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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5 장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독교적 양심의 모순 2

好學 2011. 10. 15. 23:03

 

제 5 장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독교적 양심의 모순 2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것은 그만 이야기 하기로 하자. 정치적 모순은 훨씬 더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먼저 모든사람들은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습관으로 키워져 왔다. 현대의 모든 존재는 법률로써 정의된다. 사람은 법률에 따라서 결혼하며 이혼 당하고, 그의 자녀를 교육시키며, 그리고 심지어(많은 국가들에서) 그의 종교적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체 존재를 정의하는 법률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선하다고 여기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현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 법의 정의를 믿지 않으며, 그것을 경멸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복종하고 있다. 옛날 세상의 사람들이 그들의 법률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들은 그들의 법률(그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이 유일하게 정당한 법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것이 그러한가? 우리는 우리국가의 법률이 영원한 법이 아님을 알고 있으며 알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다양한 국가들의 많을 법률들 중의 하나이며, 그것들은 똑같이 불완전하고, 흔히 명백하게 잘못되었으며 부당하며, 신문들에서 다양한 관점에서 비난받고 있다. 유태인은,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법률을 기록하였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므로, 그의 법률들을 잘 지킬 것이다; 로마인도 요정 이제리아가 지시해주었다고 생각하는 법률들을 잘 지킬 것이다. 사람들은 법률들을 만든 황제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라는 것을 믿는다면, 심지어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들을 가능한 선하게 만드려는 능력과 욕구를 지닌 입법가들의 회의의 노력이라면 그것들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법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막의 뒤편에 있으며, 그것들은 탐욕, 속임수, 그리고 당쟁들의 소산임을 알고 있다; 즉 그것들에는 어떤한 진정한 정의도 있지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그러므로 시민법이나 정치법들에 복종하는 것이 이성이나 인간 본성의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정의가 매우 의심스러운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이 판단가능하며 구속력이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법률을 복종하면서 고통받지 않을 수가 없다.

 

법률에 의하여 사전에 그의 모든 삶이 정의되고, 비록 그들 법률들의 지혜나 정의를 믿지 않으며, 흔히들 명백하게 그것들의 부당함, 잔인함 그리고 인위성을 깨닫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처벌이라는 위협아래서 복종하여야 할 때에, 그는 고통받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세관과 수입관세의 무익함을 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불해야만 한다. 우리는 법정과 기타 정부의 기관들의 유지에 관한 지출의 무익함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해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관들의 지출들에 우리의 몫을 져야할 의무를 가진다. 우리는 법률에 의한 처벌들이 잔인하며 파렴치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지지함에 있어서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지의 분배가 부당하며 나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전쟁들과 군대들에 대한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군대들과 전쟁비용들에 너무나도 무거운 짐들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국제적인 문제들에 방향을 돌릴 때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모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건전한 판단과 심지어 인류의 존재의 상실의 고통아래 해답을 요구한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양심과 전쟁 사이의 모순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영적인 삶을 사는 기독교적인 민족들이다, 그래서 모든 고귀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상들이, 세상의 한 쪽 끝에서 일어나서, 당장에 전체 기독교 인류들에게 전파되고 국적의 구별없이 어디에서나 똑같은 자부심과 즐거움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서로 다른 국적의 사상가들, 박애주의자들, 시인들 그리고 과학자들을 사랑하며, 신부 다미엔 이 마치 우리 자신인 것처럼 그의 공적을 자랑스러워하는 우리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 즉, 프랑스인들 독일인들, 미국인들, 그리고 영국인들에 대한 단순한 사랑을 가지며, 그들의 품성을 존중하며, 그들을 기꺼이 맞아 들이며 그들이 따뜻하게 환영하게 하는 우리는, 그들과의 전쟁을 결코 영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상호간에 죽음을 불러올 이 사람들과 우리들 사이의 불화의 가능성을 공포없이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오늘은 아닐지라도 내일 반드시 거쳐야하는 이런 살륙에 손을 대어야만 한다.

 

유태인, 그리스인, 그리고 로마인이 살인을 통하여 자신의 민족의 독립을 수호함은 매우 잘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유일하게 진실되며, 훌륭하고 선하며 모든 나머지 사람들은 속물들이며 야만인들이라는 것을 충실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심지어 중세시대의 마지막 과 이 세기 시작까지도-의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계속하여 지니고 있으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많이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애를 쓰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이 모순은 너무나 두려움으로 가득차서 그 해답 없이는 삶은 더이상 가능할 수 없다.

