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믿는 사람들에 의해 오해되는 기독교 2
그는 나중에 이야기 한다, “비록, 소위 이단자들 사이에 죄악들과 오류들이 있었음이 사실일수도 있겠지만, 성실하고 양심적인 어떤 중요 인물 중에 성직자들이 시기 또는 다른 이유들로서 멸망시키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여기에 인용된 (즉, 교회와 이단의 역사에서) 무수한 예들을 보건대 적지않게 진실하며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거의 이백년 전에, 이단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똑같은 개념이 지금까지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교회의 개념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단은 교회의 다른 면이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단의 개념이 있다. 교회는 자신들이 오류가 없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단은 교회의 진리의 무류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이단은 그의 모습을 교회에 드러낸다. 그것은 화석처럼 되어버린 교회 권력을 타파하려는 노력이다. 교리에 대한 살아 숨쉬는 이해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이 이단자들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터툴리안, 오리겐, 아우구스틴, 루터, 휴스, 사보나롤라, 헬치스키, 그리고 나머지들도 이단자들이었다. 그 반대로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에 대한 봉사는 완벽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의 가르침에 대한 끊임없이 성장하는 깨달음 그리고 가르침에 끊임없이 가까워지는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오직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기 때문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완전히 깨달으며 그것을 달성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더우기 그는 사람들의 모임을 위해서 이것을 주장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어느 정도까지의 깨달음이나 완성에 도달하였다 할 지라도, 그는 언제나 깨달음과 실천의 부족을 느끼며, 언제나 더욱 충만한 깨달음과 실천을 향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나 어떤 사람들의 모임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완전한 깨달음과 실천을 지닌다고, 그나 그들에 대하여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신 자체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교회들이 줄을 이어가며 언제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신에 이질적인 단체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에 직접적으로 대립하여 왔으며,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볼테르는 너무나 당연히도 교회를 ‘수치’라고 부르며;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소위 기독교의 종파들이 교회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죄많은 여자로 여겼다; 너무나 당연히 교회의 역사는 가장 큰 잔인함과 두려움의 역사이다.
비록 그들이 바른 길로부터 약간 어긋나긴 했겠지만 줄줄이 존재하는 교회들이,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들의 기초로서 기독교의 원리들을 가진 단체들이 아니다. 줄을 이은 교회들이, 그들 자신의 무류성을 주장하는 모임들이면서도, 기독교에 적대적인 단체들이다. 이름을 제외하고는 교회로서의 교회와 기독교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서로에게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며 반목하는 두가지 원리들을 대표한다. 하나는 자만, 폭력, 오만, 정체 그리고 죽음을; 다른 하나는 온유, 회개, 겸양, 진보 그리고 생명을 대표한다.
우리는 이 두가지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모든 종파들의 교회들의 종들은, 특별히 최근의 시대에는, 자신들을 기독교에서 진보의 옹호자로 나타내려 시도했다. 그들은 양보하며, 교회에 미끄러져 들어온 악습들을 시정하기를 바라고, 그리고 이러한 악습들을 이유로해서, 우리들이 기독교의 교회의 원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그것만이 모든 사람들을 함께 연합하여 묶으며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될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교회는 결코 사람들을 연합하여 함께 묶은 적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사람들 간의 분열의, 그들이 서로를 증오함의, 전쟁들의, 전투의, 이단 탄압의, 성 바돌로매의 대학살 등의 주된 원인이었다. 그리고 교회들은 결코 사람들과 하나님의 중재자로서 봉사하지 않았다. 그러한 중재는 필요치 않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금지되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을 직접 그리고 즉시 각자의 사람에게 밝혔다. 그러나 교회들은 죽은 형식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웠으며, 하나님을 나타내기는 커녕, 그들은 그를 사람들의 눈에 흐리게 하였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해함으로서 기원되었으며 이런 오해를 그들의 요지부동으로 유지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들에 대한 모든 진실된 깨달음을 학대하고 인식하기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것을 헛되이 숨기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 가리켜진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마다, 그들의 멸망을 향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파들의 근래의 교회 작가들이 말하는 기독교의 진리들과 도덕들을 말하는 설교들과 기사들을 듣고 읽으면; 수세기 동안 다듬어져 온 이런 훌륭한 주장들과 권고들 그리고 고백들을, 