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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3 장 믿는 사람들에 의해 오해되는 기독교 1

好學 2011. 10. 15. 23:01

제 3 장 믿는 사람들에 의해 오해되는 기독교 1

 

 

CHRISTIANITY MISUNDERSTOOD BY BELIEVERS.

믿는 사람들에 의해 오해되는 기독교

 

기독교 교리의 의미, 소수의 깨달음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되다-이것에 대한 이유는 기독교를 깨달음에서 이를 오해함과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의 잘못된 확신에서 찾을 수 있다-교회에 의해서 믿는 자들에게 기독교의 의미가 모호해지다-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최조 출현-그 본질과 이교도의 종교와의 차이-기독교는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으며, 진리와 교통을 통하여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이것과 동시에, 전파에 있어서 기적적인 성격을 기초로한 교리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소유함에 대한 주장이 일어났다-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임-기적의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소유에 대한 권한 있는 주장-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하였을 리가 없다-교리 문답에 따른 교회의 정의-교회들은 언제나 수가 여럿이었으며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다-이단은 무엇인가-이단들에 관한 G. 아놀드의 작품-이단들, 교회들에 있어서 진보의 표출-교회들이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다, 그리고 언제나 기독교에 적대적이다-러시아 교회가 행하는 일의 설명-마태복음 23장 23절-산상수훈 아니면 니케아 신경-정교회가 사람들에게서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숨기다-같은 일이 다른 교회에서 행해지다-현대 생활의 외적인 조건들은 예를 들면 교회의 교리를 파괴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교회들은 그들의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의 저서가 나온 뒤에, 내가 받은 정보는 기독교 교리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단적이며 단순한 의미로, 이해 되었으며, 언제나 이해되어 왔다, 반면에 비평가들, 교회 및 자유 사상이 공히,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부인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한편으로 이 교리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은 소수에게 결코 상실된 적이 없으며, 점점더 명료하게 확립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교리의 의미는 대다수에게 점점 더 애매해져 갔다. 그런 결과로 마침내 그러한 애매함의 깊이가 심지어는 복음서에서 가장 단순한 말씀으로 표현된 가장 단순한 가르침에서도 사람들이 직접적인 의미로 여기지 않는 지경까지 도달하였다.

 

복음의 빛이 인간의 의식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스며들어 갔을 때도,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귀에 대고 말하던 것이 공공연히 선언 되는 요즈음에 조차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일반적으로 그 자체의 진실하며, 단순하고, 그리고 직접적인 의미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복음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가정, 경제, 시민, 입법, 그리고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때에 있어서, 만일 그것을 해명하는 이유들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진정한 이해의 부족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똑같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깨달았으며, 그것을 완전히, 의혹의 여지없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깨닫고 있으므로 그들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에 비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확고하게 설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확신의 이유는 복음서에 대한 거짓 해석과 그에 따른 오해가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의 오류라는 것이다. 심지어 아무리 강한 물의 흐름이라도 이미 가득찬 컵에 한 방울도 더할 수 없다.

만일 가장 우둔한 사람이라도 주제들에 대한 어떤 생각을 이미 형성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어려운 것들이라도 그에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가장 총명한 사람이, 한 점의 의심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면 가장 단순한 것도 그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

기독교 교리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알아왔고 그 모든 가장 미세한 부분들까지 너무나 주저함이 없이 받아들여서, 그것은 지금 이해되고 있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교리로서, 오늘날 우리 세계의 사람들에게 제시되어 있다.

 

기독교는 이제 교회의 교리들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원리에서 되풀이하는 모든 것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계시로서 이해되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향한 사람의 열망의 예시로서, 이제 인류는 초자연적인 것은 필요가 없어져 버리고,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신교교회에서 완전한 표현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현상으로 여겨지며, 그리고 우리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살아 있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복음의 의미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의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에 의하여 숨겨져 있다.

먼저 전자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1800년 전에 이교의 로마 세계의 한 가운데에 이상한 새로운 교리가 나타났다, 옛날 종교의 어떤 것과도 같지 않았으며, 이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기인되었다.

이 새로운 교리는 형태와 내용에서 그것이 유래된 유태인의 세계에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설교되고 전파된 로마의 세계에는 훨씬 더 그러했다.

