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신앙고백]Tolstoy

[스크랩] 제 5 장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독교적 양심의 모순 1

好學 2011. 10. 15. 23:03

 

제 5 장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독교적 양심의 모순 1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지 않고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교적 개념의 삶은 인류의 현재 발전 단계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개념만이 그것과 일치할 수 있다-기독교적 개념의 삶은 아직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앗다, 그리고 삶의 진행 자체는 그들이 필연적으로 그것을 채택하도록 이끌 것이다-새로운 삶에 대한 이론의 필요성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고, 신비스러우며, 그리고 초자연적이었다-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삶의 기독교적 이론의 요구는 그러했다-기독교적 개념의 삶의 흡수는 필연적으로 물질과 영혼의 원인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삶에 대한 더 높은 시각의 필요조건을 사람들이 알면서도 삶의 열등한 단체들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사실은 존재를 어렵게 하는 모순들과 고통들에 이른다 그리고 반드시 그 변형을 필요로 한다-우리의 삶의 모순들-경제적 모순과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똑같이 그로인해 초래되는 고통-국가의 법률을 따르므로서 초래되는 정치적 모순과 고통들-국제적인 모순과 동시대 사람들에 의한 그것의 인식:코마로프스키, 페리, 부스, 패시, 로슨, 윌슨, 바틀렛, 디포니, 모네타-군사적 모순의 두드러진 특징.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해되지 않는 데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이 그렇듯이, 초자연적인 방법들로서 나타내어 진다고 결론지었을 때나, 또는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표출되어지는 외적인 형상들을 연구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은 실현불가능하며, 인류에 대한 사랑의 교리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모든 다른 그릇된 사상들의 근원이 되는, 주된 이유는, 기독교는 삶에 대한 어떤 변화가 없어도 받아 들여 지거나 거부될 수 있다는 교리라는 생각이다.

 

기존 사물의 질서에 적응된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며 그것이 변회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삶을 수정함이 없이도 받아 들일 수 있는 계시들과 명령들의 집합으로 교리를 취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오직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들을 주는 교리가 아닌 반면에, 삶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를 열어준다, 그리고 이전에 있어온 모든 것들과는 매우 다른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 가고자 하는 시대에 적합한 인간의 활동의 전체 세계를 정의한다.

개인의 삶처럼, 인류의 삶은, 단계적으로, 변화하며 나아간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들은 그에 적합한 삶의 이론을 가지며,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흡수되어 진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흡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한다. 사람들과 인류의 믿음에 대한 변화들은 개인들의 믿음의 변화들과 똑같다. 만일 가족의 아버지가 그의 아이같은 삶에 대한 개념들에 의해서 그의 행위가 인도된다면, 삶은 그에게 너무나 힘들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철학을 찾게되고 그의 나이에 적합한 것을 쉽게 흡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교도적인 삶의 개념에서 기독교적인 것으로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지금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화된 사람은 삶 그 자체의 경험에 의하여 이교도적인 개념의 삶을 버리거나- 그러한 삶은 인류의 현 단계에서 적합하지 않으며-,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한 의무에 복종함-그것의 진리들은, 아무리 부패하였고, 왜곡되었더라도, 여전히 그에게 알려져 있으며, 그것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모순 들에 대한 해답을 준다-의 필요에 다가서게 된다.

 