 

“우리는 모순 투성이 시대에 살고 있다.” 라고 국제법 교수인 코마로프스키 백작은 그의 박식한 논문에서 쓰고 있다. “모든 국가들의 언론들은 지속적으로 평화와 모든 국가들을 위한 평화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에 대한 희망을 지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부들의 대표자들, 사적인 사람들, 그리고 공식적인 기관들에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국회의 토론들, 외교 서신 그리고 심지어 국가간의 협약들에서 도 언급되어 지고 있다. 동시에 정부들은 해마다 그들의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새로운 세금들을 부과하고 공채를 모집하고, 미래의 세대들에게 현재의 어리석은 정치의 실책들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다. 말과 행동에서 얼마나 현저한 차이가 나는가! 물론 정부들은 그들의 모든 지출과 장비들은 전적으로 국방을 위한 것이라고 이들 조처들의 정당성에 대해서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제각기 사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대국들이 그들의 정책에 있어서 한 마음이라면, 즉, 단지 자기 방어만을 추구할 뿐이라면, 어디에서 침략을 예상할 수 있을지가 의혹으로 남는다. 현실적으로 각각의 강국들은 매 순간마다 다른 나라들의 침략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각각의 정부 당사자에게 일반적인 불안감과 다른 강국들을 능가하는 군사력으로 증가시키려고 하는 초인간적인 노력들을 초래하게된다. 그러한 경쟁 자체는 전쟁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국가들은 끊임없는 군사력의 증강을 오랫동안 버텨낼 수 없다, 그리고 조만간에 그들은 현재 상황의 모든 불리함 보다도 그리고 전쟁의 끊임없는 위협보다도 전쟁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면 가장 사소한 구실도 전체 유럽을 세계 대전의 화염속으로 던져 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가 우리를 깔아 뭉개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고통들에서 구원해 주리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지나간 시대의 전쟁에 대한 경험은 각각의 전쟁이 오직 증대된 국가의 증오들 가지게 되었으며, 군사적인 부담이 더욱더 부담이 되며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유럽의 정치적 및 경제적 입지를 견디기 어렵고 해결이 어렵게 몰아부쳤다.”

 

엔리코 페리는 기록하고 있다, “현대 유럽은 900만명의 군대에다가 1500만 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연간 지출은 연간 4억 프랑이나 된다. 군사력의 지속적인 증가에 따라서, 사회적 및 개인적인 번영의 근원이 마비된다, 그리고 현대 세계의 상태는 무기를 준비하기 위해 영양을 희생함에 처하며, 그로인해서 그가 준비한 무기들을 사용할 힘을 잃게 되고, 그것이 무거워서 마침내 주저 앉게 되고 마는 사람의 상태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1887년 6월 26일 런던에서 국제법 개혁 및 성문화 협회에서 읽은 그의 논문에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똑같은 숫자, 900만의 현역 군인들, 그리고 1500만의 예비군, 그리고 이 모든 군사력을 지원하고 형성하기 위해 정부의 엄청난 지출을 언급하고나서, 그는 말한다, “이 숫자들은 오직 실제 경비의 작은 부분 만을 나타낼 뿐이다, 왜냐하면 여러국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전쟁 예산 뿐만 아니라, 그렇게 엄청난 숫자의 가장 왕성한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빼나감과 관현하여 사회에 끼친 엄청난 손실과, 그 사람들은 산업 현장에서 그리고 갖가지의 노동으로부터 붙들려 갔으며, 그뿐만 아니라 반환될 수 없는 군사적 비축에 사용된 자금들에 대한 이윤까지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쟁 및 전쟁준비들에 대한 지출의 피할수 없는 결과는 계속적으로 불어나는 국가의 부채이다. 유럽의 정부들에 의하여 도입된 많은 수의 차관들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총액은 4억 스털링에 달하며, 이들 부채들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코마로프스키 교수는 다른 장소에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디에서나 우리는 교역과 제조의 침체에 대한 불만, 일반적인 경제적 위치의 비참함, 노동자 계급들의 불행한 생존 상태들, 그리고 민중들의 보편적인 가난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들은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성을 잃은 최극단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디에서나 새로운 세금과 의무가 고안되고, 국가들의 재정적인 억압은 그 한계를 모른다. 만일 우리가 과거 100년 동안의 유럽국가들의 재정을 일견한다면,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그것들이 빠르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범상치 않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조만간에 피할 수 없은 파산으로서 우리 모두를 위협할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유럽 국가들의 삼분의 일 또는 심지어 이분의 일을 집어 삼키는 군사력 유지를 위한 지출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가장 우울한 것은 이런 예산의 증가와 대중들의 빈곤이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세계의 너무나 많은 인구들이 처해있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저항이 바로 사회주의가 아니던가?”