이것들은 때로는 진지한 고백같아 보이겠지만, 듣고 읽으면, 우리는 교회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일 수 있는지 쉽게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말한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크리서스톰, 페넬론, 버틀러,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말하고 싶을 것이다, “교회들이 기독교로부터 벗어났을 수도 있다, 그들이 잘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쳤듯이, 나무를 판단하려면 그 열매를 보아야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열매가 악함을, 그들 행위의 결과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임을 보면, 사람들이 아무리 선하더라도-이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교회의 일은 기독교적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선함과 장점은 사람들의 선함과 장점이며, 그들이 섬기는 단체의 선함과 장점이 아니다. 모든 선한 사람들, 예를 들면, 아시시의 프란시스, 그리고 세일즈의 프란시스, 우리의 티혼 자돈스키, 토마스 켐피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단체를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섬기고 있는 오류의 영향 아래에 있지 않았었다면 그들은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과거를 말해야 하며 과거로부터 판단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 제시되고 잘못 깨달아 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교회들, 그들의 원리들과 그들의 관행들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교회들은 오늘날 위 앞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실제적 행위, 그들의 사람들에 대한 영향을 기준으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들의 실제적인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은 무엇인가? 우리들 사이의 교회, 모든 종파들의 가톨릭교와 신교 사이의 교회에 의하여 무엇이 행해지는가? 그리고 그들의 실제적 작업의 결과는 무엇인가?
소위 러시아 정교회의 관행은 모든 이에게 평범하다. 그것은 숨김의 가능성이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엄청난 사실이다.
이 러시아 교회-이 광대하고, 엄청나게 활동적인 단체로서, 이는 오십만이 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천만 루불을 지출하게 한다-의 실제적인 업무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교회의 실제적인 업무는 상상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여 수억의 러시아 사람들에게 오늘날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그들의 멸종된 유물을 주입시키는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아무도 이제 믿지 않으며, 그리고 심지어 이러한 거짓된 믿음들을 선파하는 의무를 가진 자들도 믿지 않는다.” 비잔틴 신학, 삼위일체, 성모마리아, 성례식, 은혜, 등등의 멸종된 개념들, 우리에게 이질적이며,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교리를 주입시키는 것이 러시아 교회의 오직 한 부분의 업무를 형성한다. 그 관행의 다른 한 부분은 단어의 가장 직설적 의미 그대로 우상숭배의 유지; 성스러운 유물들 및 성상의 숭배, 그것들에 제물을 바치며, 기도에 대한 그것들의 대답의 기대에 있다. 나는 그들의 신학적인 잡지들에서 과학적인 또는 자유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설교된 것이나 기록된 것을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광활한 러시아 땅을 통틀어서 백만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적으로 성직자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은 무엇을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꾸준히, 어느곳에서나 똑같이, 쉬지않고 가르치는가? 그들이 소위 기독교 신앙 대신에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는가?
나는 한 어린이의 출생과 함께 처음부터 시작 할 것이다. 아이가 출생할 때, 그들은 아이와 어머니를 정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기도문을 인용한다, 마치 이 기도가 없으면 새로 태어난 아이의 어머니는 부정한 것처럼. 이 일을 행하기 위하여 사제는 성자들 (사람들은 평범하게 신들이라고 부른다)의 우상 앞에서 아이를 품에 안고서 악령을 쫓아내는 말씀을 읽는다, 그리고 이것이 그 어머니를 정화시켜 준다. 그리고 나서 이행하지 않은 경우의 처벌에 대한 겁을 주면서 어린이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부모들에게 권고되며, 심지어 그들로부터 요구되기도 하는데, 즉, 사제에 의하여 물에 세번 담궈지며, 동시에 ,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말들이 크게 소리내어 지고, 그리고 이젠 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행위들이 행해진다; 신체의 여러부분들이 기름으로 문질러지며, 머리카락이 잘라진다, 동시에 보호자들은 가상의 악을 불어서 내 뱉는다. 이 모든 것은 아이를 정화하고 그를 기독교인으로 만드는데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이에게 성례식을 실시하도록, 즉, 그에게 빵과 포도주로 흉내낸 그리스도의 몸을 먹도록하며, 그로 인해서 아이는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된다고 주입받게된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면서 반드시 기도하는 법을 배우도록 권고 받는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성모마리아, 그리고 성자들의 얼굴을 그린 나무 판자 앞에서 앉으며, 그의 머리와 전체 몸을 숙이고, 그의 앞 이마, 어깨, 그리고 배를 그의 오른 손과 함께 땅에 대며, 손가락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잡고서 슬라브어 몇 마디를 중얼거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지는 가장 흔한 말은: 성모 마리아여 당신을 즐거워 합니다, 등, 등.