만일 기독교 교리의 필요 조건들이 사회적인 삶의 이론을 가진 사람에게 이상하고 심지어 놀라운 것처럼 보인다면, 사회적 교리들의 필요 조건들이,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그 결과들이 예측될 수 없을 때에, 옛날의 야만인들에게도 결코 적지 않게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놀라운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야만인들이 말한다, “나의 마음이나 나의 삶을 어떤 이해할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그리고 진부한 것-가족, 부족, 또는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다른 사람의 힘의 처분에 맏기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야만인이, 한편으로, 막연하지만, 사회적 개념의 삶, 그리고 그 주된 동력, 사회적 검열, 또는 사회적 승인-명예-의 가치를 느끼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개인적인 삶이 어려움들이 너무나 커서 자신의 삶에 대한 과거의 이론의 가치를 더이상 믿을 수 없는 때가 왔다. 그러자 그는 사회적, 국가적 개념의 삶을 받아 들이고 그것에 복종했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이론의 삶을 사는 사람이 현재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사람이 말한다, “나의 행복, 그리고 가족과 국가의 행복을 좀더 높은 법을 실천하기 위하여-그것은 자신, 가족, 혈족 그리고 국가에 대한 사랑이라는 나의 가장 당연하고 고결한 감정을 포기하기를 요구한다-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 기관이 제공하는 삶의 안전을 버리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영혼에서 더 높은 법, 즉 하나님 그리고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막연한 인식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삶의 모순들로부터 초래되는 고통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흡수하도록 강제할 것이며, 그것이 모든 모순들을 해결하며 그의 모든 고통들을 제거할 것이다-그것은 기독교적인 이론을 따르는 삶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는 이제 왔다.

 

수천년 전에, 개인적 동물적 시각의 삶으로부터 사회적 시각으로 변천을 겪은 우리는 그 변천이 필연적이며 당연한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1800년 동안 통과하고 있는 이 변천은 일정하지 않으며, 부자연스럽고, 놀랍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첫번째 변천이 너무나 깊이 완성되어서 그것에 의해서 달성된 습관들이 우리 안에서 무의식적이며 본능적으로 되었으며, 반면에 현재의 변천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의식적으로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다.

 

사회적 개념의 삶이 사람들의 의식에 스며 들어가는 것은 세월이, 수천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것은 여러가지 형태을 거쳤으며 이제 유전, 교육, 그리고 습관을 통하여 본능적인 종교로 흘러 갔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천년 전에는 오늘날 기독교의 교리가 그의 진정한 의미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럽고 놀랍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의 교리가-세계 동포, 민족적 구별들의 억제, 개인 재산의 폐지, 그리고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이라는 이상한 금지-불가능한 거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또는 심지어 가족에 대한 의미에서, 예를 들면, 부모들의 자녀들을 뒷받침하며, 젊은 사람이 노인을 부양하고, 결혼 생활의 순결해야할 의무등 에서, 그것은 오천년 전에도 똑같았다. 더욱 더 이상하며, 심지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정된 권력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며,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하는 국가적 의무들이었다. 그런 모든 필요조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단순하며,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에서 아무런 신비스럽거나 놀라운 것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삼천년 또는 오천년 전에 그것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삶의 사회적 개념은, 그것이 처음 사람들에게 제시되었을 때 그들에게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신비스러우며, 초자연적이었으므로, 종교의 원리로서 작용했다. 우리는 인류의 삶의 단계를 극복하였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가족들, 공동체들, 그리고 국가들로 연합하는 이성적인 근거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러한 유대가 포함된 의무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구실삼아 제시되었으며 그것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가부장제의 종교들은 가족, 부족, 민족을 받들었다. 국가적인 종교들은 황제들과 국가들을 신격화하였다. 심지어 지금도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황제를 땅위의 신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농부들처럼-그것은 그들이 필요한 것에 대한 이성적 인식 때문이 아니며, 또는 그들이 국가의 의미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인 감정때문에 국가의 법을 따른다.

 

정확히 똑같은 방법으로 오늘날 기독교 교리가 사회적 또는 이교적인 삶의 이론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록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비밀스럽고 신비스럽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없지만, 초자연적인 종교를 가장하여 나타났다. 그것은 단순히 삶의 이론으로서, 현재의 물질적인 발전 정도에, 현재의 인류의 성장단계에 적합하며, 그러므로 반드시 필연적으로 받아들여 져야한다.

 

때가 올 것이다-이미 오고 있다-평등 그리고 형제애, 재산 공유,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기독교적인 원리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족이나 사회적 삶의 원리들이 정말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보이는 것처럼 나타나는 때가 올 것이다.