 

“우리는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다,” 라고 (1890년) 런던에서의 마지막 만국 평화회의에서 읽은 서한에서 프레드릭 파시는 말한다, “우리는 미래의 제정신이 아닌 전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하기 위하여 과거에 제정신이 아니며 범죄적인 전쟁들로서 우리가 야기한 부채에 대한 이자를 갚느라고 우리 스스로를 망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죽이기 위한 수단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 뒤에 프랑스에서 그 주제가 비쳐지는 경향을 연설하면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사람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있은 후 100년 뒤에, 국민들의 권리들을 인정하며, 사기와 강압에 의하여 부과된 그 모든 일들을 당장 그리고 영원히 중지 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복들이라는 미명하의 인류에 대한 확실한 범죄이며, 군주들의 허영과 민족들의 자존심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오로지 그것들에 대한 승리에 도취해있는 사람들 마저도 약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이 나라에서 종교가 실행되는 관행에 놀랐다,” 라고 윌프리드 로슨 경이 같은 회의에서 말했다: ”당신들은 한 아이를 주일 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당신은 그에게 말한다: ‘착한 아이야, 너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다른 아이가 너를 때린다면, 너도 돌아서서 그를 때리지 말고, 그를 사랑으로 착하게 만들도록 해라.’ 글쎄, 그 아이는 열네 살 또는 열다섯 살까지 주일 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군대에 보낸다. 그는 군대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는 틀림없이 그의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정 반대로, 만일 그가 적에게 다가 갈 수만 있다면, 그의 총검으로 그들 구멍낼 것이다. 그것이 모든 종교적 가르침의 본질이다. 나는 그것이 종교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아이가 그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다자란 성인에게도 좋다고 생각한다.”

 

“유럽에는 무장을 하고 있는 2800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윌슨은 말한다, “그들은 토론이 아니고 상대방을 살인하여 분쟁을 해결하려 한다. 그것이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용인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동시에 매우 비싸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통계에 따르면, 유럽의 국가들은 1872년에 살인의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준비로서 일억 오천만 스털링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들의 상태로서, 두가지 중의 한가지 대안들이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실패이다, 아니면 그것을 설명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함에 실패하였다. 우리의 전사들이 무장해제하고 우리의 군대들이 해체되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기독교 국가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전쟁을 반대하는 설교를 해야하는 의무에 관한 주제들 다루는 회의에서, G. D. 바틀렛은 다른 일들 중에서 말했다: “ 내가 성서들을 이해한다면, 사람들이 전쟁의 문제를 무시하는 한 그들은 오직 기독교를 가지고 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나는 긴 삶을 살아 왔으나 성직자들이 전 세계 평화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거의 여섯 번도 듣지 못했다. 이십년 전에, 응접실에서, 나는 사십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전쟁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는 명제를 의제로 내세웠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미치광이로 여겨졌다. 우리가 전쟁없이 살아 갈 수 있다는 사상은 순전한 겁장이며 바보라고 여겨졌다.”

 

카톨릭의 사제인 디푸르니도 똑같은 정신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양심들 안에 기록되어 있는 영원한 법의 첫번째 교리들 중의 한가지는,” 신부 듀포니는 말한다, “충분한 이유가 없이, 그것의 필요성에 대한 강압이 없이 같은 인류의 목숨을 빼앗거나 피를 흘리는 것의 금지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깊이 각인된 계명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쟁의 문제가 되자마자, 즉, 격류처럼 피를 흘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현 시대의 사람들은 충분한 이유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다. 전쟁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이러한 무수한 살인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정당화되든 정당화되지 않든, 합법적이든 불법적인든, 결백하든 죄인이든 간에,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들이 합법적인 이유없이 살인하는 것을 금하는 기본적인 계명을 위반하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은 벙어리가 되었다. 전쟁들은 도덕적인 고려들에 의존하는 어떤 것이기를 멈추어 버렸다. 전쟁중의 사람들은 모든 고역과 위험들 안에서 정복자들이 되는 즐거움, 피정복자가 되는 슬픔외는 누릴 것이 없다. 그들의 그들의 국가에 봉사한다고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한 위대한 천재가 오래 전에 속담이 되어 버린 말로서 대답했다: ‘정의가 없다면, 제국은 커다란 강도들의 무리가 아닌가? 그들도 그들의 법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약탈하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 명예를 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