이사야의 말씀들에 따르면, 법위에 법이 놓여 있던, 유대교의 복잡한 종교 의식 가운데서, 그리고 완벽의 정점까지 발전된 로마의 법체계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교리가 나타났으니, 이 교리는 모든 신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힌 모든 두려움 및 숭배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을 위한 모든 인간의 모든 제도들과 모든 필요한 것들을 부인하였다. 옛 종교의 모든 명령들 대신에, 이 교리는 오직 일종의 내적인 완성,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신인 사랑을 내세웠으며, 그리고-사람들이 달성하는 이 내적인 완성의 결과로서-또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외적인 완성-하나님의 왕국, 즉, 모든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게 됨을 중지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사랑으로 연합하고, 사자가 양과 함께 눕게 되는 때-을 내세웠다. 종교들과 정부들의 모든 옛날 법들이 똑같이 그들의 명령들의 불이행에 대하여 규정해놓은 처벌의 위협 대신에, 그것들의 이행함에 대해 보상들을 약속함들 대신에, 이 교리는 오직 그것이 진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그것으로 초청했다. 요한복음 7장 17절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8장 46절 :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나의 말을 지키라, 그러면 나의 말이 진리인 줄을 알리라.” 이교리의 진리, 교리와 진리의 일치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전체 가르침은 진리의 인식과 그것을 따름에, 진리의 점점 더 큰 달성에, 그리고 삶을 살면서 점점 더 가까이 그것을 따름에 있었다. 이 교리에는 사람을 정당화하고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는 행위들은 없었다. 오직 그를 인도하는 진리의 모습만 있을 뿐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화신으로서 내적인 완성, 하나님의 왕국을 세움에 있는 외적인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이 가르침을 실천함은 오직 선택된 길로 걸어감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 내적인 완성과 하나님의 왕국을 세움에서 외적인 완성에 더욱 가까와 지는 것이다. 사람의 많거나 적은 축복받음은, 이 교리에 의하면, 그가 달성한 완성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추구하는 크거나 작은 빠름에 있다.

세리 삭개오, 죄인이던 여인, 십자가의 강도가 완성을 향한 나아감은, 이 교리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의 정지되어 있는 의로움보다 더 큰 상태의 축복받음이었다. 잃어버린 양이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소중하다. 방탕한 아들,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은 한푼의 돈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들보다 더욱 소중하며 귀중하다.

 

모든 상태는, 이 교리에 의하면, 내적인 및 외적인 완성의 달성에서의 특별한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자체로른 아무런 의미가 없다. 축복받음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감에 있다; 어떻든 어떤 상태에 정지하는 것은 이러한 축복받음의 중단을 의미한다.

“너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손을 쟁기에 대고 있으면서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적합치 아니하다.” “너희에게 구속되어 있는 영혼들에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되게 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함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먼저 천국과 그 의를 찾으라.”

이런 가르침의 완성은 더욱 높은 진리를 얻음을 향한 중단 없는 전진에서, 자신 안에서 점점 견고하게 더욱 큰 사랑을 확립하고, 자신의 바깥에서 점점 더 넓게 하나님의 왕국을 세움에서 오직 찾을 수 있다.

유대인과 이교도의 세상의 한 가운데서 났으므로, 그러한 가르침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질 수 없었으니 그들은 그것에게 요구되는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 확실하다. 또한, 심지어 그것이 받아 들여진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그들의 모든 옛날의 시각과는 정반대였으므로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이해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교리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점점 더 분명해 진것은 오로지 계속되는 오해들, 오류들, 편파적인 설명들, 그리고 세대를 거쳐서 수정하고 첨가한 덕택이었다. 삶에 대한 기독교적인 시각은 유태인들과 이교도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교도와 유대인의 삶에 대한 시각도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살아가는 힘으로써, 쇠퇴한 유대교와 이교 위에 점점 더 세력을 얻었으며, 계속적으로 자라나서 점점 더 분명해졌다, 동시에 기독교는 그 위에 겹쳐 있던 거짓과의 뒤섞임에서 자유로와 졌다. 사람들은 더욱 더 깊이 기독교의 의미를 얻음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삶에서 점점 더 많이 깨달았다.

인류가 오래 살아 갈 수록, 기독교의 의미는 점점 더 분명해졌으니, 그것은 모든 삶의 이론이 언제나 그러함과 같았다.

