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감정의 신학

好學 2011. 12. 13. 21:15


 

슐라이에르마허 : 감정의 신학


 

서론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 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신학자도 없을 것이다. 그는 19세기의 교부로, 또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반면, 19세기의 대이단자로도 비판받고 있다.

특히 칼 바르트의 입장이 그러하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신학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연구가 아닌 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연구, 즉 인간학으로 전환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주도한 신정통주의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거부와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를 "영웅"으로 칭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업적은 너무 위대하여 19세기 전체가 그의 세기였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아직도 우리의 관점과 사고에서 활동한다. 그의 신학을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신학자들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들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집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슐라이에르마허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는데, 이것은 그에 대한 슐라이에르마러의 영향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라 하겠다. 시카고 대학교 역사 신학 교수 게리쉬는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린다 할지라도, 슐라이에르마허는 우리가 항상 신학적 입장을 확인해야 할 몇 안되는 기독교 사상의 거장들, 즉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의 대열에 속한다" 고 주장했다. 반면, 신정통주의자들은 슐라이에르마러가 루터와 칼빈으로 소급되는 상속선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바르트는 칼빈, 루터, 사도 바울로 이어지는 위대한 전통에 이르는 길을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듯 이중적 평가를 받고 있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고, 현대 과학과 사상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떻게 존립할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슐라이에르마허가 끊임없이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주로 그의 신학 방법론 때문이다. 그는 성경본문, 신조 및 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을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신학 방법론상의 일대 변혁이었다. 신학을 계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의 종교 의식에 대한 연구로,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필자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생애와 저술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고,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의 신학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핵심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개괄하고 그 역사적 의의와 함께 문제점도 지적하려고 한다.


 

I.신학적 배경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개혁 교회적인 가정 배경과 모라비안 경건주의에서의 교육이었다. 철학적인 면에서는 할례 대학교 재학 시절의 칸트 연구와 번역 사업을 통해 접한 플라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베를린의 자선 병원 원복 시절 젊은 지성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받은 낭만주의의 영향이라 하겠다. 이러한 요소들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1. 종교적 배경

종교적인 면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두 전통이 병행하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개혁 교회 전통과 경건주의 전통이 그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부모의 가문 모두로부터 개혁 교회, 즉 칼빈주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개혁 교회 목사 가문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 역시 개혁 교회 신앙 고백에 동의하고 개혁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일평생 개혁 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실제로 그는 칼빈주의 예정론을 변호하고 루터 교도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개혁 교회 전통에 대한 충성을 자주 고백했으며 자신이 전적으로 개혁파 출신임을 주장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의 가문에는 경건주의의 전통이 있었다. 아버지 고트리프는 개혁파 목사였으나 모라비안 경건주의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모라비안 교단은 종교 개혁의 선구자 후(J.Hus)의 감화로 15세기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생겨난 보헤미안 형제단으로부터 기원했으며, 깊은 종교적 감정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보헤미안 형제단은 17세기 30년 전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발해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다 1725년 작센(Sachsen)지방의 헤른후트(Herrnhut)에서 진젠도르프 백작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고트리프는 아내와 자녀들 역시 경건주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인도했으며, 그 결과 슐라이에르마허는 14세 때 회심을 체험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나이에 모라비안 교단 학교에서 경건 훈련을 받으년서 종교적으로 깊이 감화되었고, 외적, 내적으로 모라비안 교도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높은 서열의 모라비안 교도"였음을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 형성에 모라비안파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말해준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종교의 정서적인 면을 강조하여 종교의 본질을 감정으로 간주한 것이나 종교와 철학을 철저히 구별한 것,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주장한 것은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영향이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모라비안 경건주의를 통해 루터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라비안 교단과 루터교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라비안 교단의 전신인 보헤미안 형제단은 종교개혁 당시 루터 교회에 가입한 후 모라비아 지방에 정착하여 이루어진 것이 모라비안 교단이다.

