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신앙고백]Tolstoy

[스크랩] 제 2 장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好學 2011. 10. 15. 23:01

 

제 2 장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CRITICISMS OF THE DOCTRINE OF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 ON THE PART OF BELIEVERS AND OF UNBELIEVERS.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의 비판들


 

저서 “나는 무엇을 믿는가”의 운명-나의 저서의 신념들에 대한 종교적 비판들의 무책임한 성격-첫번째 답변: 폭력의 사용은 기독교에 반대가 아니다-두번째 답변: 폭력의 사용은 악행자를 억압하기 위해 필요하다-세번째 답변: 자신의 이웃을 방어하기 위한 폭력사용의 의무-네번째 답변: 무저항의 명령의 위반이 단순히 나약함으로 여겨지다-다섯번째 답변: 그 문제가 오래전에 결론이 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답변을 회피하다-그런 핑계를 고안하고 교회, 전통, 그리고 종교의 권위 뒤에 숨는 것은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폭력의 사용과 기독교사이의 모순으로부터 교회의 비평가들이 빠져 나올수 있는 모든 것이다-진실한 기독교의 고백에 대한 성직자 세계와 당국자들의 일반적인 태도-러시아 자유사상 비평가들의 일반적 특징-이러한 비평가들의 잘못된 주장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한 결과.

내가 나의 저서에서 표현하고자 시도한 것을 숨기려 하며, 입다물게 하려는 의도로부터 내가 얻은 인상은, 나로 하여금 그 저서 자체를 새롭게 평가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나타나자마자, 내가 예상했던 대로, 금지 되었으며, 그러므로 법률에 의하여 소각되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관리들 사이에서 토론되었고, 그래서 많은 부수의 원고와 석판 사본으로 배포되었으며, 번역본들이 외국에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 저서가 나온 뒤 매우 빠르게, 성격상 종교적 및 세속적인 비평들이 출현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들을 정부는 용인하였으며, 심지어 조장하였다. 그래서 아무도 무엇인지 몰랐어야 할 한 권의 책의 명성이 심지어 대학에서 신학적인 논문의 주제로 채택되었다.

나의 저서에 대한 비평들은, 러시아나 국외에서 동일하게 두 가지 일반적인 구분에 들어간다.-스스로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종교적 비평들, 그리고 세속적인 비평들, 다시 말하면, 자유사상가들의 비평이다.


나는 첫번째 부류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의 저서에서 나는 교회의 교사들을 향한 비난으로서, 그들의 가르침은 산상 수훈에서 명백하고 정확하게 표현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반대되며, 특히 악에 대한 저항에 관한 그의 명령에 반대하며,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모든 가치를 박탈했다고 말했다. 교회 당국들은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에 관한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나의 저서에 대해 쓰라고 부탁을 받았다고 그들이 느낀다면, 그리고 쉽게 말하자면, 그들이 산상 수훈의 가르침과 악에 대한 무저항의 계명을 기독교인으로써 의무적이라고 인정하든 아니하든,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그들에 대한 비난의 주된 요점에 대답하는 것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했으며, 흔히 하는 방식을 따라서가 아니다 (즉, “비록 한편으로는 우리는 절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시금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더우기 ...을 고려하면,” 등등). 아니다; 그들은 나의 저서에 주장된 만큼 명료하게 그 문제에 대답했어야 했다-그리스도는 정말로 산상수훈에서 그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의 제자들이 실행하기를 요구하였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항상 기독교인이면서도, 고소하거나, 법을 이용하거나, 자기 자신의 보호를 법에서 찾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항상 기독교인인 사람이 그의 이웃을 강제하는 정부의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보편적 병역 의무를 요구하는 현 시대에서 우리들의 머리위에 매달린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언제나 기독교인인 사람이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금지에 반하여, 그의 가르침에 직접 반대되는 미래의 행위들에 대하여 복종을 약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군대에서 자신의 몫의 의무를 다하면서, 그는 사람을 죽일 준비를 하며, 그리고 심지어 실제로 그들을 살인할 수가 있는가?

