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신앙고백]Tolstoy

[스크랩] 제1장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는

好學 2011. 10. 15. 23:00

 


제1장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는



THE DOCTRINE OF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 HAS BEEN PROFESSED BY A MINORITY OF MEN FROM THE VERY FOUNDATION OF CHRISTIANITY.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는 기독교의 창시 자체부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확언되었다.

 

 

저서 “나는 무엇을 믿는가.” 에 대하여-그것이 불러온 서신들-퀘이커들에게서 온 편지-게리슨의 선언-아딘 발루, 그의 작품, 그의 교리 문답-헬치스키의 “신앙의 그물”-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밝히는 작품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다이몬드의 저서 “전쟁에 관하여”-무서의 “주장된 무저항”-병역 의무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1818년 정부의 태도-국가 폭력에 관한 법안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통상적인 정부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적대적 태도, 그리고 기독교적 무저항의 표명을 침묵시키고 억누르려는 그들의 의식적인 노력들.

나의 저서에 의해서 제기된 첫 번째 반응들 중에는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에게서 온 편지들이 있었다. 이들 편지들에는, 기독교인들의 전쟁에 관한 및 어떤 종류이든 폭력의 사용에 관한 불법성에 대한 나의 견해에 그들의 공감을 표현하면서, 퀘이커들은 소위 그들의 교파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내게 주었으며, 그들은 이백년 이상을 실제로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공언했으며, 자기 방어를 위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퀘이커들은 또한 그들의 소책자, 잡지들, 그리고 서적들을 내게 보냈는데, 그것들로부터 나는 그들이 어떻게, 수년 전에, 의심할 여지없이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을 실천하는 기독교인의 의무를 확립하였는지, 그리고 전쟁과 사형을 허락하는 교회의 가르침의 오류를 폭로하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쟁-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을 살상하고 죽이는 것-은 사람들을 위한 평화와 선의를 기초로 한 종교와 부합되지 않음을 보여 주는 전체 시리즈를 통한 논점들과 주제들로서, 퀘이커들은 그 어느 것도,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의한 이 명령의 무시와, 기독교  인들에게 전쟁과 폭력의 허용만큼, 이방인들의 눈에 기독교의 진리가 흐려져 보이게 하고 전 세상에 기독교의 전파를 가로 막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며 증명하였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폭력과 칼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악에 대한 무저항, 온화함, 온유함, 그리고 평화스러움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으며,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오직 평화와 조화 그리고 사랑의 본을 보임으로써 세상에 전파될 수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그러므로 어떤 권력도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르침과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인 덕목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어떤 권력도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국가의 필요성에 관한 법은, 세상의 이득을 위하여, 타협될 수 없는 것을 타협하려 시도하는 사람들만을 오직 강제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그에게 구원을 줄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기독교인에게는, 국가에 대한 그러한 고려들은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퀘이커들과 그들의 작업들-폭스, 펜, 그리고 특히 (1827년에 출판된)다이몬드의 작품들-의 노력들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지식은, 기독교를 폭력 및 전쟁으로 타협함에 대한 불가능성이 아주 오래 전에 인식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이 타협 불가능성은 오래 전에 너무나 분명하게 그리고 너무나 확실하게 증거되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폭력과 함께 불가능한 타협이 있어 왔으며, 아직도 존재 하며, 교회에서 설교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되었는지 우리는 오직 놀라와 할 수밖에 없음을 내게 보여 주었다.

내가 퀘이커들로부터 알게된 것 말고도, 같은 무렵에, 또한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별개이며 전에 내게 알려지지 않는 출처로부터 주제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받았다.

유명한 흑인 해방의 옹호자인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의 아들이 나의 저서를 읽었다고 하면서 내게 편지를 하였다, 그리고 나의 저서에서 자신의 부친이 1838년 표현한 것과 유사한 개념들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알면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거의 오십년 전에 그의 부친에 의하여 정리된 “무저항” 의 선언 또는 성명을 내게 보내었다.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일어났다: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은 [인간들 사이에 평화 정착을 위한 협회]에서 전쟁 억제의 수단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였다, 그 모임은 1838년 미국에 존재했었다. 그는 보편적인 평화의 정착은 폭력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마태 5:39)를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오직 기초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그 자체의 온전한 중요성에서 퀘이커들이 깨달은 것과 같았으며, 게리슨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게리슨은 그 결과 그 학회 앞에 한가지 선언을 작성하여 내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1838년-에 많은 회원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DECLARATION OF SENTIMENTS ADOPTED BY THE PEACE CONVENTION.