인류는 개인적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발전에서 후퇴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삶의 사회적, 가족적, 그리고 국가적 개념들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들은 나아가서 다음의 그리고 더 높은 삶의 개념을 흡수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두가지 방향에서 일어나게 된다: 영적인 원인들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인 원인들을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정말로 자신의 이성의 명령 하나만으로 개인적인 사람이 그의 삶의 방향을 거의 바꾸지 않으며, 그러나 그의 이성에 의해서 그에게 밝혀지는 새로운 관심들과 목적들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전처럼 살아 가고, 오직 자신의 양심에 절대적으로 대치되어서 결국 참기 어려워질 때 생활의 방향을 바꾸듯이; 인류 역시 그러하다, 즉 그들은 그들의 종교들을 통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새로운 관심들과 목적들을 배운지 오래 지나서도, 그들의 대표자들의 대부분이 전처럼 계속 살아가고, 옛날 삶을 전처럼 살아가기가 불가능함을 알고 나서야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삶의 변화가 설교되고 가장 지성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고 깨달아 지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경의로운 태도, 즉,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현재의 복잡한 존재에 있어서 삶에 관한 옛날 이론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끌려 간다. 그것은 마치, 가족의 아버지가, 자신의 나이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를 알고 있음에도, 아직도 습관과 경솔함으로 소년 시절에 그랬던 것같이 계속해서 똑같이 어리석게 살아 가야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인류가 한 단계에서 다음으로 변천함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 우리가 통과하고 있다. 인류에게 있어서 사회적 단계는 낡아 버렸으며, 이제 새로운 시기로 들어 섰다. 인류는 이 새로운 시대에 삶의 기초가 되어야하는 교리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 무력함 때문에 삶의 옛날 모습들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삶과 실용적인 삶 사이의 불일치로부터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총체적인 모순들과 고통들이 따라나오며, 인류의 변화를 필요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오직 삶의 실제와 이론을 비교하기만 하면 될 뿐이며, 결국 우리의 삶의 상태들과 우리의 양심사이의 첨예한 반목에 실망하고 만다.

 

우리의 전체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우리가 필요하며 옳다고 여기는 모든 것과 말 그대로 모순이다. 이런 모순은 모든 것을 관통한다, 경제적인 삶에서, 정치적인 삶에서, 그리고 국제적인 삶에서 그렇다. 비록 우리가 알던 것을 잊어 버리고 잠시동안 우리가 믿는 원리들을 저버렸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기초해야하는 유일한 토대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것들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일반 상식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너무나 상반되게 행동한다.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및 국제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삼 또는 오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원리들에 이끌려 간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우리의 양심과 삶의 상태들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고대의 사람들은 인류가 주인들과 노예로 나누어져 성립된 사회에 사는 것이 매우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분이 하나님에 의해서 명해졌으며 언제나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믿음이 가능한가?

 

고대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여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있고 그들을 수 세대 동안 불행에 묶어둘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이 다른 근원들에서 나왔으며, 피가 천하거나 고귀하고, 함이나 야펫의 자손들에서 온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현인들, 인류의교사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들의 존재를 정당화하였으며 노예제도의 합법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3세기 전에, 미래의 가상 사회인 유토피아를 묘사한 사람들은 노예들이 없이는 그것을 구상할 수가 없었다.

 

고대와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들은 평등하지 않으며, 유일하게 참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 또는 그리스인들, 또는 로마인들, 또는 프랑크인들이라고 믿었으며, 확고하게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귀족주의나 애국주의의 원리들을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으며 믿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안다 그리고 알지 않을 수가 없다-비록 우리는 결코 그 사상이 명백하게 표현된 것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을 결코 읽어보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을 결코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지라도, 여전히 유포되고 있는 기독교적인 정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 들임으로써-우리의 모든 가슴으로 우리는 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근본 진리를 알기를 피할 수가 없으니,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다, 우리가 어디에 살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우리의 가슴들에 있는 우리의 한 아버지에 의해 심어진 똑같은 사랑의 법에 속해 있다.

