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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4 장 학자들에 의해서 오해되는 기독교 1

好學 2011. 10. 15. 23:02

 

제 4 장  학자들에 의해서 오해되는 기독교 1

 

 

CHRISTIANITY MISUNDERSTOOD BY MEN OF SCIENCE.

 

-종교들 일반에 관한 학자들의 태도-

종교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류의 삶에서 그것의 중요성은 무엇인가-기독교, 삶에 대한 신적인 개념의 표현-과학자들에 의한 기독교의 오해, 그들은 기독교를 그 외적인 표상들로서 연구하다, 삶의 사회적 개념의 입장에서부터 그것을 비판함에 기인하다-여론, 이런 오해로부터 초래되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은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실천할 수 없다-복음서에서 삶에 대한 천국의 개념의 표현-기독교에 대한 과학자들의 틀린 생각들, 그들이 오류가 없는 비평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다-그것으로부터 기독교의 교리에 관해서 두가지 오해가 나오다-첫번째 오해, 가르침은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삶에 관한 사회적 이론으로부터 다른 방법에서 삶을 통제하는 기독교 종교-기독교는 이상을 들지만 명령은 내려 놓지 않는다-사람의 동물적인 힘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힘의 의식을 더한다-기독교는 들려진 이상이 오직 명령으로서 오해될 때 삶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이상은 낯추어질 수 없다-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은 움직임이다-이상과 가르침-두번째 오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인류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대체함-과학자들은 그들의 인류에 대한 봉사의 교리를 기독교와 동일하다고 상상하다-인류에 대한 봉사의 교리는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삶에 기초하다-인류애 대한 사랑, 논리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유추되다,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류애는 허구이기 때문이다-기독교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추, 그 대상을 전체 세상에서 찾는다, 인류애 만이 아니다-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하여 살도록 가르친다-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며, 하나님을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사랑으로 인식한다.

 

이제 나는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가로막는 다른 시각-과학적인 시각-에 대해 말할 것이다.

 

성직자들은 기독교를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것으로부터 조작한 버전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의 시각을 그들은 유일한 오류가 없는 진실한 것으로 여긴다.

 

과학자들은 기독교를 오직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교회들이 견지한 강령으로서 여긴다; 그리고 이들 강령들이 기독교의 모든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들은 그것을 시대가 지나서 낡아 버린 종교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분명히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먼저 일반 종교들이, 특히 인류의 삶에서 기독교적인 종교가 실제로 견지하는 입장에 대한, 그리고 과학에 의해서 그들에게 부여된 의미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여야 한다.

 

각자의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에 관한 약간의 이론을 가짐이 없이 살 수없으며, 비록 가끔 무의식적이지만, 언제나 자신의 삶에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서 자신의 행위를 형성하는 것과 똑같이, 비슷한 조건들-민족들-에서 사는 사람들의 교제들 역시 그들의 연관된 삶의 의미에 대한 이론들과 그러한 이론들로부터 따라오는 행위에 대한 이론들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개개의 사람으로써, 그가 성장에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설 때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의 철학을 바꾼다, 그리고 성인은 그것에서 어린이와는 다른 의미를 보게되는 것처럼, 사람들-국가들(민족들)의 교제들 역시 그들의 삶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으로부터 따라오는 행위를 바꾸게 되어 있으며, 그들의 발전과 일치하게 되어 있다.

 

이점에 대하여, 개인 사람과 전체로서의 인류의 차이는, 삶의 시각을 형성함에서 그가 진입하는 삶의 새로운 기간 및 그로부터 초래되는 행위에 적합함으로써, 자신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으로 혜택을 보며, 그 사람들은 이미 그가 진입하고 있는 성장의 단계를 통과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이러한 도움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밟지 않은 길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고, 삶을 어떻게 깨달아야 할지, 그리고 그것이 진입하는그리고 전에 아무도통과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물어 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자식들을 가진 사람이 그가 어릴 때처럼 삶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 높은 인구 밀도, 사람들 사이의 통신의 확립, 자연과 투쟁하는 방법들의 개선, 그리고 지식의 축적을 직면함에 있어서, 역시 인류는 삶을 옛날처럼 바라볼 수 없으며, 새로운 삶의 이론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입하였거나 진입하고 있는 새로운 환경들에 적응하여 그 이론으로부터 행위가 따를 것이다.