후 세대는 그들의 선조들의 오류를 수정했다, 그리고 점점 더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초창기로부터 그러하였다. 그리고, 그런데, 또한, 기독교의 초창기로부터 그들의 권위로서 그들이 교리에 부여하는 의미가 유일한 진리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리고 그 증거로, 그들의 해석의 정확함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제시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처음에 교리의 오해함에 대한 중요한 원인이었으며, 그리고 뒤에가서 교리의 완전한 왜곡의 원인이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다른 모든 진리들과 달리, 그러나 특별한 기적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고 상상되었다. 그래서 가르침의 진리는 가르침이 마음의 필요 및 사람의 전체 본질과 일치함이 아니라, 그 전파의 기적같은 방법에 의하여 증명되었으며, 그것이 띠고 있는 해석의 진실성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서 발전되었다. 이 가설은 가르침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먼저 초창기부터 일어났으며, 그 당시 교리는 아직도 그렇게 완전히 깨달아 지지 않았으며, 우리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종종 잘못 해석이 되었다. 교리가 적게 깨달아 질수록, 그것은 더욱 애매하게 보였고, 그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외적인 증거들이 필요하였다. 타인들이 우리에게 행함을 바라지 않는 것은 우리도 타인들에게 행해서는 안된다는 명제는, 기적으로 증거될 필요가 없으며 신앙을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그 자체에서 납득이 가며 사람의 마음과 본성과 조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명제는 완전히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 기적들로서 증명되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이 모호해지면 질수록, 더 많은 기적들이 그 안에 삽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기적이 더 많이 삽입 되면 될수록, 교리는 그 의미로부터 더욱 부자연스러워졌으며 모호해졌다; 그리고 그 의미로부터 부자연스러워 지면 질수록 그리고 그것이 모호해지면 질수록, 더 강하게 무결성이 주장되어야 했으며, 교리는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복음서, 사도행전, 그리고 서한들로부터, 어떻게 초기에 교리에 대한 무지함이 기적들과 불가해함을 통한 증거들에 대한 필요를 불러 일으켰는지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의 첫번째 예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 우상에게 받쳐진 음식을 먹은 사람을 세례해야 할지 아닌지에 대하여 일어난 질문을 해결하고자 예루살렘에 함께 모인 집회이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것을 토론한 사람들이 모든 외적인 의식-세정식, 청정식, 단식 그리고 안식일 등-을 부인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분명하게 말씀되었으니,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리고 그러므로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을 세례하는 문제는 오직, 비록 그들이 그들의 주님을 사랑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의 위대함을 희미하게 느꼈지만, 여전히 그 가르침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사실이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이 교리를 깨닫는데 실패함에 정확히 비례하여 그들의 교리에 대한 불완전한 깨달음에 대한 외적인 확증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나서 이 문제를, 즉, 그들의 교리에 대한 오해를 증거하는 바로 그 질문을 처리하기 위하여, 이 집회에 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것처럼, 그 이상한 귀절이 언급되었으며, 그것은 특정한 주장들에 대해 외적인 확증을 주기 위해 필요하다고 처음으로 알려졌고, 그리고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많은 악을 생산해 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결정내린 것의 정확함은 그들의 결정에 성령의, 즉 하나님의, 기적적인 참여로서 보증되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성령, 즉,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였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증거를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령이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에게 오순절날 불의 혀로서 강림해야 함이 필요하였다. (그것의 설명에는, 성령의 강림이 그 집회에 앞섰으나, 사도행전은 두가지 사건보다 훨씬뒤에야 기록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 역시 불의 혀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증명되어야 했다 (비록 왜 사람 머리위에 타고 있는 불의 혀가,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이 진리임을 증거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여전히 더 많은 기적들과 변화들에 대한 필요가 생겨났다, 즉, 죽은 자를 생명으로 일으키며, 산자가 갑자기 죽게하며, 그리고 사람들에게 신앙의 장애물이던 모든 기적들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하여 사도행전에 가득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는 커녕, 오직 그들을 지리로부터 쫓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진리를 입증한 결과는 이렇게 기적의 이야기들에 의한 진리의 증거를 하나둘씩 쌓아 가면 갈 수록, 교리는 그 본래의 의미에서 더욱 왜곡되었으며, 그것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초창기부터 그렇게 되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나아갔으며, 끊임없이 증가되어서, 마침내 그것은 우리의 시대에 성변화(聖變化)의 교리와, 교황 또는 주교들 또는 성서의 무류성과,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너무나 의미 없는 맹목적 신앙-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나님에 대한, 교리가 아닌 사람에 대한, 예를 들면, 카톨릭에서, 그리스 정교회에서, 또는 책에 대한, 예를 들면, 신교교회에서-을 요구함으로서 그 논리적 절정에 도달했다. 기독교가 멀리 전파되면 될수록, 그리고 그에 대비하지 않은채 그 영향권에 끌려온 사람들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것은 덜 이해되었고, 더욱 절대적으로 그 무류성이 주장되었으며, 교리의 진실된 의미를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교리의 전체 해석은 이미 평의회에서 일어났던 논쟁의 개요-속세의 권력에 의해 지지받는-로, 계산이 끝나버린 원리-나는 끝까지 그런 그런 그런 그런 그런 그런 것을 믿는다-로, 하나의 성스러운 사도들의 교회-그것은 자신들을 교회로 일컫는 그 사람들의 무류성을 의미한다-로 축소되어 버렸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사람이 더 이상 그들에게 나타나신대로의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교회가 그들에게 믿으라고 명령하는 것을 믿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성스럽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기초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임의대로 해석하도록 놓아 둘 수 없었다-그러므로 그가 교회를 세웠다. 그 모든 주장들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거짓이이며 근거가 없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반박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어디에서고 어느 것에서고, 교회의 주장에서 말고는, 우리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성직자들이 교회를 이해하는 것 같은 어떤 것을 기초하신 것을 찾을 수 없다. 복음서에는 교회에 대한 경고가 있으며, 교회는 외적인 권력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선생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한 귀절에서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경고가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성직자들이 교회라고 부르는 기초에 대하여 말씀되어진 어떤 것이 없다.