그리고 아이가 키워지면서 어떤 교회나 성상을 보더라도 그는 똑같은 행위를 반복해야한다-즉, 성호를 그어야 한다는 것을 주입받는다. 그리고 그에게 주입되는 것은 휴일들 (휴일들은 그리스도가 태어났으며, 비록 아무도 그것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가 할례를 받았으며, 성모마리아가 죽었고, 끊임없이 십자가를 메었으며, 성상들이 세워지고, 미친 사람이 환영을 보았고, 등등)-휴일이 되면 그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가야한다, 그리고 양초를 사서 성상들 앞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헌금을 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한다, 그리고 작은 빵들을 삼각형의 조각들로 자르며, 건강과, 황제와 주교의 번영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일들을 위해서 여러번 기도한다, 그리고 십자가와 사제의 손에 입맞춤한다.
이러한 의식들 말고도, 적어도 일년에 한번 고백하여야 한다고 주입받는다. 고백한다는 것은 교회에 가서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타인에게 자신의 죄를 완전히 알림으로써 그들로부터 자신을 정화시킨다는 이론이다. 그러고나서 그는 조그만 숫가락으로 포도주에 적신 빵 한조각을 먹어야 한다, 이는 그를 더욱 더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음은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 결합이 성스럽고자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교회에 가서 금속제 왕관을 쓰고 어떤 물약을 마시며, 노래소리에 맞추어서 테이블 주위를 세번 걷는다, 그리고나면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은 성스럽게 되며 그렇게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결합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주입받는다.
나아가 그에게 주입시킨다. 그의 삶에서 그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어느 날에는 버터나 우유를 먹지 마라, 그리고 다른 날은 죽은 자를 위해서 테드임과 레퀴엠을 불러라, 휴일에는 사제를 기쁘게하고 그에게 돈을 주어라, 그리고 일년 중 몇번씩 교회에서 성상들을 가져 오고, 그것들을 어깨에 매고 들판과 집사이들로 가라. 임종시에는 반드시 숫가락으로 빵과 우유을 먹지 않으면 안되며, 시간이 있다면 성스러운 기름으로 몸에 문지르는 것이 훨씬 좋다고 주입시킨다. 이것이 미래에 그의 행복을 보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이 죽음 뒤에는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하여 인쇄된 기도문을 그의 손에 놓아 두는 것이 좋다고 주입시킨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어떤 책을 죽은 사람의 몸 위에서 큰소리로 읽어주며, 특정한 시간에 교회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 좋다고 주입시킨다. 이 모든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의무적인 신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살피고자 한다면, 이 신앙에 따라서 세상에서 영혼의 구원의 가장 안전함이 교회와 수도원에 기부하며, 이런 방법으로 성직자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함으로서 구하여 진다고 가르침 받는다. 수도원에 들어감 역시, 그리소 유물들과 기적의 성상들에 입맞추는 것도 영혼의 구원을 위한 나은 방법이다. 이 신앙에 의하면 성상들과 유물들은 특별한 신성함, 권능 및 은혜를 교통하며, 그리고 심지어는 이런 물체들에 근접하거나, 그것들을 만져보며, 입맟춤 하고, 그것들 앞에 촛불을 가져다 놓으며, 그것들을 운반할 때 그 밑을 기어가는 것은 구원을 위해 효험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성스러운 것들 앞에서 테디움이 반복된다.
그러하므로 이것이, 다른 것들은 제쳐 놓고, 정교회라는 신앙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가장하여 교회의 모든 힘들과 함께 있어온 실제적인 신앙이다, 그리고 이제 특별한 정열로서, 사람들에게 주입시켜 준다.