 

오늘날 한 사람의 의견들과 교육의 정도가 어떻든지, 그의 자유주의의 색깔이 어떻든지, 그의 철학, 과학, 경제의 학파는 어느 것이든지, 그가 아무리 무식하거나 미신적이든지, 현 시대의 제각기 사람은 모든 사람이 삶과 좋은 것들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낫거나 악아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안다. 누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을 안다; 누구나 그것을 자신의 전체 존재로서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나 그의 모든 주위에 사람들이 두 계급으로 존재하는 것을 본다-하나는, 노동하며, 억압받고, 가난하며,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게으르고 억압하며, 사치스럽고, 그리고 방탕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것을 알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이모저모로, 그의 양심이 비난하는 이러한 구분을 옹호하는데 참여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모순을 의식함과 그것 안에 자신이 기여함으로부터 고통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주인이던 노예이던, 오늘날의 사람은 그의 양심과 실제 삶 사이에서 가슴아픈 갈등 그리고 그로부터 연유되는 불행들을 끊임없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고하는 민중들, 삶 전체를 삼켜버리는 끊임없고, 의미 없으며, 절망적인 수고와 궁핍 아래서, 고통받는 인류의 엄청난 대부분은, 그들이 지닌 모든 믿음들 그리고 그들을 그런 상태로 데려왔으며 그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들에 따라서 현재의 모습과 당연히 있어야 할 모습의 첨예한 대조 안에서 그들의 가장 예리한 고통을 찾고 있다.

 

그들이 노예 상태에 있으며 궁핍과 어둠을 강요당하여서 그들을 누고 있는 소수들의 탐욕들을 채워주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들은 그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평범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고통들을 증가시키며 가장 쓰라린 고통을 구성한다.

 

옛날의 노예들은 그가 태어 나면서부터 노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동자는, 그가 노예라는 것을 느끼는 반면에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탄탈루스의 고통을 맛본다, 그리고 그의 것으로 존재하며 그의 것이어야하는 것을 영원히 갈망하면서도 결코 얻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고통들은, 현재의 모습과 당연히 있어야할 모습과의 갈등으로부터 분출되어서, 그들이 그것을 인식함으로서 생성되는 시기와 증오로서 열배나 증폭된다.

 

현 시대의 노동자는, 비록 고대의 노예보다 고통이 훨씬 가벼워진다고 하더라도, 비록 하루에 여덟시간과 삼 달러의 임금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즐거워 하지 않는 제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일을 자신의 의지에 의하지 않고, 필요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치스럽고 게으른 사람들의 욕망들을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그리고 단 한 명의 부자, 특별히 공장이나 작업장의 소유자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들이 노동만이 부를 만들어 내며,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부정직하고, 법으로 처벌 받는다는 인정된 과학적인 원리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진정한 장점과 존엄은 이웃을 사랑함에 있으며, 착취함에 있지 않다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근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안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상황과 원래 되어 있어야할 상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부터 예리하게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모든 원리들에 의하면, 내가 아는 모든 것에 의하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에 따르면,” 노동자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자유로워야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평등해야 하며, 그리고 사랑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굴욕 받고, 미움받는 노예이다.” 그리고 그 역시 증오에 가득차서 그의 입장으로부터 도피할 방법들을 찾으려 하고, 그를 깔아 뭉개려는 원수를 털어내려하며, 반대로 그를 억압하려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되려고 시도하며,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위치에 들어설 이유가 없다.” 노예들과 주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른 종족으로 창조된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그들이 그렇게 시도한다면, 일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자들이 틀린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사람들은 똑깥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러므로 형제들이고 평등하다는, 복음서의 신앙을 고백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그것을 숨기려하더라도, 기독교인의 첫번째 조건들의 하나는 사랑이며, 말로서가 아니라 행함으로서이다.