복음서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두번 사용되었다-한번은 분쟁을 심판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로, 다른 한번은 돌-베드로, 그리고 지옥의 문-에 관한 모호한 언급과 관련해서이다.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이 두가지 귀절 들로부터, 단순히 모임이라는 뜻에서, 우리가 지금 교회라고 이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교회를,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그 단어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을 기초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교회의 개념-성례식, 기적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무류성에 대한 주장-과 같은 어느 것도 그리스도의 말씀들이나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The fact that men called what was formed afterward by the same word as Christ used for something totally different, does not give them the right to assert that Christ founded the one, true Church.

 

그리스도가 완전히 다른 어떤 목적으로 사용한 것과 똑같은 단어로서 뒤에 만들어진 것을 사람들이 불렀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가 단 하나의 진정한 교회를 기초하였다는 것을 주장할 권리를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

게다가, 만일 그리스도가 정말로 그의 모든 가르침과 전체 신앙의 토대를 위한 교회같은 그런 기관을 기초하였다면, 그는 분명히 이 기관을 분명히 그리고 정확하게 묘사하였들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진리의 교회에게, 모든 종류의 미신을 받드는데 사용되는 기적의 이야기들 뿐만 아니라,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는 약간의 증표를 주어서 그 진부에 대한 의심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일은 그에 의해 행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들을 진리의 교회라고 부르는 상이한 기관들이 있었으며 아직도 있다.

카톨릭의 교리 문답은 말한다: “L’Eglise est la society des fideles etablie par notre Seigneur Jesus Christ, repandue sur toute la terre et soumise a l'authorite des pasteurs legitimes, principalement notre Saint Pere le Pape." "pasteurs legitimes”라는 말을 이해하자면, 교황을 그 수반으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어떤 기구에 의해서 함께 구속되는 특정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 정교회의 교리 문답은 말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땅위에 세워진 사회이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사제단의 명령과 지도 아래서, 하나의 신성한 교리에 의해서그리고 성례들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연합된다.”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사제단” 은 그리스 정교회의 사제단을 의미하며, 그렇고 그런 지위에 있는 특정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루터 교회의 교리 문답은 말한다: “교회는 성스러운 기독교 또는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있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며, 그들에게 성령께서 복음서와 성례들을 통하여 천국의 구원을 약속하시며, 교통하시고 주관하신다.” 이는 카톨릭 교회는 오류에 빠져 있으며, 구원의 진정한 방법들은 루터 교회에 있다는 뜻이다.

