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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4 장 학자들에 의해서 오해되는 기독교 2

好學 2011. 10. 15. 23:02

 

제 4 장  학자들에 의해서 오해되는 기독교 2

 

 

이상의 필수 조건들을 포기하는 것은 완성의 가능성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이상 자체를 끝장내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힘을 가지고 있는 그 이상은 누군가에 의해서 고안된 이상이 아니라 각자의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에 지니고 다니는 이상이다. 오직 이렇게 완전하며 무한한 완성의 이상만이 사람들에게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자극한다. 적절한 완성은 사람들의 가슴에 영향을 주는 힘을 상실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것이 절대적인 완성-다시 말하면, 제각기 사람들의 영혼에 존재하는 신적인 본성과 하나님의 뜻의 융합-아들과 아버지의 연합-을 요구할 때 오직 힘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은, 오직 이렇게 각각의 사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동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그를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데려감에 있다.

 

사람의 동물적인 존재만이 사람의 삶을 구성하지 않는다. 삶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면, 또한 사람의 삶이 아니다. 사람의 삶은 동물적인 삶과 신적인 삶의 조합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합이 신적인 삶에 접근하면 할 수록, 그 안에는 더 나은 삶이 있게된다.

 

기독교에 의하면, 삶은 신적인 완성으로의 전진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어떤 한가지 상태도, 다른 것보다 높거나 낮지 않다. 각각의 상태는, 이 교리에 따르면, 도달할 수 없는 완성을 향한 길위에 있는 오직 특정한 단계로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는 더욱 크거나 더욱 작은 정도의 삶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삶의 향상은 오직 완성을 향한 전진을 빠르게 함에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세리 삭개오의, 죄를 지은 여자의,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의 완성을 향한 전진은, 바리새인의 정체된 의로움보다 더 높은 정도의 삶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종교에 있어서는복종해야할 의무가 있는 명령들이 있을 수 없다. 낮은 단계에 있더라도 완성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는 사람은, 완성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지 않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에 있는 사람보다, 더욱 도덕적이며, 나은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많이 이행하고 있다 .

 

잃어 버린 양이 잃어 버리지 않은 양들 보다도 아버지에게는 더욱 소중함은 이런 의미에서다. 탕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몇푼을 다시 찾은 이야기, 등은 잃어 버리지 않은 것들 보다 소중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천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서 하나님께로 감에 있다. 가르침에 대한 이런 실천은 정해진 법률이나 명령이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모든 완성의 정도와 모든 불완성의 정도는 그 안에서 동등하다; 법률에 복종하지 않음이 이 교리의 실천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그것에 있어서는 아무런 구속력이 있는 명령들과 법률들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종교와 삶의 국가적 개념에 기초한 모든 이전의 종교들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구별로부터, 국가 이론의 특수한 가르침들과 기독교의 가르침들에서 상응하는 차이가 따른다. 삶의 국가적 이론의 가르침은 대체적으로 특정한 실용적으로 규정된 행위들을 고집하며, 그것으로서 사람들은 정당화되며 옳음을 확신한다. 기독교의 가르침들은 (사랑의 계명은 단어의 엄격한 의미상으로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 그 자체의 표현이다) 산상 수훈-성격상 모두 부정적이다-의 다섯가지 계명들이다. 그것들은 오직 인류의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다섯가지 계명들은, 말하자면, 완성을 향한 끝없는 길에서 이정표이다, 인류는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인류의 특정한 발전의 시기에 가능한 완성 지점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산상 수훈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도 애쓰고 있는 영원한 이상, 그리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 달성하고자 하는 정도를 표현하였다.

 

이상은 누구를 해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며, 나쁜 뜻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악한 말의 금지로서, 우리가 이런 이상의 달성에 들어갈 수 없는 낮은 수준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이 첫번째 계명이다.

 

이상은 완전한 순수함이며, 심지어 생각에서도 그렇다. 그 가르침은 결혼 생활의 순결, 방탕함의 금지로서, 우리가 이런 이상의 달성에 들어 갈 수 없는 낮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것이 두번째 계명이다.