 

이러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류는 인간의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사람들을 생산하는 특별한 힘을 가진다-모든 이전 것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형태의 행위들이 동반되는 삶의 이론을 말함이다. 인류가 진입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인류에게 적합한 이러한 삶의 철학,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되는 행위의 형성이 소위 종교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첫번째로, 종교는, 과학이 상상하는 것처럼, 한 때 인류의 발전과 함께 하다가, 뒤에 가서 인류에게 필요가 없어져 버린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인류의 삶에 내재된 상징이며, 다른 시대 만큼이나 현재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인류에게 내재된 것이다. 두번째로, 종교는 언제나 미래의 행위에 대한 이론이지 과거의 이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징들을 조사함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각각의 종교적인 가르침의 본질은 ,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자연의 힘들에 관한 상징적인 표현에 대한 욕구나, 이러한 힘들을 두려워함이나, 기적을 갈망함이나, 그것이 나타내는 외적인 형식들에도 있지 않다; 종교의 본질은 새로운 삶의 이론의 발견하기 위하여 인류가 반드시 따라가며 움직여야 하는 삶의 길을 예견하고 가리키는 사람들의 능력에 있으며, 그 결과, 인류 전체의 미래의 행위는 변화되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과 다르다.

 

인류가 반드시 따라가며 움직여햐 하는 길을 예견하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소간에 흔하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서, 이러한 능력이 특별히 강한 사람들이 있어 왔으며, 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던 것에 분명하고 명확한 표현을 주었으며, 그리고 새로운 방향의 행동이 수백년 그리고 수천년 동안 이어질 삶의 새로운 철학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삶의 철학들에 대하여 우리는 세가지를 안다; 두가지는 인류에 의하여 이미 통과하여 왔고, 그리고 세번째는 이제 우리가 기독교를 통하여 지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철학들은 세가지, 그리고 셋이다, 이유인 즉, 우리가 임의적으로 여러가지 삶의 이론들을 이 세가지 표제 밑에 모아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행동들은 언제나 이 세가지 삶의 시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세가지 방법 말고 다르게 삶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삶에 대한 세가지 시각들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삶에 대한 개인의, 또는 동물적인 시각을 받아 들임; 두번째는, 삶에 대한 사회 또는 이교적 시각을 받아 들임; 세번째는, 삶에 대한 전 세계적, 또는 신적인 시각을 받아 들임이다.

 

삶의 첫번째 이론에서, 사람의 삶은 자신의 하나의 개체에 제한된다; 삶의 목적은 이런 개체의 의지를 만족시킴이다. 삶의 두번째 이론에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의 개체에 국한 되지 않으며, 개인들에 의한 특정한 사회들이나 계급들까지 확대된다: 종족, 가족, 씨족, 민족에게; 삶의 목적은 그들 모임들의 의지를 만족시킴으로 제한된다. 삶의 세번째 이론에서, 사람의 삶은 개인들에 의한 사회들이나 계급들에 제한되지 않으며, 삶의 원리 및 근원까지 펼쳐진다-즉, 하나님까지.

 

이러한 삶의 세가지 개념들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였던 모든 종교들의 토대를 형성한다.

 

야만인은 오직 자신 안에서의 삶과 개인적 욕망을 인식한다. 그의 삶에 대한 관심은 자기 하나만에 집중된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자신의 욕망들을 가장 완전하게 만족시킴에 있다. 그의 삶의 동기가 되는 힘은 개인적인 즐거움이다. 그의 종교는 자신의 신에게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신들을 숭배하며, 그 신들이 오직 그들의 개인적 목적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로 상상한다.

 

문명화된 이교도는 삶을 자신 안에서 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들에서 인식한다-부족, 씨족, 가족, 왕국에서-그리고 이들 사회들을 위하여 그의 개인적 선을 희생한다.그의 삶의 동기가 되는 힘은 명예이다. 그의 종교는 그에게 동맹이 되어 있는 사람들-그의 가족의 시조, 그의 선조들, 그의 통치자들-의 명예를 높임에 있으며, 그의 씨족, 그의 가족, 그의 민족, 그의 정부의 배타적인 보호자들인 신들을 숭배함에 있다.

 

삶에 있어서 신적인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체, 그리고 개체들의 사회들에서(가족, 씨족, 민족, 부족, 또는 정부에서)가 아니라, 삶의 영원하며 죽지 않는 근원에서-하나님에서-삶을 인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개체, 가족, 그리고 사회의 행복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삶의 동력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의 종교는 행함와 전체 교리의 진리-하나님-에 대한 숭배에 있다.