“평화 회의에서 채택된 의견의 발표”

 

"boston, 1838.

“1838년 보스톤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 및 평화적인 전세계 개혁 작업을 추진하기 위해 채택하는 수단들을 표현하는 선언문을 공표함이 우리 자신,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책임으로 여긴다.


“우리는 어떠한 인간의 정부에 대한 충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류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의 왕과 입법자, 하나의 재판관과 통치자를 인정한다. 우리의 국가는 세계이며 우리의 동포는 모든 인류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모든 다른 지방을 사랑하기 대문에 우리가 태어난 지방을 사랑한다. 우리의 미국 시민들로서의 이익들과 권리들은 전체 인류의 그것들보다 더욱 귀중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국가적인 모욕이나 상처에 대하여 복수하기 위하여 어떤 애국심에도 호소할 수 없다.


"우리는 한 국가가 외국의 원수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거나 그의 침략자들을 처벌할 권리가 없으며, 어떤 개인도 자신의 일을 위하여 그러한 권리를 소유하지 못하며, 단위가 집합체보다 더 큰 중요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약탈을 자행하며 살상의 의도로 외국에서 몰려오는 병사들이 사람들이나 행정관에 의해 저지될 수 없다면, 공공의 평화 또는 개인의 안전을 위하여 자국을 괴롭히는 자에게 어떤 저항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정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스럽게 임명되었다는 것, 그리고 미합중국에, 러시아에, 터어키에 있는 권력들은 그분의 뜻에 일치된다는 교리는 부조리할 뿐만 아니라 불경스럽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공정한 창조주를 불공평하며 폭군같이 만든다. 어떠한 국가에 존재하는 권력이 적을 처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움직이거나 그리스도의 본에 의해 인도된다고 주장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 국민들의 영적인 거듭남으로 그들을 타도함이 불가피하다.


“우리는,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모든 전쟁들뿐만 아니라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들을 비기독교적이며 불법적이라고 간주한다; 모든 함정, 모든 무기 공장, 모든 요새들을 비기독교적이며 불법적이라고 간주한다; 어떤 종류의 상비군의 존재, 모든 군 지휘관들, 쓰러트린 적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모든 기념물들, 전투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 군사적 업적을 기리는 모든 찬양들, 군대를 이용한 방어를 위한 모든 경비들; 우리는 그들의 국민들의 병역 의무를 요구하는 정부의 모든 명령을 비기독교적이며 불법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를 소지함을 불법으로 여기며, 우리는 사람들에게 공직의 책임으로서 투옥이나 죽음의 고통으로 의를 행함을 강제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어떤 공직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모든 입법 및 법률 기구에서 배제하며, 모든 인간의 정치들과, 세상의 명예들, 그리고 권력적 신분을 거부한다. 우리가 입법부나 법원의 좌석을 차지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그러한 능력에 합당한 우리의 대리인으로 내세울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그가 우리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어떤 것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법정에 고소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우리의 옷을 가지려 한다면, 그를 처벌받게 하기보다는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망토마저 내어 줄 것이다.

“우리는 옛날의 약속에 따른 형법-눈에는 눈, 그리고 이에는 이-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폐지되었으며, 새로운 약속아래서 원수를 처벌함 대신에 용서가 그의 모든 제자들과 기타 어떤 경우에라도 명해졌다. 적으로부터 돈을 강탈하고, 그들을 투옥하며, 그들을 추방하거나 사형하는 것은 용서함이 아니라 보복함이 명백하다.