정교회의 교사들이 그들의 가르침의 본질적인 부분을 다른 어떤 것에 둔다거나, 이 모든 것들은 없이 해도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오직 옛날의 관습이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거짓이다. 이것은, 그리고 오직 이것만이, 러시아의 전체 성직자들이 러시아 전체를 통틀어서, 최근 수년동안 특별한 정열로서 가르치는 신앙이다. 그 밖에 가르치는 것은 없다. 대도시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기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억의 사람들 중에서 이것이 행해지는 것이며, 이것이 가르쳐지는 것이며, 더 이상은 없다. 성직자들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힘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고 유물들과 성상들의 숭배는, 신학 작품들과 교리 문답들 안에 포함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것을 이론 및 실제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권력, 엄숙함, 장엄함 그리고 폭력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심어주려고 한다. 그들에게 위압을 가하면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믿도록 강요하며, 조바심을 내면서 이러한 야만적인 미신들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이 신앙을 지킨다.
내가 나의 저서를 출판하였을 때 내가 말했듯이, 악에 무저항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말씀 자체들은 나의 눈앞에서 수년 동안 조롱과 저속한 농담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것을 막기는 커녕, 심지어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조롱을 부추겼다. 그러나 이버스키 처녀상의 이름 아래 술취한 사람들이 모스크바에 신성모독을 받으며 끌려 다니는 추한 우상에 대하여 불경스런 말을 하는 실험을 해보라, 그러면 이들 똑같은 성직자들의 떠들썩한 분노를 유발할 것이다. 그들이 설교하는 모든 것들은 우상 숭배 의식의 외적인 준수이다. 그리고 이처럼 말하지 말라, 즉, 이것이 저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마태복음 23장 23절, 3절)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이었으며, 그들은 유럽에 처방되어 있는 대로 모든 외적인 의식들을 이행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의 말씀은 자비와 선함의 행위들을 가리키며,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 의 말씀은 그들의 의식의 준수와 그들의 선한 행위에 대한 무관심을 가리키며, 그리고 성직자들이 그것을 의식을 준수하라는 권고로 해석하면서 그 구절에 부여한 것과는 정확하게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다. 외적인 의식들과 진리와 선의 봉사는 대체적으로 결합하기 어렵다; 하나가 상대방을 배척한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대속, 성례식, 그리고 기도로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는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
산상 수훈인가 아니면 사도 신경(信經)인가. 우리는 두가지를 동시에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신경은 교회들에서 기도로서 가르쳐지며 읽혀진다, 그러나 산상 수훈은 심지어 교회들에서 읽혀지는 복음 구절 들에서도 제외된다, 그래서 전체 복음서가 읽혀지는 날들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집회에서 결코 그것을 듣지 못한다. 참으로, 그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사악하고 의미없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그는 인류에게 저류를 내렸으며, 자기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쳤으며, 인류의 일부를 영원한 고통에 처하게 하였다-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스도가 영광의 자리에 다시와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왼쪽 뺨을 돌려대라고 하고, 심판하지 말며, 우리에게 악하게 대하는 자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구약성서의 영감과, 다윗의 신성한 성격-다윗은 자신의 임종시에 그를 저주한 노인을 죽이라고 명령하였으며, 자신은 그를 죽일 수 없었으니 그에 대한 맹세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가득차 있는 유사한 잔학 행위들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사랑을 믿을 수 없다. 전쟁 및 사형 제도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교회의 교리를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동포애를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대속(代贖)이나 성례식들에 대한 신앙을 통한 구원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을 깨닫는데 자신의 모든 힘을 쏟을 수가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재능으로 구원될 수 없으며, 다른 구원의 수단들이 있다는 신성모독적인 교리에 대해 교회에 의하여 가르침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이러한 수단에 의존할 것이고,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믿는 것을 죄악이라고 그에게 확신시켜 준다.