이들 질문들은 명백하며 직선적이었다, 그리고 명백하며 직선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저서에 대한 모든 비평들에서 그렇게 명백하고 직선적인 대답은 없었다. 아니다; 나의 저서는 그리스도의 율법으로부터 그들의 결함에 있어서 교회의 교사들에 대한 모든 비난들처럼 정확하게 똑같은 대접을 받았으며, 이 결함의 역사는 콘스탄티누스 시대로부터 가득차 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의 저서와 관련되어 언급되었다: 내가 이것과 복음서의 다른 구절들을 부정확하게 번역하였으며, 삼위 일체, 대속(代贖), 그리고 영혼의 불멸성을 깨닫지 못하므로 내가 틀렸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삶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것은 한마디도 없었다.-용서, 온유함, 참음, 그리고 이웃들 및 원수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의 교사의 말씀에, 그리고 우리 각자의 가슴속에 너무나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는 의무를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우리의 동포들이나 외국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폭력을 사용해야하는 명령과 이 의무를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들을 요구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 요점 하에 놓을 수 있다. 나의 저서에 대한 비평들뿐만 아니라, 이 주제에 대하여 과거에 쓰여진 것들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관계로 모으려고 시도했다.


첫째이자 가장 유치한 대답은 폭력의 사용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뻔뻔스런 주장이다; 그것은 기독교인에게 구약 및 신약 성서에서, 허용되었으며, 심지어 명령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대체적으로, 통치 및 성직 계통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확보한 사람들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들은 결국 아무도 그들의 주장에 감히 반박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만일 그것을 반박하는 자가 있다면 그 반박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권력에 중독되어, 그들이 지위를 유지함에 있어서 덕택을 보는 기독교라는 이름 안에서 기독교가 무엇인지 올바른 개념조차 너무나 잊어버려서, 기독교에서 기독교적인 것은 그들에게 이단으로 보여지며, 반면에 적그리스도 및 이교도적인 의미로 왜곡될 수 있는 구약 및 신약 성서 상의 모든 것들을 그들은 기독교의 근본으로 여긴다. 기독교가 폭력의 사용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 사람들은 흔히, 대단히 뻔뻔스럽게도, 구약 및 신약 성서에서 가장 애매한 귀절 들을 모두 끌어 모아서 가장 비기독교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해석한다-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마법사 시몬의 처형, 등. 그들은 혹시나 잔인함의 정당화로 해석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들을 인용한다: 성전으로부터 추방함; “소돔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등등. 이 사람들의 신념에 따르면, 기독교 정부는 결코 평화, 피해에 대한 용서, 그리고 원수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인도되어서는 아니된다.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을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을 반박한다, 아니, 그 보다는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기독교를 조작하며, 그의 이름하에서 교회 자체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그들의 일자리가 존재 하는데도, 그리스도 대신에 그들 자신의 그리스도를 조작해 낸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교회가 용서가 아니라 처벌과 전쟁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알게라도 된다면 아무도 교회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가 무엇을 증명하려 하는지 아무에게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약간 덜 뻔뻔한, 두번째 형태의 주장은, 예수가 비록 정말로우리가 왼쪽 뺨을 돌려 대고 옷도 주어버려야 한다고 설교하였으며, 그리고 이것이 가장 높은 도덕적인 의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 악한 사람들을 폭력으로 제지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와 모든 선한 사람들이 그들로 인하여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함에 있다. 이 주장은 내가 처음으로 요한 크리서스톰에서 찾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저서 “나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그가 어떻게 잘못 생각하는지 보여준다.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에게 이 어떤 사람을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으로 여김을 허용한다면, 그럴 경우에 제일먼저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가르침-이에 의거하여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로서, 모두 동등하며 형제이다-의 모든 개념을 무효화시키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비록 악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함이 하나님이 허락하였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하게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완벽하며 실수 없는 구별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개인들이 그리고 사람들의 모임들이, 바로 지금 그러하듯이, 상호간에 서로를 악한 사람들로 여김으로 귀결된다. 