카톨릭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는 로마의 사제단과 교황과 일치한다. 그리스 정교회의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교회는 러시아 국교 및 사제단과 일치 한다.

루터교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는 성서와 루터의 교리 문답의 권능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일치한다.

보통, 기독교의 일어남을 이야기할 때, 기존 교회들 중의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은, 마치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으며 있었던 것처럼, 교회라는 단어를 단수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기구로서의 교회는 단 하나로 출현하지 않았다; 적어도 직접적으로 이 주장이 만들어진 두개의 교회들이 있었다.

신자들이 스스로들 사이에서 화합되며 모임이 하나라면, 스스로를 교회라고 선언할 필요가 없다. 신자들이 반대 파벌로 나누어 져서, 서로를 부인할 때야 비로소, 각 파벌이 자신들 만이 오류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진리를 입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나의 교회라는 개념은 두 편으로 나누어져서 논쟁을 할 때에 오직 생겨났으며, 각자는 상대편을 이단이라고 부르며, 그들 자신의 편을 오직 무류의 교회라고 인정하였다.

만일 우리가 기원 51년에 할례받지 않은 자들을 받아 들이는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은 오직 할례받지 않은 자들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 다른 교회-유대교인들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자신들은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카톨릭 교회가 지금 있다면, 그것은 오직 교회들-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루터 교회-이 있으며, 각자가 자신은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교회들의 무류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교회는 그것에 대해 일말의 현실성도 가지지 않는 오직 환상적인 상상일 뿐이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로서, 여러 단체의 사람들이 존재하였으며,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각자가 그리스도가 세운 유일한 교회이며, 자신들을 교회들이라고 부르는 모든 다른 것들은 오직 분파들이며 이단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가장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교회들-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루터교회-의 교리 문답들은 이것을 공공연히 주장한다.

 

I

 

카톨릭의 교리 문답에는 이처럼 되어있다: “교회의 바깥에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불신자들, 이단자들 그리고 종파분립론자 들이다.” 소위 그리스 정교회는 종파분립론자로 여겨지며, 루터교회는 이단이며, 교회 안에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카톨릭이다.

소위 정교회의 교리 문답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정교회는 하나의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이해되며, 이것은 보편적 교회와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 교회와 다른 종파들에 대해서는 (루터교회와 나머지는 그들은 심지어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는다), 하나의 진정한 교회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그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카톨릭과 루터교는 교회의 바깥에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정통교회만 있다.

루터교의 교리 문답은 말한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연구되고 사람이 더한 것들과 섞이지 않으며 성례식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함으로써 알려질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어떤 것이든 더한 모든 교회들은, 예를 들면 카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행한 것처럼, 교회 밖에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오직 신교도만 있을 뿐이다.

카톨릭 교회는 성령이 그들의 사제단에게 직접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정교회도 똑같은 성령이 그들의 사제단에게 직접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아리안들도 성령이 그들의 사제단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그들은 현재 권한을 가진 교회들과 똑같은 만큼의 권한으로서 이것을 주장한다.) 모든 종류의 신교도들-루터교회, 개신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스웨덴보기안 교회, 모르몬 교회-은 성령은 오직 그들의 공동체에 함께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듯이, 아리안과 그리스 정교회가 분열되는 때에 , 성령이 무너지는 교회를 떠나서 유일한 참교회에 머물렀으며, 이와 똑같은 권한으로 모든 교파의 신교 교회들이 카톨릭으로부터 그들의 교회가 분리되는 때에 성령이 카톨릭을 떠나서 그들이 고백하는 교회로 들어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행하는 바로 그것이다.

각각의 교회들은 그들의 신경(信經)을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직접 전달 경로로 추적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리스도로부터 파생된 각각의 기독교 신경은 특정한 전달 경로를 통해서 현재의 세대까지 내려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달된 모든 것들 중에서 그것 하나만이, 모든 다른 것을 제외하고서, 아무런 의혹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진리일 수 있다고 증명할 수 없다.