 

이상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갖지 말것이며, 현재 순간에 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맹세함, 미래의 어떤 것을 약속함의 금지로서,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낮은 수준을 보여 준다. 그것이 세번째 계명이다.

 

이상은 결코 의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부당하더라도, 옷을 벗어 주면서라도 참으라는 것으로서,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아래의 수준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수준의 아래이다. 그것이 네번째 계명이다.

 

이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우리의 원수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그들을 좋게 말하며, 그리고 그들과 우리 이웃들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으로서, 우리가 들어가서는 안돼는 아래 수준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가르침들은, 우리의 완성을 향한 여행에서, 우리가 이미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제 우리가 반드시 달성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점진적으로 본능적이며 무의식적인 습관들로서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들의 표시들이다. 그러나 이들 가르침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전체를 구성하기보다는, 단순히 완성을 향한 길위에 있는 단계들이다. 이 가르침들은 종교에 의하여 견지되는 완성의 길 위에서 점점 더 높은 가르침들이 반드시 따라주어야 하며, 따라 줄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가르침들에서 표현된 것들보다더 높은 요구들을 하는 것이; 그리고 마치 사회적 관점의 삶으로부터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이상 그자체 또는 가르침들의 요구들을 결코 낮추지 않는 것이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와 목적에 관련한 과학자들의 한가지 오해는 그런 정도였다. 똑같은 출처에서 생겨나는 또 하나의 오해는 하나님과 그를 위한 봉사에 대한 기독교적인 사랑의 원리 대신에, 사람들의 사랑, 인류에 대한 봉사로 대체함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오직 그러한 사랑의 결과로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은 과학자들에게는 모호하고, 신비스러우며, 그리고 막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의무를 배제할 것이며, 이는 사람들을 위한, 인류만을 위한 사랑의 교리가 훨씬더 명료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그리고 합리적이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론에서 유일하게 선하고 이성적인 삶은 전체 인류에 대한 봉사에 바쳐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런 의미로 축소한다. 그들은, 두 개의 교리가 실제로 같다는 가정하에서, 복음서에서 그들의 교리에 대한 확증을 찾는다.

 

이 개념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실증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형제지간이라고 하는 일반적 이점에 입각한, 인류의 사해 동포 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것들은 기독교가 사람의 영혼이라는 확고하며 명백한 기초를 가지고 있음에서 특별히 서로가 다르며, 반면에 인류에 대한 사랑은 단지 유추에 의한 이론적인 추론일 뿐이다.

 

인류에 대한 사랑의 교리만이 삶의 사회적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삶의 사회적 개념의 본질은 개인의 삶의 목적을 개인들의 사회의 삶으로 양도함에 있다: 가족, 씨족, 부족, 또는 국가. 이런 양도는 그 초기 형태들에서, 개인의 삶의 목적을 가족 및 씨족으로 양도함에 있어서, 쉽게 자연적으로 이루어 진다. 부족이나 민족으로의 양도는 더 어려우며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감정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은 그 과정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한계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렇게 행함에 있어서 어떤 격려도 필요하지 않다. 자신을 지지해주며 보호해주는 씨족을 사랑하는 것, 자신의 아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쁨과 도움, 자신의 자녀들, 자신의 삶의 희망과 위안, 그리고 자신에게 생명과 교육을 준 자신의 부모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비록 자신을 사랑함보다 결코 강하지 않지만, 너무나 자주 만날 수 있다.