 

인류 전체의 역사적 존재는 다름이 아니라, 개인적 동물적 개념의 삶으로부터 사회적 개념의 삶으로 변화, 그리고 사회적 개념의 삶에서 신적인 개념의 삶으로 변화이다. 옛날 사람들 전체의 역사는, 수천년을 지속하다가 로마의 역사와 함께 끝이 나는, 동물적 개인적 시각의 삶에서 사회적 시각의 삶으로 변천하는 역사이다.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출현 시대로부터의 전체 역사는,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통과하고 있으며, 사회적 시각의 삶에서 천국의 시각의 삶으로 변화하는 역사이다.

 

이 시각의 삶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은 바로 그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위한 안내이며, 사실적이고 이론적인 우리의 모든 행위의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소위 위선되게 일컬어 지는 과학자들, 의사 과학자들은 오직 그것의 외적인 것들을 바라보면서 시대에 뒤떨어 졌으며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오직 교리적인 측면으로 축소하여-삼위일체, 대속, 기적들, 교회, 성례, 등등의 교리-과학자들은 그것을 오직 인류에게서 일어난 무수히 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이제, 역사에서 그 역할을 다하였으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 과학과 진리의 계몽의 빛 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 커다란 경우들에 있어서, 인류의 가장 심각한 오류들의 근원을 형성하는 것 위에 와 있다. 저급한 수준의 깨달음에 있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현상들과 접촉할 때, 그것들을 이해하며, 그 주제를 반드시 바라보아야 하는 관점까지 자신들을 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에, 그것을 낮은 관점에서 판단하며, 그들이 토론하는 것에 대하여 적게 알면 알수록, 그들은 더 많은 확신으로 그리고 주저함이 없이 그것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삶에 있어서 낮은 관점의 국가 개념으로 부터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바라보면, 이 교리는 단지 인도의 금욕주의, 스토아 및 네오플라톤 철학, 그리고 비현실적인 반사회적 환상들의 불확실하고 조리없는 결합으로 보이며, 그것은 우리 시대에 아무런 중요한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의 전체 의미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르침의 외적인 표상들에 집중된다-카톨릭에서, 신교에서, 특정한 교들에서, 또는 속세의 권력과의 갈등에서. 이러한 현상들에 의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짐작하는 것은 장님인 사람이 음악가들의 움직임들을 보고서 음악의 성격과 질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결과는 이 모든 과학자들은, 칸트, 스트라우스, 스펜서, 그리고 아래로 르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며, 그 말씀들의 의미, 목적, 또는 이유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이 대답을 만들어 내야하는 질문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 말씀들의 의미에 들어가려는 수고도 하지 않은 체, 기분이 나쁘다면, 그들은 그의 교리들에서 어떠한 타당함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아니면, 그들이 그 교리들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싶으면, 그들의 우월한 위치로부터, 그리스도가 정확하게 그들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려는 뜻이었다는 가정하에, 정중한 척하면서 그것을 교정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함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자신 만만한 사람이 그들이 자신들의 하수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그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가끔 그들의 동료들의 말들도 덧붙이기도 한다: “그렇다, 당신은 이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교정은 언제나 더 높으며, 신적인 개념의 삶의 가르침을 더 낮은, 국가 개념의 삶의 수준으로 깎아 내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흔히 말한다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너무 과장되어 있다; 그것을 상당히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즉, 우리의 삶의 방식에 의미가 없으며 불필요한 것을,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그 교리는 그들의 힘으로서 가능하며 합당한 것을 사람들로부터 요구하는 것보다 나쁘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있는 해석가들이 주장한다, 그리고 오래 전에 주장한 것을, 그리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유태인들-에 의해서 주장될 수 밖에 없던 것을 반복한다.