각각의 교회들은, 대속과 성례를 믿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외한다; 정통 교회의 모든 가르침들의 대부분은 우상 숭배의 의식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지금 믿는 것처럼, 그들 나름대로 믿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의 전체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전통들을 빼앗을 수 없다. 이 주장 역시 오해를 한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로, 비록 그것이 똑같은 것을 전혀 아닐지라도, 과거에 지금 교회가 믿는 것같은 어떤 것을 믿었다. 성상들, 가정의 신들, 유물들, 그리고 자작나무 화환의 축제들에 대한 그들의 미신적인 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안에 아직도 언제나 심오한 도덕적 및 살아 있는 기독교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으며, 그것은 전체로서의 교회에 결코 있은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오직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에게만 있다. 그러나 정부와 교회가 그들에게 주입시킨 모든 편견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표자들 안에는 그러한 유치한 깨달음의 상태를 오래전에 벗어 났으며, 이는 오늘날 러시아에 들끓은 합리주의 종파가 각지에서 분출 하고 있음으로 증명되는 사실이며, 이에 대하여 교회는 이제 힘없는 싸움을 지탱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삶의 측면에 대한 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데도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차용하면서가 아니라 쇠퇴하여 버린 이교도들의 돌처럼 굳어버린 형식주의만을 그들에게 열심히 주입시고, 사람들이 그런 노력으로 기어나오고 있는 어둠으로 그들을 다시 밀어넣으려고 애쓰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그들이 믿는 것만을 오직 조금더 완전한 형태로 가르친다.,” 성직자들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다자란 병아리를 묶어서 다시 그것이 기어 나온 껍데기에 밀어 넣은 사람이 한 일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망상속에 가두고 그 마법의 원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지를 관찰하다 보면, 비록 그 결과가 그렇게 무섭지 않다면 우습겠지만, 나는 가끔 짜증스럽다,
첫번째 의문, 생각하기 시작하는 러시아인의 첫번째 의혹은 , 성상들에 대한 의문이다, 그리고 훨씬 더한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유물들이다: 그것들이 사실이고, 그 기적들이 그것들을 통하여 일어 난다는 것이 사실일까?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 의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답하는 그들의 주된 어려움은 주교들, 대주교들, 그리고 권력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유물들과 기적을 일으키는 성상들에 키스를 한다는 사실이다. 주교들과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왜 그들이 그렇게 행하는지 몰어보라, 그러면 그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사람들은 주교와 권력자들이 그렇게 행하므로 그것들에 키스한다.
오늘날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작업들에서 취하기 시작하는 현대화, 지식, 그리고 영성의 외적인 치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논문들, 그들의 신학적 잡지들, 그리고 그들의 설교들, 러시아 교회의 실제적 작업은 오로지 사람들을 거칠고 야만적인 우상숭배의 상태에 붙들어 두는데 있으며, 더 심한것은, 미신과 종교적인 무지를 강화시키고 전파하며, 우상숭배와 나란히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기독교의 살아있는 깨달음을 억압하는데 있다.
나는 언젠가 옵치 에르미타지의 수도사 서점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때, 나이많은 농부가 글을 아는 그의 손자에게 줄 책들을 고르고 있었다. 수도사가 유물들, 휴일들, 기적의 성상들, 시편집, 등의 계산을 강요하였다. 나는 그 노인에게 물었다, “손자가 복음서를 가지고 있소?” “아니오.” “그에게 러시아 성경을 주시오.” 나는 수도사에게 말했다. “그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오,” 그 수도사가 대답했다. 당신의 집에 우리교회의 요약집을 가지고 있소.
그러나 이것은 오직 야만적인 러시아에서의 이야기임을 유럼과 미국의 독자들은 알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는 정당하다, 그러나 오직 그것이 정부를 언급할 때이며, 정부는 러시아에서 우민화와 부패의 임무에서 교회를 돕고 있다.
유럽 어디에서도 어떤 정부가 그렇게 횡포하게 그리고 긴밀하게 지배적인 교회와 손잡은 곳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사람들의 타락에 있어서 속세 권력의 몫은 러시아에서 가장 크다. 그러나 러시아의 교회가 사람들에 대한 영향을 행사함에서 어떤 측면에서 어떤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교회들은 어디에서나 같다, 그리고 만인 카톨릭, 영국국교회, 또는 루터교회가 가까이에 러시아 처럼 고분고분한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러한 정부가 이익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교회로서의 교회, 그것이 어느것이던 간에-카톨릭, 영국국교회, 루터교회, 장로교-제각기의 교회들, 그것이 교회인 한은, 러시아의 교회와 똑같은 목적을 위해 분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한 목적은 그리스도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숨겨서, 그들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무도 부과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의 깨달음에 대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며, 그리고 중요한 의미는, 사람들의 비용으로서 뒷받침되는 사제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카톨릭은 그외에 무엇을 하였는가, 복음서를 읽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그리고 교회의 권력들과 무류성을 가진 교황에게 무조건 복종토록 요구함으로써, 그외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카톨릭이라는 종교는 러시아 교회의 종교와는 다른 것인가? 