 

개인적인 만족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부족,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비록 그렇게 당연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하다. 자기 자신과 같은 피, 같은 언어, 그리고 같은 종교를 가진 자기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비록 자신에 대한, 또는 심지어 가족이나 씨족을 사랑함 보다는 결코 강하지 않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사랑, 예를 들면, 터어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또는 러시아 같은 국가에 대한 사랑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열심히 주입시켜 주지만, 그것을 오로지 상상속의 감정이다; 그것은 현실에는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에서 사람이 그의 관심을 전이하는 힘은 중단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가공의 존재에 대하여 아무런 직접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들, 그리고 과학적 원리들에 대한 형제애의 모든 사도들은, 그 대상의 확장에 비례하여 감정이 약화됨을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방향으로 이론에 대한 추론을 넓혀 나간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을, 가족, 부족, 그리고 결국 민족과 국가로 넓혀 나가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회들에 대한 그이 관심을 전 인류에게 넓히는 것은 더욱 유익하며, 그리고 사람들이 가족이나 국가를 위해서 사는 것처럼 모두가 인류를 위해서 사는 것 또한 유익하다.”

 

사실, 이론적으로 개인의 사랑과 관심을 가족, 부족, 그리고 나서 민족과 국가로 확대함이 뒤따르며, 그들의 사랑을 전체 인류에게로 넓혀서, 사람들이 민족들과 국가들로 분할되어 초래되는 전쟁 및 재앙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는 것은 완벽하게 논리적일 것이다. 이것은 가장 논리적이며, 이론적으로 그 옹호자들에게 어느 것도 더욱 당연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은 느껴지거나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라고 여기기 보다는 옹호해 봐야 쓸모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게다가,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가져야하며, 그리고 인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허구일 뿐이다.

 

가족, 부족, 심지어 국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치 개미때 또는 벌떼들처럼 스스로가 자연스러이 형성되었으며 실제 존재를 가진다. 자기 자신의 동물적 개인을 위하여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안다: 안나, 돌리, 존, 피터, 등등. 자신의 부족을 사랑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가 모든 구엘프 가문 또는 모든 기벨름 가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라인강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하고, 그 수도는 파리이며, 그 역사 등등 을 포함하는 프랑스를 안다. 그러나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은-그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국가와 같은 것, 민족과 같은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개념으로서 인류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인류! 인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가? 인류는 야만인, 백치, 알콜중독자, 또는 광인에서 끝나는가? 만일 우리가 인류에서 그의 가장 낮은 대표자들을 배제하는 선을 긋는다면, 어디에다가 그 선을 그어야 하는가? 미국인들처럼 흑인을, 어떤 영국인 들처럼 힌두를,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 유태인들을 배제할 것인가? 우리가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야 한다면, 우리는 왜 좀더 높은 동물들을 포함하지 않는가, 그들 중에 많은 수가 인류의 가장 열등한 표본들보다 우월하다.

 

우리는 영원한 대상으로서 인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한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인류는 허구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듯 인류를 사랑할 수 있으면 매우 이로울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듯, 사람들의 활동에 있어서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단체 대신에 사회적 세계적인 단체로 바꾼다면 매우 유일하여서 각자가 모두를 위하고 모두가 각자들 위하게 될 것이다.

 

오직 사람들이 이 일을 하도록 이끌어 갈 동기들이 없을 뿐이다. 실증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모든 과학적인 원리들에 대한 형제애의 사도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이나,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느끼는 전체 인류애로의 확장을 옹호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토론하고 있는 사랑이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희석된 형태로서 자신의 고국을 품지만, 오스트리아, 영국, 또는 터어키 같은 인위적인 국가를 품기도 전에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인류, 즉 절대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개념과 관련하여 심지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자신의 동물적 인격)을 사랑한다, 그는 그의 가족을 사랑한다, 그는 심지어 그의 조국을 사랑한다. 인류를 사랑하면 어떤가? 그것은 정말 너무나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데, 그것은 정확하게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공산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형제애의 옹호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훌륭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적 또는 사회적 개념의 삶에 기초하고 있는 사랑은 국가를 위한 사랑을 초월하여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의 허위성은 사회적 개념의 삶은 , 그리고 그 위에 가족과 민족이 형성되고 있는데, 그 자체가 자기에 대한 사랑에 의존하며, 그것이 자신에서 가족, 부족, 민족, 그리고 국가로 확장되면서 그 사랑은 점점 약해진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갈 수 없는 가장 먼 한계에 우리가 도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범위를 확장할 필요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사랑의 가능성은 그 대상을 명확하지 않게 넓혀야 할 필요성에 의하여 파괴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개인적인 인간의 사랑의 불충분이 명백해 진다.