한 나무의 모든 가지들은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서 뿌리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각각의 가지가 하나의 뿌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제각기 가지가 유일한 것이라고 증명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교회의 경우도 정확히 똑같다. 모든 교회가 계승에 있어서,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그 교회의 신뢰성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확히 똑같은 증거를, 그리고 심지어 똑같은 기적들을 제시한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직 하나의 엄격하며 정확한 정의가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바라는 바 환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존재 해왔던 것이다)-교회는 완전하며 유일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속세의 당국들의 지원으로 도움받고, 강력한 단체들로 발전되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진정한 이해의 전파에 주된 장애물들이 되었다.

다른 방향으로 될 수 없었다. 기존의 종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별하는 주된 특징은 그것을 받아 들인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하여 점점 더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체의 완전하며 최종적인 이해와 깨달음을 주장하였다.

기독교 단체로서 교회의 잘못된 시각 안에서, 그리고 이단에 대한 경멸 안에서 자라난 우리들에게 그것이 비록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러나 사실인 즉, 오로지 이단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어떤 진리의 움직임, 다시말하면, 진정한 기독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이단들이 그들의 움직임에서 정지하고 또한 고정된 형태의 교회로 굳어져 갈때 진리의 기독교이기를 멈춘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이단인가? 모든 신학 작품들을 하나 둘씩 읽어보라. 그 모든 것들에서 이단은 그 자체가 먼저 정의(正意)로서 나타나는 주제이다; 모든 신학적 작품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리를, 그것을 싸고 있는 잘못된 교리들, 즉, 이단으로부터 구별된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서도 이단의 정의 같은 어떤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의 표제어로 “교리의 역사” (Paris, 1869)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학식있는 기독교 역사가 E. de Pressense가 이 주제를 다룬 내용이, 이단이라는 단어에 의해서 이해되는 정의(正意)와 같은 것의 완전한 결여의 예시로 도움이 될 듯하다. 이것이 그가 서문에서 말한 내용이다(p.3): “나는 그러하므로 초대 교부들에 의해서 그렇게 맹렬히 거부되는 경향들[이단들]에 자격을 부여할 우리의 권리가 논란이 됨을 안다. 이단이라는 단어의 사용 자체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공격인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공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모든 특유한 성격을 빼앗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가 콘스탄티누스의 시대 후에 교회가 실제로 종교적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을 이단들이라고 지목하여 그 권력을 남용하였다고 우리에게 말하지만, 그러나, 초기를 논하자면, 그는 말한다: “교회는 자유로운 단체이다; 그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많다. 오류와의 갈등에는 사상이나 감정외에 무기들이 없다. 하나의 통일된 형태의 교리는 아직 다듬어 지지 않았다;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견들이 동에서 서에서 자유로이 나타난다; 신학은 불변의 교리에 매여 있지 않다. 만일 이런 다양함의 한 가운데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많은 믿음들이 드러난다면, 우리가 그 안에서 본다고 해서, 즉, 현학적인 권력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틀이 잡힌 공식화된 체제라고 해서 정당화되지 않으며, 그러나 그것의 가장 확실한 본능 그리고 가장 자연스러운 표출에 대한 신앙 그 자체로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믿음의 기본적인 요소들에 나타나는 똑같은 의견 일치가 또한 특정한 경향들을 거부함에 있다면, 이들 경향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윈리들과 극렬하게 대치된다고 결론내림이 정당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거부된 교리에서 과거의 종교들 중의 하나의 독특한 면모들을 인식한다면 이러한 추정들이 확실함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그노시스주의 또는 이비언주의가 기독교 사상의 정당한 형태들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대담하게 기독교 사상의 존재 자체나, 그로 인해서 인식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성격이라도 를 부인해야 한다. 표면상으로는 그 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침식하고 있다. 플라톤의 시대에 아무도 감히 자신의 이름을 사상의 이론이 설자리가 없는 교리에 갖다 붙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에피쿠르스나 제노를 플라톤 학파의 신봉자라고 속이려 함으로써 그리스의 조롱을 부추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라고 불리는 종교 또는 교리가 있다면, 그 이단들도 있을 것이다라고 인식하자.”

 

저자의 전체 논리는 결국 이와 같다: 즉, 특정한 시간에 우리가 믿는 교리의 규준과 다른 모든 의견은, 이단이다. 그러나 물론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것이나 다른 것을 믿고 있으며, 어떠 장소, 어떤 시간에 따라 확실치 않은 어떤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은 여기에 귀결된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으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 있다.