세번째로, 비록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실수 없이 구별함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그렇다하더라도, 이들 악한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또는 감옥에 가두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으로서의 모든 기독교인은 악한 사람에게 아무런 폭력도 사용치 못하도록 명령받았기에, 기독교 사회에서 그러한 처벌을 집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 종류의 답변은, 이전 것보다도 휠씬 더 미묘한데, 비록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이 그 악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향해진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의무적지만, 그 악이 자신의 이웃에게 향해진다면 그것은 의무적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그 계명을 실천할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의 이웃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그 계명에 반대하여 행동할 의무가 있으며 행악자들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함에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억측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에서 그러한 논거에 대한 어떤 확증도 찾을 수 없다. 그러한 논거는 계명에 대한 제한일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반박이며 부정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위험에 직면하여 폭력에 의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면, 폭력의 사용에 대한 문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위험의 정의의 문제로 압축된다. 만일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 다른 사람에 대한 위험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면, 다른 어떤 사람을 위협하는 위험을 근거로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 사용의 기회가 없다. 그들은 마녀를 살해하여 불태웠고, 그들은 귀족들과 지롱드 당원들을 살해했으며, 그들의 적들을 죽였다, 왜냐하면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그들을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일 이 중요한 제한이,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 계명의 전체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들어 있다면, 어디엔가에 그것에 대한 언급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 제한은 우리 구세주의 삶이나 설교 어디에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 계명을 무효화 시키는 이 배반적이며 수치스러운 제한에 대하여 정확하게 경고가 주어져 있다. 그러한 제한의 오류와 불가능성은 복음서에서 특별히 명료하게 보여 주는 바, 가야바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는 정확히 이러한 구별을 하고 있다. 그는 무죄인 예수를 처벌하는 것이 잘못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에게서 자신에게가 아니라 전체 사람들에게 미치는 위험의 근원을 보았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가 말했다: 전체 민족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그러한 제한의 오류성은 베드로가 예수를 향한 악을 폭력으로서 저지하려고 하자 그에게 한 말씀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표현된다(마태복음 24장52절). 베드로는 자신을 방어함이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성스러운 주님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당장 이점에 대하여 그를 질책하면서, 칼을 든 사람을 말로써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더욱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다른 이웃을 방어하려고 자신의 이웃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한다는 구실은 언제나 믿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악한 의도를 아직 실행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폭력이 사용될 때, 나는 어느 것이 더욱 큰 것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나 자신의 폭력적인 행위의 악함인지 아니면 내가 막아 보고자 하는 행위의 악함인지. 우리는 그 범죄자를 죽여서 사회에서 그를 없애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범죄자가 내일 개선된 사람이 될지, 그리고 우리가 그를 처벌함이 쓸모없는 잔인함이 아닐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는-우리가 생각하기에- 위험한 사회의 구성원을 가둔다, 그러나 다음날 이 사람은 위험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의 투옥은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악당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어린 소녀를 쫓는 것을 본다. 나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다-나는 그 악당을 죽이고 그 소녀를 구한다. 그러나 악당의 죽음 또는 상처는 확실히 일어났다, 반면에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무엇이 일어났을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 날 것인지 예견하는 권리를 가지도록 허락한다면, 얼마나 많은 악들이 초래될 것인가, 아니 정말로 일어난다. 세상의 99퍼센트의 악은 이러한 논법에 기초하고 있다-이단자 탄압에서부터 다이너마이트 폭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수만명이나 되는 정치범들의 처형이나 처벌도 그러하다.


네번째, 훨씬 더 세련된, 그 질문-그리스도의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그들은 악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파벌주의자들에 의해 부가된 특별히 배타적인 가치를 이 명령에 돌리지 않을 뿐이라고 선언하는데 있다. 게리슨, 발루, 디몬드, 퀘이커, 메노나이트 그리고 쉐이커들이 현재 실행하듯이, 그리고 모라비아 형제들, 월든스, 알비겐스, 보고밀라이트 및 폴리시안 들이 과거에 행한 것처럼, 이 명령을 기독교인의 삶에서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 여기는 것은 한쪽으로 기우는 이단이다. 이 명령은 다른 모든 명령들보다 더도 덜도 아닌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무저항의 명령을 포함하여, 나약함으로 인하여 어떤 명령이든 위반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인이기를 그만 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계략이다, 그리고 기만당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의해 쉽게 기만당한다. 그 계략은 직접적인 의식적인 명령의 부인을 우연한 위반으로 축소하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교회의 선생들의 태도를, 이것과 그들이 정말로 인식하는 다른 명령들과 비교하고, 그들의 이것에 대한 태도는 그들의 다른 의무들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납득할 필요가 있다.