슐라이에르마허와 루터 교회와의 또 다른 인연은 그가 할례 대학교의 루터교 신학부의 교수가 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프러시아 정부는 루터교 신학부에 개혁 교도인 슐라이에르마러를 초빙함으로써 연합의 길을 모색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가 되었을 때, 루터교 신학자들의 저서를 교재로 선택했으며, 자신의 교의학서에 개혁 교회 신학자들보다 루터 교회 신학자들을 더 자주 인용했다. 이는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확신과 이 두 개신 교단의 연합에 대한 강력한 지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요약하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으로 개혁 교회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경건주의와 그것을 통한 루터 교회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바로 이것이 그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철학적 배경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 형성의 토대가 되었던 철학 사상은 칸트와 플라톤 철학이다. 그는 모라비안 신학교 재학 시절 칸트의 저서를 읽었다. 할레 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그는 신학 과목보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이나 헬라 고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는 당시 할레 대학교의 저명한 철학 교수 에베하르트(J.A.Eberhart)교수와 고전 연구가 볼프(F.A. Wolf)교수의 영향이었다. 그는 에베하르트 교수로부터 칸트의 철학 체계 전반에 대해 배웠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을 읽고 칸트 연구에 몰두했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1789년 겨울 드로센의 아저씨 집에 체류하는 동안 집중적으로 칸트 철학을 연구했다. 그는 칸트의 영향을 받아 "종교보다 윤리학에 우위를 두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칸트쎁 윤리학적인 관점으로부터 평가했다."

칸트 철학 연구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철학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칸트의 저서들은 젊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색의 출발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슐라이에르마허는 칸트의 비판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칸트의 영향은 특히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발견된다. 그는 칸트의 철학이 계몽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의 늪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변적인 지식의 한계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 철학의 결론을 수용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에베하르트의 칸트 비판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 불멸에 대한 칸트의 도덕론적 논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칸트가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이며 철학적인 지식을 타파한 것을 받아들인 반면, 칸트가 실천 이성 및 도덕의 영역에서 종교적인 신앙의 자리를 발견한 것을 거부했다. 종교의 자리는 감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가 이성을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으로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칸트에 따르면, 순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나 영혼 불멸 및 자유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를 알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생각되어질 수 있을 뿐이지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항목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런 이원론을 수용할 수 었었다. 종교는 아는 것(knowing)과 행동하는 것(doing)의 토대요 통일체이기 때문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플라톤의 영향은 학자들에 의해 자주 간과되어 왔다. 슐라이에르마허가 플라톤의 저서를 처음 접했던 때는 할레 대학교 학생 시절이었다. 그는 에베하르트 교수의 철학사 강의를 통해 헬라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으며, 특히 플라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베를린에서 원목으로 일하면서 '종교론'을 저술할 무렵 슐레겔로부터 플라톤의 저서들을 함께 번역하자는 제의를 받은 그는 플라톤 저서에 대한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슐레겔의 태만으로 슐라이에르마허 단독으로 번역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스톨프에서 목회하는 동안과 1804년 할레 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1804년 그의 플라톤 번역집 1권이 출판되었으며 1828년까지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3개을 제외한 모두를 소개, 번역, 주해했다. 그러나 그는 '티마에우스(Timaeus), '크리티아스'(Critias), '법률'에 대한 번역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플라톤 저서의 번역으로 당대의 가장 훌륭한 고전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의 플라톤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왜냐하면 신플라톤 학파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플라톤 사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플라톤 연구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기계론적인 윤리관을 거부하고 결정론적 윤리관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낭만주의와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를 극복했다.

3. 사상적 배경

젊은 슐라이에르마허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상 가운데 하나가 낭만주의이다. 그는 베를린의 자선 병원 원목 시절 도오나 백장의 소개로 낭만파 모임에 가담했다. 여기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한 낭만파 지성인들과 사귀게 되었고, 이 모임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낭만주의는 18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강요된 것보다 자발적인 것을, 냉랭한 합리성 보다 경험과 감정을,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이며 상상적인 것"을 강조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낭만주의자인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낭만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피상적이며 무비판적인 심미주의"나 "지적인 정확성과 완전성을 결여한 공허한 종교성"을 의미한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결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삶과 신앙에 대한 그런 접근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반면 낭만주의가 냉랭하고 분석적인 이성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상상력과 직관에 의해 현상 배후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는 낭만파 모임의 정회원이었으며 낭만주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문화세계에서 살았다. 그러나 거기에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낭만파 친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종교론' '독백론' '크리스마스 이브' 등과 같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낭만주의 사상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는 낭만주의로부터 시와 예술에 대한 이해을 배웠으며 자신의 해석학과 플라톤 해석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얻었다. 한편 낭만파 친구들에게 종교가 "예술에 대한 감흥"이 아님을 확신시킨 것은 낭만주의 발전에 대한 그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18세기 계몽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의 초자연적 교리를 거부했던 낭만주의자들에게 공감하여 그들과 결합하였으나. 신학과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낭만주의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했다.