 

우리 시대의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히브리의 율법-이에는 이, 그리고 눈에는 눈-은 정당한 보복의 율법으로, 그리스도가 그것 대신에 가르친 성스러운 법보다 오천년 전에 인류에게 알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직설적으로 깨닫고 그것에 대한 그러한 깨달음에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에 행해진 모든 것은, 모든 진정한 기독교인들, 모든 기독교의 성자들에 의하여 말해지고 행해진 모든 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형태로서 지금 세상을 개혁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단순히 과장이며, 말할 가치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기독교에 대한 1800년의 교육 뒤에 문명세계는, 가장 진보된 사상가들에 의하여 설명되듯이,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이다; 삶에 관련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비이성적이고, 과장이며, 사람의 본성과 일치되는 진정한 합법적인 의무들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거부한 복수의 교리는, 그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그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우리에게 더욱 실용적으로 유익하다는 확신을 견지한다.

 

학자들에게는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는 과장되었으며 심지어 비이성적이다. 기독교는 그것이 없는 것이 훨씬 좋다, 그들에 의하여 설명되듯이,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깊이 있게 관찰해 보지도 않고서 그들은 생각한다.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과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원의 반지름이 같다는 주장이 원의 정의에서 과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므로, 이런 조건, 즉 원 둘레의 각 점은 가운데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사람과 정확히 같이 행동한다. 그리스도의 악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나, 삶의 필요에 맞추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암시한다.

그리고 확실히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가르침이 삶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규칙이며, 이제 사람들이 1800년 동안 살고 있는 새로운 상황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삶의 새로운 행위에 대한 정의에 상응한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말하고자 한 것을 믿지 않는다; 또는 그가 산상수훈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말한 것은 우연히, 또는 그의 지능이 모자라거나 또는 교양이 부족해서 그들에게 말한 것처럼 보인다.

 

마태복음 6장 25~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누가복음 12장 33~34절 :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너의 가진 모든 것을 팔고 나를 좇으라;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느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생명은 자신의 뜻을 행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행함이라.

 

이 모든 원리들은 낮은 개념의 삶의 관점으로부터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적용성이 없는 충동적인 열정의 표현처럼 보인다. 이 원리들은, 그러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이론으로부터 나온다, 마치 한 개인의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 바치며, 개인의 삶을 자신의 국가의 방어에 희생한다는 원리들이 삶의 국가 이론에서 나오는 것처럼 똑같은 논리이다.

 

국가 개념의 삶의 사람이 야만인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반성하라, 자신을 회개하라! 너의 개인적인 삶은 진리의 삶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삶은 비참하고 잠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그리고 개인들, 가족, 씨족, 부족, 또는 국가의 연속인 삶은 계속해서 살아 갈 수 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체를 희생하여 가족 또는 국가의 삶을 위하여야 한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기독교의 교리는 사회적, 국가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에게 말한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지금 존재하다가 내일이면 사라지는 이 우연하며, 개인적인 삶은 영속성이 없다, 어떤 외적인 수단이나, 삶을 어떻게 영위하더라도, 연속성이나 영속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하라. 당신이 살고 있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가족의, 사회의, 국가의 삶은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깨닫도록하라. 진리의, 이성적인 삶은, 가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삶의 근원-아버지-에 참여하는 방법에 의하여서만이 오직 가능하다;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삶에 병합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은 틀림없이 그러하며, 복음서의 모든 말씀에서 나타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의 시각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부정확함과 오류성을 밝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런 삶의 시각을 터득하지 않고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더욱이 낮은 관점에서 높은 면의 주제를 비난할 수 없다. 바닥으로부터는 정점의 효과를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시대의 유식한 비평가들이 하려고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제를 분석함에 있어서 확실히 오류가 없는 방법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정통교회의 신자들의 잘못된 사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의 소위 과학적인 비평 방법들을 적용한다면, 그들의 결론이 정확함에 대한 의심이 없다고 상상한다.

 

상상속에서의 오류가 없는 과학의 방법으로 이러한 주제를 시험하는 것은 불신자들,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를 이해함에 대한 주된 장애 이다. 이로 인하여 과학자들에 의해서 기독교에 대해 만들어진 잘못들이 나오게 되며, 특히 무엇보다도 그들이 기독교를 정확히 이해함을 방해하는 두가지의 오해들이 있게된다. 이들 오해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은 실천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즉, 그것은 행위의 규칙으로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또는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사회 안에서 그 실천이 가능한 한계에 맞도록 변형되고 적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오해는 기독교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는, 즉, 그에 대한 봉사는, 애매하여 신비스러운 원리이다, 그것은 아무런 정확한 사랑의 대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로므로 좀더 정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및 인류에 대한 봉사의 원리들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리를 따름이 불가능하다는 첫번째 오해는, 국가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들이 그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기독교가 사람들을 지시한다는 기준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완성의 원리를 그 삶이 명령받아야 하는 법으로 받아들임에서 초래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른 것은 이 가르침에 의해서 요구되는 모든 것의 오나성이 삶을 끝장 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한다. “한사람이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실행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한다면, 인류는 끝이 날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내일을 위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그리고 무엇으로 입을까, 우리의 삶을 지키지 않으며, 힘으로 악을 저항하지 않으며, 우리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 놓고, 그리고 완전한 순수함을 지킨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하는 완성의 원리로 받아 들인다면, 삶의 국가적 원리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세금을 내야 하는 법을 이행해야 하며, 기타의 경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 그들은 확실히 옳다.