그곳에는 똑같은 외적인 의식, 똑같은 유물들, 기적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노틀담의 성상들, 그리고 똑같은 교회의 행렬들이 있다; 책들과 설교에서 똑같은 고상하며 모호한 기독교에 대한 토론들이 있으며,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똑같은 현재의 우상숭배를 지지한다. 그리고 영국국교회, 루터교회, 그리고 교회로 형성된 신교의 모든 종파들에서 똑같은 일이 행해지지 않는가? 그들의 집회에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든 의미를 상실한 4세기에 표현된 교리를 믿어야 하는 똑같은 의무가 부과되고, 유물들이나 성상들은 아니라도, 우상숭배, 안식일, 그리고 성서의 서한들에 대한 똑같은 의무를 부과한다. 언제나 기독교의 진정한 의무들을 숨기며, 그 대신에 외적인 숭배물과 위선적인 말로 바꾸려는 똑같은 행위들이 있으며, 그것은 특별히 그로 인하여 억압받는 영국인들에 의해서 잘 묘사된다. 신교에서 이런 경향은 특별히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이라는 구실이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현 시대의 부흥주의-부흥된 칼빈주의 및 복음주의, 그리고 구세군은 여기서 기원되었다-에서 정말로 똑같은 일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모든 교회들의 태도는 한결같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모든 교회의 종교 형태들의 불일치는, 물론, 왜 이런 불일치를 사람들로부터 숨기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들이 필요한가의 이유이다. 진정으로, 우리는 오직, 꼭 필수적으로 교육을 받지는 않았어도, 어떤 성인이 된 사람, 심지어 현 시대의 가장 단순한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들을 상상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요즘 어디에서나 유포되고 있는 지학, 물리학, 화학, 천지학, 또는 역사에 관한 사상들을 줏어 들었고, 그러면서 그는 맨처음 의식적으로 이들 사상들과 그가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입되었으며 교회들에 의해서 지속되어온 신앙개조(信仰箇條)들과 비교해 본다-하나님이 육일만에 세상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해보다 빛을 먼저 창조하였다; 노아는 모든 동물들을 그의 방주에 가두었다, 등등; 예수는 하나님이며 아들이다, 그는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 이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보상하려고 땅위에 내려왔다; 그는 죽음에서 일어났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있다가 구름을 타고 세상을 심판하러 올것이다, 등등. 이 모든 명제들은, 4세기경의 사람들에 의하여 다듬어 졌으며,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입술로서 이 말들을 반복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늘에 산다, 하늘이 열리고 어디에선가의 목소리가 어떤 것을 말했다, 그리스도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하늘의 어느 곳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구름위 어디로부터 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등등의 문장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늘을 단단하며 유한한 천장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늘을 만들었으며, 하늘이 열렸고,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거나 말거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모든 구절들은 도대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오직, 정말로 그들이 그래야 한다면,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 모든 구절들이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고 비유들이라도, 우리는 첫번째로 모든 성직자들이 그것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를 그 직설적인 의미에서 이해함을 고수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들 비유적인 해석들은 너무나 다양하여 어떤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가르쳐진 것과 똑같이, 교회의 교리를 믿고자 자신을 강제한다면, 교육과 복음서와 다른 종교 형태들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통신의 보편적 확산이 그렇게 함에 있어서 훨씬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로 제기된다.
현 시대의 사람은 오직 몇 푼을 주고 복음서를 구입해서 평범한 말씀들을 읽어 나가면 되므로, 아무런 오해가 있을 수 없다, 즉, 그리스도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느니라,” 또는 말씀하시기를 “기독교인은 이방인처럼 기도해서는 안돼며,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즉 자신의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 해야 되느니라,”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어떤 사람에게도 선생 또는 아버지라고 불러서도 안된다-그는 오로지 이 말씀들을 읽음으로써, 교회의 목자들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리에 반대하여 자신들을 선생들이라고 부르며 저희들 끼리 논쟁하는 자들로서, 어떤 종류의 권한도 없으며, 성직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님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심지어 그렇게 함이 거의 필요치 않다. 비록 현 시대의 사람이 계속해서 기적들을 믿고 복음서를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형태의 종교와 신앙을 가진 사람과 단순한 교제만으로서도, 이러한 일은 이 시대에 쉽게 일어 날 수 있으므로,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종교를 가진 사람을 보지 않았을 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는 자기 형태의 종교가 유일한 진리의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부단히도 발생하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다른 종파들의 사람들과, 좋건 나쁘건, 접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서로의 믿음을 비난하며, 결국 자신이 고백한 믿음의 진리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오직 종교가 다루는 치명적인 문제들에 절대적으로 무지하거나 절대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만이 교회의 신앙에 머무를 수 있다.