간음을 금지하는 명령을 그들은 정말로 인식한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어떤 경우라도 간음은 죄이기를 멈출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의 설교자들은 결코 간음을 금지하는 명령을 어겨도 되는 경우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간음의 시험에 이를 수 있는 유혹들을 피해야 한다고 항상 가르친다. 그러나 무저항의 명령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모든 교회의 설교자들은 그 명령이 어겨도 되는 경우들을 알고 있으며, 사람들을 그에 합당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어길 수 있는 시험들-그중의 중요한 것은 군대의 선서이다-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강요한다. 교회의 설교자들은 어떤 경우이든 다른 어떤 계명을 위반함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저항의 계명과 관련해서는 그들은 공개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너무 직설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며, 그러나 우리가 정반대로 행해야 하는, 다시 말하면, 고소하거나, 싸우거나, 처벌해야 하는 상황들과 환경들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계명을 실천해야하는 상황들은 대개 그것을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으로 가르쳐진다. 이 명령의 실천은, 그들은 말한다, 매우 어려우며 오직 완벽에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반함이 금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정들, 감옥들, 대포들, 총들, 군대들 그리고 전쟁들이 교회의 직접적인 비호아래 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명령이 다른 명령들과 같은 수준에서처럼 교회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 리가 없다.

교회의 설교자들은 그것을 명백히 깨닫지 못한다; 오직 감히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함을 감추려하고 있다.


네번째의 답변에 대해서는 그만두기로 하자.


다섯번째 종류의 답변은, 이것은 가장 교묘하며, 가장 흔히 사용되며,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데, 답변을 피함에 있다, 즉, 이 질문은 아주 오래전에 지극히 명료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결론이 난 것이며, 그것에 대해 거론할 가치가 없는 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답변 방법은 다소 교양있는 모든 종교 작가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율법이 스스로들에게 의무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우리들 삶의 모든 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 말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오직 그것을 더욱 명백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들은, 다소의 재간으로, 그것을 회피하며, 기독교와 폭력의 사용을 양립하는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났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은 체 한다.

나의 저서에 대한 대부분의 종교 비평가들은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 다섯번째 방법을 사용한다. 나는 열명도 넘는 그런 비평가들을 인용할 수 있다, 그리고 예외 없이 그들 모두에서, 우리는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 책의 기본적인 주제를 구성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논의되었다. 그러한 비평들 중의 전형적인 예로써, 나는 잘 알려져 있으며 영리한 영국 작가며 설교자-파라르, 그는 많은 학식있는 신학자들처럼, 빙 둘러서 질문을 회피하는 기술의 위대한 대가이다 -의 기사를 인용하겠다. 그 기사는 미국 잡지, [포럼]에 1888년 출판되었다.

나의 저서의 내용에 대하여 간단하게 양심적으로 설명한 뒤에, 파라르는 말한다: “톨스토이는, ‘악을 저항하지 말라’ 는 말씀이, 시민 사회에서 전쟁, 법정, 사형, 이혼, 맹세, 민족적 편견, 그리고, 사실상, 시민 및 사회적 삶의 제도들의 대부분과 양립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세상에 지독한 기만이 숨겨져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제 모든 사람들이 이들 다섯가지 계명을 준수한다면 하나님의 왕국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즉 : 1. 모든 사람들과 평화스럽게 살라. 2. 순수하라. 3. 맹세하지 말라. 4. 악을 저항하지 말라. 5. 국가적 구별들을 포기하라.

