1:28 명령이 다시 언급되면서 인간 존재들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계와 더불어 계약이 맺어지는 것을 주목하라( 9:12).

확실히 살아 있는 것들 모두의 공동체가 촛점이다.

죄와 구속과 구원은 성서의 관점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들이지만, 근래 몇세기동안 전개된 신학과 영성에서 너무도 흔히 그래왔던 것처럼 창조와 무관하지도, 그렇다고 창조에 우선하지도 않았다.

성서에 나타나는 죄는 인간들끼리나 인간-신의 관게를 왜소시키는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들과 지구간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조화로운 관계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완성되어야할 구속은 반드시 처음의 일치를 치유하고 쇄신하고, 인간의 탐욕과 악행으로 말미암아 상처받았던 지구의 모든 것을 되살려 내지 않으면 안된다.

구속은 이제 개인들이 개인적, 사회 공동체는 모든 창조계를 포괄한다( 8:19-23).

우리의 시대에 구원론을 창조적으로 개진하고자하는 의욕적인 도전은 인간 존재들의 지속적인 구속을, 개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역시 지구의 구속과 어떻게 연결지을 것인가하는 과제를 풀어나간다.

베네딕도와 그의 형제들의 지구 돌보기는 땅을 돌보며 일과 기도를 결합시킨 청지기적 자세에서 비롯되었으나 출발은 언제나 인간적 관점으로서 결국 베네딕도수도원공동체들은 땅을 점점불려나갔고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중심체로 영주처럼 보였고 처신했다.

프란치스코의 창조물에 대한 접근 방법 배후에는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거나 변혁하고자하는 어떤 의지도 숨어 있지 않다. 오히려 선물로서의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경탄과 찬양을 감지할 뿐이다. 치유하고 화해시키고 창조하는 프란치스코는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이다.

힐데가르트의 지구에 대한 접근 방법은 지구의 녹색화이다.

그녀는 거룩한 인물들은 지상적인 일체를 끌어들인다면서 자연세계는 인간들이 피해야하거나 순치시키기 위해서 싸움을 벌여야 카오스내지 황야가 아니라 기쁨과 경탄과 찬양과 경외 특히 사랑을 불러 일으켜 준다고 한다.

그러나 어두운면도 있다.

현대과학과 과학기술이 그리스도교 문화속에서 발생하였다는 소지로 지구의 파괴에 적극적 일조를 했다는 면에서 그리스도교는 책임을 느끼지 않을 없다.

화이트는 서구인들이 자연에 대해서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고 자연을 경멸하며 우리의 사소하기 이를 없는 기분풀이를 위해 자연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든다고까지 지적한다.

그와 같은 관념의 하나가 진보내지 발달과 발전개념으로 천년왕국을 향한 충동으로 가열된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은, 서양의 의식속에서 오랜 역사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관념이 실재에 세계에 미친 영향이 착취적이고 파괴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들에 의해 흡수되어 저질화되어 버린 오늘날의 무절제한 광고영역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천년왕국과 관련된 신화들을 세속화한 이해들이 실재로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섕태계의 저락을 야기시키고 있는 파괴적인 충동성을 밑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명백하게 감지할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창조신학은 반드시 합당한 우주 발생론과 성서의 계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토대를 두어야 함은 자명하되 우리의 신학은 수많은 위대한 종교들의 지혜와 통찰들, 그리고 특히 전통적인 타종교들과의 창조적인 대화에서 얻게될 지혜와 통찰들을 통해서 훨씬 풍부하게 된다.

나아가서 문화의 진화과정의 있어서의 부족시대 단계의 전래적인 종교적인 체험에서도 역시 유익한 통찰들을 풍부하게 얻을 있을 것이다.

점증하는 생태학적 도전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우리시대의 핵심적인 문제에 적합하게 응답하기 위해서 전력하는 가운데 과학계의 전통속에 전승되어 오는 지혜와 다른 종교들의 창조적인 시각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도록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땅과 불의 전례나 세례, 성찬, 화해, 혼인과 가족, 특히 인구문제등이 삶의 성사에 적용되여야 한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단지 성사들이 오늘 시대의 우리의 세계가 직면해 있는 생태계의 위기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열망에 응답할 있는 어떤 기회를 제공한다는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폭넓게 확산되어 있는 자연세계에 대한 파괴로 말미암아 지구-땅이 본원적으로 갖고 있던 상징적 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역시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측면은 특히 인구문제와 결부되면서 심각한 도덕적,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기꺼이 용서하는 것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강점들중 하나이다.

사람은 얼마든지 어떤 악을 범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해 수가 있다.

하지만 일단 지구의 구조가 파괴되고 나면 설령 범죄자가 용서된다고 하더라도 행성의 조화로운 상태가 복구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 않을 없다.

사람의 경우 핵폐기물을 누출시키는 대해서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고 일체의 핵발전소들을 폐쇄시키고자 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미 초래된 손상은 무정하게도 수천년간 지속될 것이다.

생물 파괴나 핵으로 인한 대재앙이 그럼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진정 우리의 현대를 위한 영성은 이전 시대들의 통찰과 기도, 제의와 신화와 상징, 그리고 신심 행위들에 입각해서만 구축될 없다.

책의 주제는 어떤 진정한 영성이 오늘 시대에 도달해 있는 지구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우리 시대의 도전에 대한 자각으로 부터 발생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진정한 영성은 전통에 입각하여 도출되어 나온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재검토해봄으로써 때때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었건 그렇지 않은 이들 이었간에 우리 선조들의 통찰과 관행들을, 그리고 그들 자신은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과거에 보인 통찰과 관행들의 지극히 심오한 의미를 재발견해낼 수가 있다.

문화 육화로서의 토착화와 해방 그리고 신앙간의 대화는 확실히 오늘날의 세계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열망들에 대한 응답이다.

현재 세게적으로 민족들 사이에서 진정한 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시도가 넓게 확산되고 있다.

그리곤 참으로 중요한 것이 지구돌보기이다. 이런 점들에서 보다 역활을 감당할 있는 사람들이 문화 속에서 사는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서구의 소비문화가 지구공동체의 구조를 손상시키고 있다는 점을 안다. 어쩌면 미래의 역사가가 20세기 후반의 선교운동이 세계 도처의 그리스도인들과 종교인들에게 지구를 돌보도록 고취시켰다고 말할 있다면 선교사의 기여 이보다 깊은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생명을 택한다면 200억년에 달하는 우주 이야기, 우주역사는 인간존재들이 새롭게 발생하는 흠없는 과정을 촉진시켜서 우리가 새롭고도 풍부하게 결실을 맺는 생명-영의 시대로 진입해 들어갈 있게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복음은 세계의 생명을 위한 진정한 기쁜 소식이 있을 것이다.


'好學의 神學 > [신학자들] 생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부 Origen 의 삶과 사상   (0) 2011.12.17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사상   (0) 2011.12.13
감정의 신학   (0) 2011.12.13
여성신학   (0) 2011.12.13
영성신학   (0) 201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