II. 감정의 신학

오늘날 현대 신학이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깊은 통찰력과 혁명적인 방법론이 그를 현대 종교 사상과 신학 사상의 창건자로 만들었다. 후대의 학자들이 다루는 주제가 그에게 힘입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의 관심 영역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현대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가 무엇이건 그들 앞에 슐라이에르마허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슐라이에르마허가 지속적으로 후대 신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필자는 그의 주요 사상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1. 신학 방법론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현대 사상은 18세기 유럽 지성계를 지배했다. 이것은 세속적이며 과학적이며 낙관적인 세계관을 형성했으며 과학적 경험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으로 대두되었다. 이는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가치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의 모든 전제들을 문제시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나 신학은 이런 도전에 의해 무력해지고 고립되어 그 토대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19세기 초의 신학적인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활기 랣고 창조적인 미래를 위한 신학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즉 현대 세계에서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슐라이에르마허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정신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knowing), 행동하는 것(doing), 느끼는 것(feeling)이 그것이다. 감정은 지식이나 행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며 독특한 정신 기능인 동시에 보다 심원한 존재의 단계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감정을 종교가 발견되는 장소로 보았다. 그가 '종교론'에서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 또는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한 것이나 '신앙론'에서 종교를 느끼는 것 또는 직접적인 자기 의식의 수식으로 종교의 본질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감정"으로 정의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관은 종교연구의 새로운 길과 방향을 제시했다.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종교인의 신앙과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 자신, 즉 그의 종교적인 감정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종교연구에 있어서 코페프니쿠스적인 변화였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조나 교의 또는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혹은 기독교인의 자기 의식을 신학의 토대로 간주했다. 그는 교리적인 신조 배후에 있는 살아 있는 경험으로 돌아감으로써 신학의 새로운 토대를 확립하려 했다.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다. 신학은 사변학이 아니라 기술학이기 때문이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을 과거의 도식의 단순한 반복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대 세계와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교의 신학은 주어진 시대의 기독교회에서 널리 유행하는 교리를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상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재진술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경헙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에 새로운 활기와 관심을 불어넣었다. 또한 인간 감정에 나타난 자기 의식과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변적인 철학으로부터 신앙과 신학의 독립을 확립했다.


 

2. 그리스도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인 통찰의 중심을 이룬 문제는 그리스도론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가 이룩한 구원에 관련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 특징이다. 학자들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더불어 그리스도론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그의 그리스도론은 "교회적인 그리스도를 현대 정신에 수용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론이 슐라이에르마허 신학의 문제 거리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인 경험, 즉 자아 의식에서 추론된 것으로 비역사적인 가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지적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의 특징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그의 그리스도론은 역사적인 계시보다는 기독교인의 경험, 또는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조명하에 기독교인의 경험을 해석하고 명료화하고 재건함으로써 그의 신학 전체가 형성되고 있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를 원형적인 인간으로 이해했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육신보다 오히려 원형적인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래적인 인간의 원형 또는 이상으로 간주했다. 원형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의식의 절대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 의식을 소유했다. 하나님 의식의 완전한 원형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셋째,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의 기초로서 요한복음을 일방적으로 선호했다. 그것이 공관복음보다 오래되었고 목격자의 눈으로 기록되었으며 예수의 의식이 진정으로 반영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넷째,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용어나 성서적인 용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스도의 양성의 교리를 거부하고, 신성이란 표현 대신 그리스도의 신의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교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연적인 탄생을 주장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그리스도가 19세기와 20세기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그의 그리스도론은 예수를 인간학적인 지평 속으로 끌여들였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최초로 공개 강의함으로써 이 주제의 역사적, 신학적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일으켰다. 특히 19세기에 예수의 생애 연구가 성행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은 몇 가지 면에서 전통적인 견해와 입장을 달리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성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과 행위는 신성에 그리고 다른 것은 인성에 돌리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둘째, 그리스도의 양성이 서로 교류한다로 믿는 교류 교리를 거부했다. 이 교리가 두 본성의 결합을 폐기하며 본성의 상실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신성에 대한 거짓 교리에 의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출생에서 남성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신약 성서의 기록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및 재림을 그리스도론의 적절한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 속죄론