 

“톨스토이는”, 그는 말한다, “구약 성서의 영감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중심 교리들을 부인한다-피에 의한 속죄, 삼위일체, 사도들에게 성령의 강림과 사제들에게 전파됨.”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 들과 명령들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해석이 진실한 것인가?” 그는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하는가-즉, 그리스도의 이 다섯가지 계명을 실천해야 하는가?” 그러면, 당신들은, 이 본질적인 질문-이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책에 관한 기사를 쓰도록 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이 해석이 진실하니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거나, 그가, 그러한 해석이 틀리다, 이유를 보여주겠다, 그리고 내가 부정확하게 해석한 그들 말씀들에 대한 다른 어떤 정확한 해석을 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라르는 오직, “비록 가장 고상한 진지함으로 비롯되었지만, 톨스토이 백작은 복음서의 의미 및 그리스도의 마음과 의지에 대한 불완전하며 편파적인 해석들로 잘못 인도되었다.” 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다. 이 과오가 무엇에 있는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오직 이렇게 말할 뿐이다: “이 기사에서 이것의 증명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가 사용 가능한 지면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기분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또한 그의 인생의 모든 신분들을 저버리고, 평범한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을 짊어지는 것이 자신의 의무가 아닐까 불안하게 느끼는 독자들은 당분간 ‘속세의 의미 없는 비난 (securus judicat orbis terrarum)’ 의 원리에 머물러야 하겠다. 매우 적으며 드문 예외로서,” 그는 계속한다, “전체 기독교인들이, 사도들의 시대부터 우리 자신의 시대까지 통틀어서, 원대히 영원한 원리들을 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반을 흔들고 모든 인간 사회의 제도를 혁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체제 자체는 하나님의 지지뿐만 아니라 필연적인 상황에 의존한다. 예수의 가르침의 전체적인 방법과 일치하는 역사적인 원리들 위에서 오직 해석될 수 신적인 궤변들(divine paradoxes)위에 톨스토이 백작이 기초한 공산주의의 신념이 얼마나 지지할 수 없는 것인지 증명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지금 여기 나의 몫의 좀 더 큰 캔버스가 필요할 것이다.” “그의 몫의 좀 더 큰 캔버스”를 그가 가지지 못했으니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그리고 이 모든 과거의 15세기 동안,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가, 그가 말하는 것과 전혀 같지 않은 어느 것을 말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크기의 캔버스”를 아무도 갖지 못했음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아직도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아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속세의 의미없는 비난(securus judicat orbis terrarum)’이라고 말함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교육받은 신자들의 모든 비평들은 예외 없이 이런 종류이며, 그들은 반드시, 그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지위에 대한 위험을 깨닫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은, 교회와 전통과 그들의 신성한 직책의 권위를 가지고서, 독자들을 위압하고 그를 스스로 복음서를 읽고자 하는 생각과 그 질문을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해 내는 것으로부터 멀리 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그들의 희망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성공적이다; 왜냐하면, 실상, 어떻게 그 주장-다시 말하면, 세기에서 세기로 그러한 열성과 엄숙함으로서 그 모든 대부제, 주교들, 대주교들, 종교회의들, 그리고 교황들에 의해서 되풀이 되어온 모든 것들-이 누구에겐가 떠오를 수 있겠는가, 그 모든 것이 뿌리부터 거짓이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목위에 사치스럽게 살아가기 위한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그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위에 몰래 끼워 놓은 비방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거짓말이고 비방이며 너무나 명백하여서, 그것을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열성과 진지함으로 사람들을 위압함에 있다. 그것이 바로 근래의 해마다 병력 보충 기간에 일어났던 것이다; 황제의 권위의 상징인 서트사이 앞에 있는 테이블에, 황제의 실물 사이즈 초상화 아래 높은 분의 자리에 위엄있는 관리들이 앉아 있는데, 그들은 훈장을 달고 있고, 자유로이 그리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기록을 하고 있으며,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명령을 내린다. 여기 그들 가까이에, 십자가를 가슴에 달고서, 비단 카속을 입었으며, 유복해 보이며, 긴 회색 머리카락이 그의 망토위에 흘러 내리고 있는 늙은 신부가, 황금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금색으로 제본된 복음서가 올려져 있는 성서책상 앞에 있다.