“인류의 역사는, 육체적 강압이 도덕적으로 거듭남에 적합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죄를 저지르는 기질은 오직 사랑으로서 가라앉힐 수 있으며; 악은 오직 선으로써 근절할 수 있고; 우리를 해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무기의 힘에 의존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으며; 온순함, 오래 참은, 그리고 자비가 풍부함에 커다란 안전이 있고; 땅을 물려받는 사람은 오직 온유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증거들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칼을 빼는 사람은 칼로서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정책-재산, 생명, 및 자유의 보장-공공의 안녕과 개인의 즐거움-의 한 방법으로써 뿐만 아니라 왕중의 왕이시며 주님중의 주님이신 그분께 드리는 충성의 토대로서, 우리는 진심으로 무저항의 신념을 채택하며, 우리는 그것이 모든 가능한 결과를 내어줄 것이며, 전능한 힘으로 무장하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공격하는 힘에 대해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어떤 과격한 교리도 옹호하지 않는다. 과격주의 영은 보복, 폭력, 그리고 살인의 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않는 기본적인 신념을 준수한다면, 우리는 선동, 배역, 또는 폭력에 가담할 수 없다. 우리는 복음서의 명령에 반대되는 것을 제외하고, 정부의 모든 법령 및 요구사항을 복종할 것이며, 불복종에 대한 형벌에 온유하게 복종하는 외에 어떤 경우에도 법의 집행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적들에게 무저항과 무저항적인 복종을 고수하는 한편, 우리는 도덕적 및 영적인 의미에서, 높은 곳에서나 낮은 곳에서 불법을 공격할 것이며, 우리의 신념들을 모든 존재하는 악, 정치, 법률, 및 교회 기관들에 적용할 것이며, 이 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때를 재촉할 것이다. 우리로서는 복음서가 고안되어서 세상의 어떤 시점에서 파괴하려는 어떤 것이더라도,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라면, 지금 반드시 포기 되어야 함이 자명한 진리로 느껴진다. 그 때에 만일 칼들이 부수어져 쟁기가 되고 창들은 전지용 낫이되며, 사람들은 전쟁 기술을 더이상 배우지 않게 될 때가 예견된다면, 이러한 치명적인 무기들을 제조하고, 판매하거나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여 지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평화스런 주권에 대적하여 자신들을 배치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신념들을 선언하면서, 우리는 나아가서 우리의 목적을 실생하고자 우리가 채택하고자 제안하는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설교의 어리석음을 이길 것이라 기대한다. 우리는 우리의 견해들을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 사람들이 속해 있는 어느 나라, 교파, 또는 사회 계층에도 알리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 강연을 조직할 것이며, 소책자와 출판물을 유포할 것이며, 단체를 만들고, 모든 통치 조직에 탄원할 것이다. 전쟁의 범죄성과 적의 처리를 배려하는 단체의 견해들, 느낌들, 그리고 관행에 대한 급진적인 변화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과 수단을 고안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목적이 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위대한 과업에 착수함에 있어서, 그 실행과정에서 우리는 심지어 불과 같은 시련에서도 우리의 진실함을 시험받기 위해 부름을 받을 것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욕, 분노, 고통, 심지어는 진정 죽음 자체에 처해질 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지않은 오해와, 허설과 비방을 예상한다. 우리를 향한 소요가 일어 날 지도 모른다. 오만하며 위선적인 사람들, 야욕적이며 전제적인 군주들과 권력자들이 합심하여 우리를 부수어 버릴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메시야를 대접했으며 우리는 그의 본을 겸허하게 흉내내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그들의 테러행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확신은 전능하신 주님에 있으며 사람에 있지 않다. 인간의 보호에서 물러났으니, 세상을 이기는 신앙 말고 무엇이 우리를 지탱하겠는가? 우리는 우리를 시험하고자 하는 불의 시험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들인 한 즐거워 할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 영혼의 보호를 하나님께 맡기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집이나 형제나 누이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나 땅을 버리는 모든 사람들은 백배나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에 담겨있는 견해의 확실하며 보편적인 승리를 굳게 믿으면서, 그것들에 향해지는 반대가 아무리 무서울 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그것에 우리의 서명을 날인한다; 그것을 인류의 이성과 양심에 맡긴다, 그리고 주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조용히 그리고 온유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선언이 있은 직후 무저항을 위한 협회가 게리슨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그리고 [무저항]이란 잡지가 창간되었는데, 그 잡지에서 무저항의 교리가, 선언서에서 설명된 바대로, 그 완전한 의미와 그 모든 중요성으로서 주창되었다. 그 협회와 잡지의 최종적인 운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나는, 그의 아들의 작품인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의 훌륭한 전기로부터 얻었다.