속죄론은 기독교 복음의 중심 교리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해명되어 왔다. 교부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상금의 지불로 간주하는 교부 속상살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중세 시대에는 안셀름의 만족설로 대변되는 속죄의 객관적인 견해와 아벨라드의 도덕 감화설로 대변되는 주관주의적인 견해가 대립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안셀름의 만족설을 수정 보완한 루터와 칼빈의 징벌 대속설이 제시되어 개신교 속죄론의 근간이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았고고 보는 징벌 대속설과 대신 벌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켰다고 보는 만족설과 같은 전통적인 견해을 거부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속죄는 하나님 의식이 자기 의식 안에 출현하여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은 완전한 하나님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가 신자에게 자신의 하나님 의식을 나눠 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 능력이 그의 특정한 행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 속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본질을 고난이 아닌 강력한 하나님 의식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속죄론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의 전생애를 통해 일어났음을 강조했다. 그의 구속 능력은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특정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 즉 하나님 의속 속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새로운 공동 생활의 건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하나님 의식의 능력을 통해 죄의 공동 생활에 대치되는 새로운 공동생활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 사역의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에 부수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을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희생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고난이 죄의 징벌을 폐기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일관되게 거부했다.

넷째, 그의 속죄론은 주관주의적이며 인간 중심적이다. 그는 속죄를 하나님 의식에 뒤따르는 축복의 감각 또는 종교 의식의 변화로 간주했다. 그런 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주관주의적 속죄론의 중요 대표자가 되었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 속죄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속죄론은 인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의의를 약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절대적인 하나님 의식의 능력을 통해 신자 안에 하나님 의식을 일어나게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의식에 근접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4. 죄론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경험, 사회적 환경, 이성에 대한 확신, 예수의 인간성, 관용적 종교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특히 낙관주의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타락과 원죄 교리를 거부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악을 인간의 삶에 장애물을 일으키는 것들로 간주하였다. 이를 다시 자연적인 악과 사회적 또는 도덕적인 악이라는 두 종류로 분류했다. 전자는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며, 후자는 인간의 행위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모든 악은 죄에 대한 벌로 간주될 수 있다. 사회적인 악이 직접적인 것이라면, 자연적인 악은 간접적이다. 따라서 죄와 악은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성서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의 종교적 의식, 즉 내적 경험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죄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하나님 의식에서 나타나는 반대물이나 장애물을 죄로 정의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고 인간의 영육 간의 갈등과 대립이다. "우리는 하나님 의식이... 우리의 자기 의식을 고통으로 결정할 때마다 죄 의식을 가진다. 그러므로 죄는 영에 대한 육의 대항이다." 육과 영의 대립은 인간 안에 쾌락과 혐오감을 일어나게 하는 것과 하나님 의식을 일어나게 하는 것 사이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립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을 자각하는 데 방해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죄를 하나님 의식의 무질서와 무력으로 규정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와 악의 근원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에 비판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며 죄의 원인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남용이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견해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죄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양자 택일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신적인 인과율(causality)과 인간의 자유라는 양자 사이에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 하나를 수용하고 다른 하나를 거부함으로써 그 긴장 관계를 해소하려고 한다면, 페라기우스나 마니교같은 이단적 견해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의 근원을 하나님 또는 인간이나 악마로 간주하거나 죄를 단디 무(無) 또는 단순한 결핍으로 보는 일방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신적인 인과율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죄가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존재 밖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한다."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인과율에 근거한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나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행위가 죄라면,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일 수 없다. 죄의 상태에서도 인간은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구속의 관계성이라는 조건하에서 하나님을 죄와 악의 창시자로 보았을 뿐이다. "죄는 하나님에 의해 명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속 또한 하나님에 의해 명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을 구속의 창시자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죄의 창시자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은총은 하나님의 선물인 반면, 죄는 인간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죄를 짖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할 때, 하나님에게호 향하게 된다. 죄 의식 없이는 결코 은총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은총과 병행하여 죄의 존재를 규정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구속의 필요성을 의식하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죄와 악에 대한 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죄 의식은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죄와 악은 그 자체에서 혹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디 구속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죄를 존재하게 하는 신적인 인과율은 무엇인가? 하나님 의식의 무력상태인 죄를 일으키는 신적인 활동은 무엇인가?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명령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이 하나님 의식의 무질서를 우리에게 죄의 원인이 되게 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이 의지를 통해 일어난다. 죄를 포함하여 세계를 창조한 것과 나사렛 예수를 구속의 선포자로 정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시작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슐라이에르마허는 전통 신학과는 다른 죄관을 제시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나 불충성,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는 행위 심지어 사탄에 속박당하는 것도 되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죄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혼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죄 의식을 무력한 신 의식과 동일시했다. 이 무력한 신 의식을 인간에게 죄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적이며 효력 있는 의지이다. 따라서 죄의 원인을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서 찾은 것이 슐라이에르마허 죄관의 특징이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개념이 슐라이에르마허 죄론의 핵심이다.