 

그리고 여기에 실증주의적,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형제애의 옹호자들은 이 파산 상태의 인간의 사랑의 불이행을 메꾸기 위하여 기독교적인 사랑에 의지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사랑은 오직 그 결과에만 의존하고, 그 기초들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인류에 대한 사랑 만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을 만들어 낼 아무런 동기가 없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오직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의 결과이다, 그 안에서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사회적 개념의 삶은 사람들을,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나서 가족, 부족, 민족, 그리고 국가에 의해서, 인류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의 의식으로 이끌었으며, 그것은 정해진 한계가 없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에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아무런 종류의 감정을 일깨우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은 삶의 사회적 이론에 의해서 풀어질 수 없는 모순이다.

 

기독교 교리의 완전한 의미 안에서 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으며, 삶에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 가족, 민족, 그리고 인류, 그리고 인류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인식한다; 그것은 사랑의 범위에 있어서 무한한 확장의 필요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대상은 개인들의 사회들 안에 있는 자신의 외부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외부의 세상에서도 아니며, 그러나 자신의 안에서, 본질이 바로 그 사랑인 신적인 자신에서에서 발견되며, 그것은 동물적인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소멸되기 쉬운 본질의 의식을 통하여,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이전의 것들과의 차이는, 사회적 교리는 말한다: “당신의 본능과 반대하여 살아라 [이는 오직 동물적인 본능만 깨달음], 그것을 가족, 사회, 그리고 국가의 외형적인 법률에 복종하게하라.” 기독교는 말한다: “당신의 본능에 따라서 살아라[이는 신적인 본능의 깨달음]; 그것을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않게 하라-당신이든(동물적인 자신), 다른 사람이든-그러면 당신의 외적인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사람을 자신에 대한 기초적인 의식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비록 동물적인 껍질에 갇혀있지만, 동물적 자신에게가 아니라 신적인 자신, 신적인 생기, 하나님이 아버지 자신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에게로 데려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은, 그의 주된 특징은 사랑으로서, 사회적 개념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범위에 대한 확장의 필요를 만족 시킨다. 사회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개인의 행복은 끊임없이 넓어지는 사랑의 범위를 요구 했다; 사랑은 필요였으며 특정한 대상들에 갇혀있었다-자신, 가족, 사회.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에 있어서는, 사랑은 필요가 아니며 아무런 대상에 갇혀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의 본질적인 능력이다. 사람은 이것을 또는 저것을 사랑함이 그의 이익이기 때문이아니라, 사랑은 그의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한다.

 

기독교의 교리는 사람에게 자신의 영혼의 본질이 사랑임을 보여 준다-즉, 그의 행복은 이런 또는 저런 대상을 사랑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원리-그가 자기 자신 안에 사랑으로서 인식하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 점에서 기독교 교리와 실증주의자들의 교리, 그리고 비기독교적인 원리들에 입각한 사해 동포주의에 대한 모든 이론주의자들과의 차이가 있다.

 

앞에 말한 것들이 기독교 종교에 관련된 두가지의 주된 오해들이었으며, 그로부터 그것에 대한 더욱 많은 거짓된 추론들이 나온다. 첫번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모든 이전의 종교들처럼, 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들로서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들 명령들은 실천될 수 없다는 믿음에 있다. 두번째는 기독교의 전체 목표는 사람들에게, 한 가족으로서, 서로 이롭게 살도록 가느치는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모든 사상들을 완전히 버리고, 우리는 오직 인류에 대한 사랑의 명령만을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초자연적인 것에 있으며 그 도덕적 가르침은 실행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잘못된 관념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깨닫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구성한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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