이런 모든 신앙에 대한 파괴적인 경향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제들, 목자들, 성직자들, 관리자들, 수도원장들, 대부제들, 주교들, 그리고 대주교들이 행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교회를 건설하며, 미사를 거행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개종하고,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에 대한 댓가로 그 엄청난 보수들을 받으려면, 어떤 기만들과 어떤 격렬한 노력들을 교회들이 채택해야 할까? 그들은 특별한 초자연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들은, 끊임없이 증가하는 강력함과 정열로서, 그러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다른 방법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속세의 권력이 교회에 기꺼이 복종하려하므로, 쉬우면서 잔인한 폭력을 사용한다. 신앙에 대한 외적인 동의를 거부하며,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직접 처벌되거나 그들의 권리들을 박탈 당한다; 종교의 외적인 형식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보상을 받으며 특권도 주어진다.
그것이 정통교회의 성직자가 나아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교회들은 예외없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지금 최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모든 기술이, 건축에서 시까지, 사람들의 영혼에 효과를 발휘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마비 상태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동원되며, 그리고 이 효과는 끊임없이 만들어 진다. 사람들을 마비 상태로 몰고가는 최면 효과의 사용은 특별히 구세군의 행동들에서 특별히 명백히 나타나는데, 그들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행위들을 이용한다: 트럼펫, 노래, 깃발, 복장, 행진, 춤, 눈물, 그리고 극적인 연기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우리를 불쾌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새로운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들의 옛날 행위들과 근본적으로 같지 않는가, 그들의 특별한 조명, 금색, 찬란함, 촛불, 성가대, 오르간, 종소리들, 복장들, 영창, 등등?
그러나 아무리 이 최면적인 영향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핵심적인 또는 가장 치명적인 행위가 아니다. 핵심적이며 가장 치명적인 교회의 행위는 어린이들을 기만함에 방향이 맞추어 져 있다는 것이다-바로 이런 어린이들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말했다: “이 조그만 어린이들 중의 하나에게 죄를 짓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 어린이의 의식이 가장 먼저 일깨워 질 때부터, 그들은 그를 속이며,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을 최고의 엄숙함으로 그에게 주입시키기 시작하며, 그 기만이 어린이의 본성 안에 습관으로 자랄 때까지 그들은 계속해서 그것을 그에게 주입시킨다. 그들은 교묘하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어린이를 기만한다, 그리고 그 기만이 그의 삶에서 그토록 자라나서 그것은 뿌리 뽑기가 어렵게 되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에게 전체 세상의 학문과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 안에 주입되어진 믿음들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으며, 이러한 모순들로부터 최선을 다하여 그의 길을 찾도록 그에게 맏겨 버린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여,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입시켜진 삶의 두가지 대응하는 이론들의 혼란스러움을 명확하게 생각할 수 없게 하거나, 그가 벗어날 수 없게 하려는 과제를 맡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위 기독교 사회에서 교육받은 각기 젊은 사람을 다루는 것 보다 더욱 효과적인 어떤 방법을 고안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을 생각하면 두렵다. 그러나 우리가 그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위치에서 우리 자신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교회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산상 수훈 아니면 니케아 신경-전자는 후자를 배제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산상수훈을 진실되게 믿는다면, 니케아 원리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모든 의미와 중요성을 잃는다, 그리고 교회 그리고 그 대표자들도 그것과 함께 모든 의미와 중요성을 잃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니케아 원리, 즉, 교회, 즉 스스로를 교회의 대표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믿는다면, 산상수훈은 그에게 있어서 불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므로 교회들은 산상수훈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며, 사람들을 자신들에게로 끌어 들이려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들의 영향이 지금까지 지속된 것은 오직 이런 방향으로의 교회들의 강열한 열정에 기인한다.
교회들이 대중들을 최면시키며, 어린이들을 기만하는 일을 멈추게 하라, 심지어 가장 짧은 시간 만이라도, 그러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교회들과 그들의 모든 영향의 종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교회들은 성인들을 최면시키며 어린이들을 기만하는 사업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잠시라도 늦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회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거짓된 해석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며, 대다수의 소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진실한 해석을 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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