“상정된 기구[국제 중재 위원회 기구]는 유럽의 국가들이 강도들의 국가가, 그들의 군대들은 강도들의 무리이기를 중단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강도들 만이 아니라 노예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군대들은 한 두명의 장군들이나 장관들의 처분에 달려있는 단순히 노예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무런 실제적인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병사들에게 횡포를 일삼는다.

 

“노예의 특수성은 그의 주인의 손에 달려있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며, 물건이지 사람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병사들, 장교들, 그리고 장군들이, 통치나나 통치자들의 의지에 따라 살인하려하거나 살해되는 것이다. 군사적 노예는 실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최악의 형태의 노예이다, 특히 강압적인 복무를 통해서 한 나라의 튼튼하고 능력있는 모든 사람들의 목에 쇠목걸이를 채우고, 그들을 살인 도구들, 인간의 육신의 도살자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붙들려가서 행하도록 훈련받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자들 서넛이 내각에서 회동한다, 비밀리에 서기들도 없이, 공공에 알리지도 않고, 그리고 결국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살해되도록 보낸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군사력에 대한 저항들은 우리 시대에 유래한 것이 아니다,” E. G. 모네타는 말한다. “몽테스키외가 그의 시절에 기록한 것을 들어보라. ‘프랑스 [그리고 어떤이는 유럽이라고 하겠지만] 병사들에 의해서 망할 것이다. 새로운 전염병이 전 유럽에 번지고 있다. 그것은 군주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믿기 어려운 정도의 무장 병력을 유지하라고 시킨다. 이 전염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번진다, 곧바로 한 정부가 그의 군사력을 증강하므로, 모든 다른 정부들도 똑같이 행한다. 결국 그 전염병에 의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전체적인 멸망만이 올 뿐이다.

“ ‘제각기 정부들은 만일 그의 사람들이 멸종의 위협을 받는다면 유지할 수 있는 가능한 많은 군대를 유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에 대적하는 이러한 긴장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러므로 유럽은 너무나 멸망하여 만일 우리 대륙의 정부들의 위치에 민간인인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 중에 가장 부자라고 하더라도 살아 갈 만큼 충분히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의 부와 통상의 결과를 가지더라도 가난하다.’

“그것은 약 150년 전에 쓰여졌다. 그 배경은 오늘날의 세상으로부터 가져온 것 같다. 오직 한가지 만이 바뀌었다-정부의 형태. 몽테스키외의 시대에는 엄청난 군사력의 유지의 원인이 국왕들의 전제적인 폭력이며, 그들이 정복을 통하여 개인적인 수입을 증가시키며 명예를 얻기를 희망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당시는 사람들은 흔히 이처럼 말했다: ‘아, 정말 만일 사람들이 정부들에 대해서 병사들과 돈을 거절할 권리를 가지는 사람들을 선출할 수 있다면-그러면 군사 정치들이 끝이 날텐데.’ 이제 거의 유럽 전체에서 대표제 정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지출과 전쟁에 대한 준비들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했다.

 