그들은 이반 페트로프를 부른다. 한 청년이 비참하고 초라한 복장으로 들어 온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그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며, 그의 눈들은 하얗고 촛점이 없었다; 그리고 깨진 목소리로, 속삭임보다 거의 크지 않게, 그가 말한다: “나는-그리스도의 법에 따라서-기독교인으로서-나는 할 수 없어요.” “그가 무어라고 중얼 거리는 거야?” 장관이 말했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찡그리며 들어 보고자 책으로부터 그의 눈을 들었다. “크게 말해봐,” 번쩍이는 견장을 단 대령이 그에게 소리쳤다. “나는-나는 기독교인이라서---” 그리고 마침내 그 젊은 사람이 군대에 복무하기를 거절하는 것 같았다. “허튼 소리 작작해. 키재게 서있어. 의사님, 그의 키를 재어 주시겠습니까?” “알았소.” “신부님, 그에게 맹세를 시키십시오.”

아무도 전혀 그 불쌍하고 겁먹은 젊은 사람이 중얼거리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그것에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다 무엇인가 중얼거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들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등록해야 한다.”

그 보충병은 아직도 무엇인가 말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에 어긋납니다.” “저리가, 저리가; 우리는 너의 도움이 없어도 무엇이 법에 어긋나는지 무엇이 아닌지 안다; 그리고 신부님 그의 마음을 달래 주시오, 그를 달래 보시오. 다음: 바실리 니키틴.” 그리고 그들은 떨고 있는 청년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에게도-경호원들, 또는 바실리 니키틴, 그들이 데리고 들어오던, 또는 이 장면의 어떤 구경꾼에게도-이러한 잘 들리지 않는 청년의 말들이, 당장 당국자들에 의해 억압되었지만, 진리를 담고있다는 것, 그리고 조용하며 자신에 차있는 관리와 신부의 크고 엄숙하게 내뱉은 문장들은 거짓말이며 사기였다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함이 파라르의 기사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의 엄숙한 설교들, 논문들, 그리고 실낱 같은 진리에 압도적인 거짓이 어디에서나 있는 모든 측면에서 직접적으로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책들이 풍기는 인상이다. 서슴없이 일련의 길고, 영리하며, 꾀가 많은 엄숙한 연설들과 집필들을 시작한 한다, 그리고 거의 주제와 관계있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교묘하게 주제 그 자체를 건드리는 것은 피한다.

그것이, 말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그것을 부인하며, 사람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기독교가 스스로 가져다 놓은 모순들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다섯 번째이자 가장 효과적인 수단들의 본질이다