 

오해는 정확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낮은 개념의 삶에 기초된 가르침이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식과 다르게 사람들은 인도한다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국가적 개념의 삶의 가르침들은 명령이나 법률을 정확히 실천함을 요구함으로써 사람들을 인도한다.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완성으로 그들을 가리킴으로써 사람들을 인도하며, 현재에 있어서 자신의 불완전 정도가 어떠하든지, 각자의 사람은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이를 위해서 노력한다.

 

국가의 원리라는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원리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오해는, 그리스도가 지적하는 완성은 완전히 달성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이 모든 것들이 실천된다면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스스로 묻는다 (마치 국가의 법률이 달성되리라는 가정에서 똑같은 질문을 하듯이) 는 사실에 있다. 이 전제는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완성은 무한하며 결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완성은 결코 달성될 수 없으며, 절대적, 무한한 완성을 향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행복을 더해주며, 그리고 이 행복이 그렇게 해서 무한으로 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봄으로써, 그의 원리를 규정한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이 아니라 동물적인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런 관계로, 이런 동물적 힘의 움직임에, 그리스도는, 이를테면, 새로운 힘-신적인 완성에 대한 인식-을 적용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이 두가지 힘들의 결과에 의하여 움직임을 이끌어 간다.

 

인간의 삶이 그리스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세찬 강물위에 떠있는 작은 배가, 그 경로를 흐름에 거의 정확히 반대로 이끌 때, 그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가 정과 똑같다.

 

그리스도는 평행 사변형의 양쪽 면들, 즉, 사람의 삶이 구성되는 두개의 영원한 파괴할 수 없는 힘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즉, 사람의 동물적 본능의 힘과 하나님에 대한 혈연관계를 의식하는 힘의 존재를 의식한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언제나 그대로 있으며, 그리고 사람의 의지와는 별개인 동물적인 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는 오직 신적인 힘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그것을 좀 더 가까이 알기를 요구하고, 그것을 저해하는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하며, 그리고 그것을 좀 더 강렬한 상태로 끌고간다.

 

이 힘을 자유롭게 하며,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의 참된 삶이 존재한다. 참된 삶은, 이전의 종교들에 의하면, 명령들, 즉, 법을 실행함에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것은 각각의 사람들 앞에 제시되며,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 안에 인식되는 된 신적인 완성에 훨씬 더 근접함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뜻의 완벽한 융합에 끊임없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감에 있고, 그곳으로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그 융합, 그리고 그것의 달성은 우리가 아는 삶의 파괴일 것이다.

 

신적인 완성은 그것을 위해 사람의 인생이 언제나 애쓰며, 언제나 다가 가고자 하는 점근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무한에 가서야 도달될 수 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이상을 지향하는 것을 명령의 제시로서 착각할 때에 오직, 삶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 같다. 오직 그럴 때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제시된 원리들이 삶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원리들은, 반대로, 진리의 삶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이 원리들이 없이는 진리의 삶은 가능할 수가 없다.

“너무 많이 기대해서는 안된다,” 라고 사람들이 기독교의 요구조건들을 토론할 때에 흔히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절대적으로 아무런 생각을 갖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복음서에서 말하는대로, 그러나 오직 그것을 위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정해진 양만큼은 주어야 한다; 우리는 순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방탐함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아내와 자식들을 용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그들에 대한 너무나 큰 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등등.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급류와 싸우고 있으며, 흐름에 맞서서 그의 방향을 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흐름을 거슬러서 노를 저어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건너려면,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반드시 떠내려 가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현실적으로, 그가 가고자 하는 곳에 도달하려면, 그는 반드시 훨씬 더 위쪽을 향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 노를 저어야 된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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