소위 교육받은 계층들은 훨씬 더 심각한 모순과 고통에 산다. 제각기의 교양있는 사람은, 그가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형제임을 믿으며, 적어도 그는 인류애, 또는 정의의 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그는 과학을 믿는다. 그리고 내내 그의 전체 삶은 그것 모두에, 기독교, 인류애, 정의, 그리고 과학의 모든 원리들에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원리 위에 형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가 양육되어 왔으며, 그가 고통없이는 포기할 수 없었던 모든 습관들은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오직 피를 말리며, 흔히 치명적인 고역들로서, 즉, 기독교, 인류애, 그리고 정의, 그리고 심지어 과학(즉, 경제과학)의 원리들을 가장 명백하고 잔인하게 범하므로써, 만족되어 질 수 있다. 그는 형제애, 인류애, 정의, 그리고 과학의 원리들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비난하고 있는 노동하는 계급들의 억압에 의존하며, 그의 전체 삶은 그들의 억압으로 얻어지는 이익들에 근거를 두고 살고 있다. 게다가 그는 모든 자신의 믿음들에 너무나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현상들의 이러한 상태를 지속하려고 모든 노력들을 쏟아넣고 있음을 그는 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그러나 매일 아침 형제나 자매가 나를 위해 침대의 오물을 치워야 한다. 우리는 형제들이다, 그러나 매일 아침 나는 담배 한대, 사탕과자, 얼음, 그리고 그런 것들을 취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나의 형제 자매들이 그것들을 생산하느라고 그들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즐기고 그것들을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은행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나의 형제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상품들을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산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모든 삶의 신조가 그들의 존재를 초래하는 도둑 또는 창녀를 기소하고, 재판하며, 선고함으로써 주어지는 봉급으로 산다, 그리고 그들은 처벌되어서는 안되며 교화되어야 함을 나는 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부자들과 게으른 자들의 사치에 사용되어질 세금들을 노동자들로부터 징수하며 산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거짓 기독교 종교를 설교하는 봉급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나자신도 믿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사람들이 진정한 기독교를 깨닫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나는 사제나 주교로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을 속임으로써 봉급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금전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의 교육의, 의료의, 또는 문학적인 수고들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살인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살인을 가르치거나, 무기, 화약, 또는 요새들을 만들게 함으로써 봉급을 받는다.

 

상류 계급들의 전체 삶은 끊임없는 불일치이다. 사람의 양심이 섬세할 수록, 그에게 있어서 이런 모순은 더욱 더 고통스럽다. 민감한 양심을 지신 사람은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이런 고통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들은 그의 양심을 무디게 함으로써이다, 그러나 비록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을 둔하게 하는데 성공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들을 둔하게 할 수는 없다.

 

당연히 그들의 양심이 민감하지 않거나 뭉툭하게 되어버린 더욱 높이에서 지배하는 계급들의 사람들은, 양심에 의해서 고통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움과 증오로서 고통받는다. 그들은 고통받게 되어 있다. 그들은 존재하는, 피할 수 없이 일하는 계급들의 사람들에서 존재하는 그들에 대한 모든 증오들을 안다. 그들은 노동하는 계급들이 속임을 당하며 착취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압제를 털어버리고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복수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더욱 높은 계급들은 노동조합, 파업, 노동절 축제들 보고서 그들을 위협하는 재앙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공포는 자기 방어와 증오의 본능으로 변해간다. 만일 그들이 한 순간 그들의 억압받는 노예들과의 투쟁에서 진다면, 그들을 멸망할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노예들은 분노하고 있으며 그들의 분노는 나날의 억압으로 더욱 강해져 가고 있기때문이다. 압제자들, 비록 그들의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고, 압제를 끝낼 수가 없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압제의 강도를 늦춘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그들은 멸망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 계급들의 복지에 대해서, 연소자와 여자들의 노동에 대해서, 저축은행과 연금에 대한 그들의 겉치레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늦추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은 사탕발림이거나 또는 기타 단순히 노예들이 그들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묶어두는 염려함이다. 그러나 노예는 여전히 노예이다, 그리고 노예 없이 살 수 없는 주인은 이전 보다 더욱 그들 자유로이 해줄 마음이 없다.

 

노동자들에 대한 지배계급들의 태도는 그의 적을 땅에 넘어 뜨리고 그를 붇들고 있는 사람의 태도이다, 그것은 그가 그들 붙들고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그를 심지어 일초라도 보내 준다면, 그의 적은 성이 나있고 그의 손에 칼을 들고 있으므로, 자신은 찔려 죽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의 양심이 부드럽든 그 반대이든, 우리의 부자들은 옛날 사람들이 당연한 권리로 여기던 가난한 자들로부터 훔친 재물을 즐길 수가 없다. 그들의 전체 삶과 그들의 즐거움들은 양심이 찔려서나 공포로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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