소위 모든 이단은, 늘상 그러하듯이, 그들 자신의 교리를 진리로 여기고 있으면서, 교회의 역사에서 일련의 그들 자신의 교리의 예들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그들 자신을 대신하여 모든 프레상스의 주장들을 이용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교리를 하나의 진정한 기독교 교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모든 이단들이 행하고 있으며 언제나 행하였던 것이다.

 

유일한 이단(airesi"는 부분을 의미한다)의 정의는 이러하다: 사람들의 모임에 의하여, 그들 자신이 고백한 교리의 일 부분을 거부하는 어느 의견에, 주어진 이름이다. 더 흔한 의미, 즉 더 자주 이단이라는 단어에 주어지는 의미는-속세의 당국에 의하여 기초되고 지지되는 교회의 교리를 거부하는 의견을 의미한다.

매우 적게 알려져 있지만, 주목할 만하며 부피있는 작품으로서, 1729년 가프리트 아놀드의 “편견없는 교회 및 이단의 역사”가 있으며 이 저서는 이 주제를 정확히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으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로 이단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의, 모든 불법, 독단, 무의미, 그리고 잔인함을 지적한다. 이 책은 이단의 역사의 형태로서 기독교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시도이다.

 

서론에서 저자는 일련의 문제들을 제출한다: (1) 이단들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하여; (2) 그들이 이단들로 만든 사람들에 대하여; (3) 이단적인 백성들 자체에 대하여; (4) 이단들을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그리고 (5) 이단들을 만드는 목적과 결과.

이런 요점들 각각에 대하여 그는 열개 이상의 질문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들은 뒤에 유명한 신학자들의 작품들로부터 내어 놓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 대신에 독자들에게 전체 책의 설명들로부터 기본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만든다. 이러한 질문들의 예로서, 여기에 또한 해답들이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지만, 나는 다음 내용을 인용할 것이다. 네번째 표제어 아래에, 이단들이 만들어지는 방법들에 관하여, 그는 질문들(일곱번째) 중의 하나에서 말한다:

“가장 뛰어난 이단 제조기들과 그런 기술의 달인들은 바로 이들 지혜로운 자들이며, 아버지는 이들- 다시 말하면, 위선자들, 파리새인들, 그리고 율법사들, 그야 말로 하나님도 모르며 왜곡된 사람들-로부터 그의 비밀을 숨겼다 (질문 20-21)는 것을 모든 역사가 보여 주지 않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부여받았으며, 순수한 기독교의 시대에 높은 영광의 자리에 앉힐 바로 이 사람들이, 기독교의 부패된 시대에 위선자들과 시기하는 자들에 의하여 쫓겨나고 비난받지 않았던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가 쇠퇴할 때 자신들을 무엇보다도 높였으며, 가장 순수한 기독교의 선생들이라고 여겼던 사람들, 바로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시대에 가장 수치심을 모르는 이단자들이며 적그리스도라고 여겨지지 않았던가?”

그는, 이 질문들 중의 다른 것들 사이에서, 교회로부터 요구되는 바와 같이, 신앙에 대한 언어적 표현, 그리고 그로부터 멀어짐이 이단으로 여겨지는 이탈이, 결코 신자들의 종교적 개념들을 완전히 망라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특정한 말로서 신앙의 표현을 요구함은 지속적을 이단을 생산하게 된다고 하는 이론을 설명한다, 그리고 질문 21에서 말한다:

“그리고 만일 하늘의 사업들과 사상들이 어느 사람에게 너무나 위대하고 심오하여 그것들을 표현할 적합한 말들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완벽한 정확함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 그를 이단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질문 33:

“초기에 기독교인들은 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행위와 마음으로 서로를 판단하였으며, 이단자들로 불리는 두려움 없이 그들의 생각들을 표현할 완벽한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이단이 없었다는는 것은 사실이 아니던가; 성직자가 누군가를 제거하거나 멸망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개인의 믿음에 의혹을 던지고, 그에게 이단의 옷을 입히고, 이런 방법으로 그에 대한 비난과 제거를 가능케하는 것이 가장 쉬우며 가장 평범한 교회의 절차들이 아니던가?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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