“군주들의 정신이상이 지배 계급들을 소유하게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전쟁은 루이 14세의 경우처럼, 한 국왕이 다른 국왕의 왕비에게 공손함이 부족해서 일어남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의 명예와 애국심이라는 자연적이며 귀중한 감정들이 너무나 과장되어서, 그리고 한 국가의 여론이 상대 국가에 대해 너무나 흥분되어서, 한 국가의 대사가 다른 국가의 중요 인물에 의해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진술서(비록 그것이 거짓된 보고서일지라도) 가 만들어져서 이제까지 보았던 중 가장 무섭고 파괴적인 전쟁을 발발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유럽은 위대한 나폴레옹 전쟁들의 시대보다 더욱 병사들로 무장하고 있다. 드문 예를 제외한 모든 시민들은 몇년 간을 병영에서 보내기를 강요당한다. 요새들, 무기고들, 그리고 선박들이 건조되고, 새로운 무기들이 끊임없이 발명되어 얼마지 않아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며, 말하기엔 슬프지만, 언제나 인류의 복리를 추구하고 있어야 할 과학이, 파멸의 작업에 동조하고,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살상하는데 사용할 새로운 수단들을 끊임없이 발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다수의 병사들을 유지하고 그렇게 엄청난 살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년 수억씩 지출되고 있으나, 그곳에 지출되는 돈은 사람들의 교육과 방대한 공익 사업들에 적절히 쓰일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으로해서 사회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찾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은 그렇다면, 이런 점에서, 모든 과학들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의 어둡고 야만적인 시대와 같은 상황에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평화도 아니며 전쟁도 아닌-에 대해 애통해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로부터 기꺼이 탈출하고 싶어한다. 모든 정부들의 수뇌들은 모두가 평화를 기원하고, 평화적 의도를 가장 엄숙히 주장함에 있어서 서로와 경쟁하자고 선언한다. 그러나 어느날 또는 그 다음날 그들은 국회에 군사력 증강에 대한 계획을 내놓으면서, 이것들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 자체로만 취해지는 예방적 대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평화가 아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것에 속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는 상호 신뢰에 기초하고 있으며, 반면에 이런 방대한 군사력은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간의 공공연하며 터무니 없는 신뢰의 부족을 나타낸다. 자신의 이웃에 대한 다정한 느낌들을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를 초청하고 자신의 손에 리볼버를 장전하고 그들의 이견에 대하여 토론한다면 우리는 이사람을 어떻게 말해야하는가?

“그것은 모든 선량한 시민들이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종지부를 찍고 싶어하는, 정부들의 평화적 선언들과 호전적인 정책 사이의 명약관화한 모순이다.”

사람들은 매년 유럽에서 60,000건의 자살이 있음에 놀란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직 인정되고 기록된 경우들이다-그리고 러시아와 터어키는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너무나 적은 숫자임에 놀라야 한다. 현 시대의 모든 사람은, 만일 우리가 그의 양심과 그의 삶 사이의 갈등에 깊이 들어가 본다면, 절망의 상태에 빠져있다.

 

현대의 삶과 양심 사이의 다른 모든 모순들은 말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를 선언하면서도 영구적으로 무장된 상태의 유럽 자체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절망으로 몰고가며, 인류의 제정신을 의심하며, 그리고 이 제정신이 아니며 잔인한 세상에서의 존재에 끝을 내도록 몰고가기에 충분하다. 이 모순은, 그것은 모든 다른 모순들의 정수이며, 너무나 무서운 것이라서, 그 안에서 살며 동참한다는 것은 오직 그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거나-그가 그것을 잊어버릴 수만 있어야만 가능하다.

 

아니, 우리들 모두,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사랑할 것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의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사회적 존재가 하나의 공통의 박동으로 뛰고 있는 우리는-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서로에게서 배우며, 상호 행복을 위하여 서로에게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친밀감에서 전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그리고 내일 어떤 미친 통치자가 어떤 어리석을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똑같은 취지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나는 살해 당할 지경에 처해져야 하고, 나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며, 그것은 증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다.

이것을 명백히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어서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군인들 중에서 종종 그러하다. 사람은 오직 순간적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피할 수 없이 그러한 종말로 내몰릴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며, 이 긴장감으로 인해서 현 시대의 사람들은, 술, 담배, 마약 , 도박, 신문 구독, 여행, 그리고 모든 종류의 구경거리들과 오락으로서 자신을 마비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이러한 탐닉들의 결과로 중요하며, 진중한 문제들이 따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것을는 중대한 문제이다. 만일 그들의 감각들을 둔하게할 외적인 수단들이 없었다면, 인류의 절반은 멈추지 않고 자신들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성에 반대되게 산다는 것은 가장 참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다. 현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과 그들의 삶의 방향 사이의 끊임없이 첨예한 반목의 상태에 살고 있다. 이 반목은 경제적 및 정치적인 삶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양심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형제애에 대한 기독교적인 법과, 모든 사람들이 증오나 살인을 준비해야하는 강압적인 병역의무에 처해지는 필요와의 갈등에 있다-기독교인인 동시에 검투사가 되는 것이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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