첫번째 방법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뻔뻔하게도 그리스도가 폭력, 전쟁들, 그리고 살인을 허가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교리을 직접적으로 부인한다; 두번째, 세번째, 또는 네번째 방법에서 그들의 방어를 찾는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서 쉽게 오류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부류들은, 논쟁하지도 않으며, 그것에 대하여 겸손하게 논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위엄 뒤에서 숨을 곳을 찾으며,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서 또는 적어도 오래전에 누군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의심의 가능성을 주지 않는다-그들은 공격에서 안전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정부들이나 교회들이 뿌려 놓은 환각적인 영향아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으며, 더이상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때까지 공격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나의 저서에 대해서 영적인 비평가들-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는 달랐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의 신성에 대한 믿음과 그의 명백한 말씀들에 대한 불신 사이에 있는 자신들이 발견하는 모순적인 위치에 의하여, 이러한 태도를 취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들은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서 우리는 그들로부터 질문의 바로 본질의 자유로운 토론을 기대할 수 없다-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존의 세계 질서에 적용함으로써 반드시 생겨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변화에 관한 토론. 그러한 자유로운 토론을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구속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독립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속세의, 자유사상 비평가들로부터 기대했다. 나는 자유사상 작가들이 그리스도를, 성직자들과 같이, 개인적인 구원의 종교의 창시자로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자면, 삶의 새로운 원리들을 주장하였으며 옛것을 파괴하며, 그리고 그의 개혁들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심지어 지금까지 여전히 진행중인 개혁가로서 바라보리라는 것을 기대 했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러한 시각은 나의 저서의 내용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놀랍게도, 나의 저서에 대한 아주 많은 비평가들 중에서, 러시아인이든 외국인이든, 저서에서 접근된 측면에서 주제를 다룬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즉, 그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표현들을 사용해가면서, 그리스도의 교리를 철학적,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인 원리로서 비판했다. 이것은 단 하나의 비평만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나의 저서의 전체 내용이 악에 대한 무저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며,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 그 자체를(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을 반박함은 너무나 쉬웠기에) 모든 종류의 악과의 갈등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서, 이 교리에 대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과거 몇 년 동안 그리스도의 교리가 악에 대한 저항을 막는 것인 한은 그의 가르침은 잘못임을 매우 성공적으로 증명해오고 있었다. 이 가설적인 그리스도의 교리에 대한 그들의 논박들은, 그들이 사전에 그들의 주장들에 대적하거나 시정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더욱 더 성공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검열이 그 저서를 허가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방어하는 기사들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국의 검열에 의한 제약 없이는 성서에 대해 한마디도 말 할 수 없는, 우리들 사이에서, 과거 몇년 동안 모든 잡지들에 마태복음 5장 39절을 바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끊임없는 공격들과 비난들이 모든 잡지들에 있어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러시아의 진보적 비평가들은, 분명히 무저항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행해진 모든 것들을 깨닫지도 못한 채, 그리고 때로는 심지어 악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이 나에 의해 개인적으로 날조된 것으로 틀림없이 상상하면서, 그것의 개념 자체와 충돌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반대하였으며, 공격하였다, 그리고 다각도로 분석되고 반박된 주장들을 굉장한 열기를 가지고 전개하면서, 사람은 변함없이 (폭력으로써)모든 피해자와 억압당한 사람들을 방어해야 하며, 그런 이유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는 비도덕적인 교리라고 논증하였다.

모든 러시아의 비평가들에게 그리스도의 명령의 전체 요지는 그것이 그들이 습관화된 악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방해한다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원리는 두개의 반대하는 진영들에 의하여 공격받았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원리가 혁명주의자들에게 적용하려하는 악에 대한 저항에서 그들의 행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혁명주의자들 역시, 이 원리가 보수주의자들에게 적용하려는 그들의 악에 대한 저항과 그들을 전복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국가적 번영을 망치려하는 혁명적인 요소들의 힘찬 파괴를 방해하고 있는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에 분노했다; 혁명주의자들은 나라의 번영을 망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을 전복함을 방해하는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에 분노했다. 이런 관계에서 혁명주의자들이, 모든 독재주의는 엄청난 공포이며 위험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원리를 공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종류의 폭력의 사용은, 종교재판에서 슬뤼셀버그 요새까지, 힘으로써 악에 저항하는 필요성의 대응하는 원리에 의존해 왔거나 아직도 의존하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비평가들은 무저항의 명령을 실제 삶에 적용함은 문명이 움직여 가는 길로부터 인류를 옆으로 돌려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유럽의 인류가 움직이는 문명의 길은 그들의 의견에서 모든 인류가 언제나 그것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비평가들의 일반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그만두기로 하자.

외국의 비평가들은 똑같은 전제들로 출발하였지만, 나의 저서에 대한 그들의 논의들은 러시아 비평가들에 비해 약간 달랐다, 그들은 조금 덜 신랄하며, 조금 더 교양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제의 문제에서도 그랬다.