 

결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네안더(Johann Neander)는 스승 슐라이에르마허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그 사람이 운명하셨다." 이 예언은 적중했다. 오늘남 현대 신학이 슐라이에르마허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타드 니이버(Richard R. Niebuhr)에 따르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19세기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세기였다. 프랑스 혁명과 칸트로부터 시작하여 트뢸취, 하르낙 및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전개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사상의 발전을 설명하다 보면, 그런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학파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태동하게 했던 소수의 신학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개신교의 신학적 통찰을 요약하고 기독교 사상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슐라이에르마허 없이 19세기와 20세기 신학을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에 비판적인 신학자들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문제삼고, 그것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런 신학사적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신학 사상의 결정적인 약점은 무엇인가?

슐라이에르마허의 오류로 흔히 세 가지가 지적된다. 범신론, 주관주의 및 불가치론이 그것이다. 특히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소위 그의 범신론이다. 그는 '종교론' 출판 이후 끊임없이 범신론 혐의를 받아 왔다. 당시 사람들은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그를 범신론자로 간주했다. 사실상, 범신론적 경향이 '종교론' 초판이나 '신앙론' 초판에서 발견된다. 이로 인해 슐라이에르마허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그 자신 만년에 가서 초기의 입장을 상당히 수정하게 되었다.

'신앙론' 2판에서 절대 의존 개념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했다. 절대 의존 감정은 세계에 대한 의존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존 감정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수정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적지 않은 후대 학자들로부터 범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가 범신론 혐의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인격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점은 그의 심리적 주관주의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종교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종교적인 경험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따라서 그는 신학은 종교적인 감정에 대한 설명이며, 하나님은 단디 신자의 경험에서만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토대와 기본적인 전제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객관적인 계시를 등한시하고 주관주의적인 경험을 중시한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는 신학의 객관적인 토대를 거부하는 한편,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포기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불가지론자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론'에서 우주를 종교의 대상으로 간주했으나 그 본질을 체계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우주 자체를 탐구하는 것은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가지론적 경향은 '신앙론'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단지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는 의식 속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을 감정에 의해 감지할 뿐이며,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슐랑이에르마허의 이런 입장은 일종의 불가지론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인 영역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을 보인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현대 신학이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 방법론상의 오류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성경, 신조 및 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 달리,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과 현실 상황을 신학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계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연구로 신학을 전락시켰다. 따라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그가 도달했던 결론이 아니라 그가 택했던 방향에 의해서 그리고 제시한 대답이 아니라 그가 제기한 문제에 의해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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