일반적으로 나의 저서와 복음서의 교훈을 논의함에 있어서, 산상 수훈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외국의 비평가들은 그러한 교리는 특별히 기독교적 (기독교적인 교리는 그들의 시각들에 의하면 카톨릭이거나 청교도적임을 말한다)이 아니다-르낭이 말하듯이, 산상 수훈의 가르침은 오직 매력적인 박사의 너무나 실행 불가능한 한 줄의 꿈일 뿐으로, 1800년 전에 살았던 갈릴리의 단순하며 반 야만적인 거주자들이나, 반 야만적인 러시아 농민들-수타예브와 본다레프-및 러시아의 신비주의지 톨스토이에게 적합할 뿐이며, 높은 수준의 유럽 문화와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자유사상 비평가들은, 나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서, 세련된 태도로서 산상 수훈의 교리 같은 고지식한 교리로서 인류가 인도될 수 있다는 나의 신념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원인들에서 비롯된다는 인상을 주려고 시도했다: 즉, 그러한 신념은 부분적으로 나의 지식 부족, 나의 역사에 대한 무지, 산상수훈의 교리를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모든 헛된 시도-이 시도들은 역사상에서 행하여졌으나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했다-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며; 그리고 부분적으로 현재에 인류가 이룩한 숭고한 문명-예를들면 크룹 대포들, 무연 화약, 아프리카의 식민지화, 아일랜드 강제 법안, 의회 정부, 신문 잡지업, 파업, 그리고 에펠탑 등처럼-의 완전한 가치를 내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

드보그 그리고 리로이 볼리유 그리고 매튜 아놀드는 그렇게 썼다; 미국의 작가 새비지, 그리고 유명한 미국의 자유사상 연설가인 잉거솔,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썼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산업 시대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잉거솔은 고지식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말에서 완벽한 솔직함과 단순함으로써, 세련된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문화가 견지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표현한다. 그 가르침은 우리의 산업 시대에 아무런 필요가 없다, 정확히 이 산업 시대의 존재는 변해서도 안되고 변할 수 없는 신성한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확히 술주정뱅이들이, 어떻게 하면 그들이 맨정신인 습관으로 돌아 갈 수 있는지 충고를 받을 때, 그 충고는 그들의 술 마시는 습관과 맞지 않는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자유사상 비평가들의 주장들은, 러시아든 외국이든 마찬가지로, 설명하는 말투나 방법이 다를 지라도, 본질적으로 모두다 똑같이 이상한 오해에 이르게 된다.-환언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의 가르침의 결과들 중의 하나가 악에 대한 무저항으로서, 그것은 우리의 삶의 변화를 요구하므로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실행될 경우, 삶은 현재처럼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말을 덧붙여한다: 우리가 살고 있으며 습관적으로 살고 있듯이, 만일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다면. 악에 대한 무저항의 문제가 논의 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다; 무저항의 의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체 가르침의 실행 불가능성의 만족스런 증거이다.

한편, 우리는 아래의 질문에 적어도 어떤 종류의 해답을 지적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거의 모든 것의 뿌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이러하다: 다른 사람들이 선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악이라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논쟁에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그리고, 비록 나의 반대자들이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악이라고 생각하므로 그것은 악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은 그 문제의 해답이 아니다. 여기에 오직 두가지 해답들이 있을 뿐이다: 무엇이 악인가에 대한 정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준을 찾거나 힘으로서 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첫번째의 과정은 선사시대 이후로 계속 시도되어 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여태까지 아무런 성공적인 결과들에 이르지 못했다.

두번째 해답은-우리가 보편적인 기준을 찾아 낼 때까지 우리가 악이라고 여기는 것에 힘으로서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해답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준 대답을 불만족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그리고 더 나은 것으로, 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만장일치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기준을 찾음으로써,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마치 야만적 국가들처럼, 그 질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을 기독교를 믿는 지식있는 비평가들처럼 다룰 수는 없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또는 어떤 사람들이나 사람들의 모임에 악을 정의 하며 그것을 힘으로 저항할 권리를 줌으로써 그 질문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특정한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님을 줄곧 알고 있다 (우리 자신이 그 특정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좀 적게 알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권한있는 사람들이나 집회에서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즉 우리에게 악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로 악이라는 것은, 질문에 대한 완전한 오해임을 보여주며, 기독교적인 종교에 관한 자유 사상 비평가들의 주장의 뿌리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이런 방법으로, 성직자들과 자유사상 비평가들이 함께하는 나의 저서에 관한 토론들이 나에게 보여 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해결하고자 하는 질문들을 단순히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