그 협회와 잡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노예 해방 운동에 참여한 더욱 많은 수의 게리슨의 동료 일꾼들은, 잡지 [무저항]의 너무 급진적인 프로그램이 흑인 해방의 실제적인 작업으로부터 사람들을 쫓아버릴까봐 두려워서, 선언서에 표현된 바대로의 무저항의 신념을 표명함을 포기했다, 그리고 협회와 잡지는 중단되었다.

게리슨의 이런 선언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중요성을 가진 너무나 강력하며 웅변적인 신앙 고백의 표현이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을 것이며, 전세계에 알려져서 여러모로 토론의 주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럽에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게리슨에 대하여 그렇게 높은 평가를 하는 미국인들마저도 그 선언을 거의 알지 못했다.

무저항에 대한 또 다른 옹호자도 똑같은 식으로 간과되었다-미국인 아딘 발루는 이 교리를 설교하면서 오십년을 보낸 뒤에, 그는 최근에 죽었다. 무저항에 대한 문제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컸던가 하면, 아들 게리슨은, 그는 커다란 네권으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훌륭한 전기를 집필하였으며, 현재 무저항 협회와 그 교리의 신봉자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나의 질문에 대답으로서, 그가 아는한 그 협회는 끝이 났으며, 그 교리를 신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내게 말했다, 반면에 그가 내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매사추세츠주의 홉데일에, 살아 있는 아딘 발루가 있다고 했으며, 그는 아버지 게리슨의 작업들에 참여를 하였으며, 설교를 통해서나 출판을 통해서 무저항의 교리를 옹호하느라 오십년을 보냈다고 했다. 후일 나는 발루의 제자이며 동료인 윌슨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며 발루 자신과 통신을 하였다. 나는 발루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답장을 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을 내게 보내 주었다. 여기에 그것들로부터 약간 발췌한 것들의 요약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십니다,” 라고 발루는 자기 방어 및 전쟁의 권리를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순을 설명하는 그의 수필 중의 하나에서 말했다.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선함을 겪고 악함을 겪으며, 죽음 그 자체까지 그분을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민주 연방 공화국의 시민이다; 그리고 국가에 충성하기 위하여 나의 국가의 헌법을, 필요하다면 나의 생명을 바쳐서, 수호할 것을 선서했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이 나도 다른 사람에게 해주기를 요구한다. 연방의 헌법은 그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정 반대의 것을 내가 이백만의 노예들에게[그 당시에는 노예들이 있었다; 이제는 이 단어를 ‘노동자들’로 바꾸어 보려 할 것이다] 해 주기를 바란다-다시 말하면, 그들을 도와서 현재의 노예 상태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하여 선출하거나 선출되고, 나는 투표하고자 하며, 나는 심지어 정부 소속의 어떤 관직에 임명될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기독교를 고백할 것이고 그리스도와 정부와의 약속을 이행함에 어려움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악행을 하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하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에는 피, 그리고 생명에는 생명을 취하지 말라고 하신다.

“나의 정부는 내게 정 반대를 요구한다, 그리고 외국 및 국내의 적에 대항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교수대, 총, 그리고 칼로서 자기 방위 체계를 구축한다. 그래서 나라 안은 결국 교수대, 감옥, 무기고, 전함 및 병사들로 가득찬다.


“살인을 위한 이들 값비싼 장치들을 유지와 사용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며, 적을 사랑하는 자에게 용서의 미덕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으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리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며 성스러운 살륙 작업에 대한 하늘의 축복을 내려 달라고 기원하도록 기독교 성직자들의 대열과 함께 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깨닫는다 (즉, 고백과 관행의 모순), 그리고 나는 종교를 고백하며 정부에 참여한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동시에 정부의 충실한 종임을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이러한 의미 없는 무저항의 신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권력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오직 부도덕한 사람들이 정부를 관리하도록 둘 수 없다. 헌법은 정부가 전쟁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동의하며 지지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지지할 것이라고 맹세한다. 나는 그런 이유로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전쟁 또한 기독교인의 의무이다. 수천 수백의 자신의 동포를 죽이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마을들을 파고하고 불태우며, 그리고 가능한 모든 잔혹함을 실천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가 아니던가? 이제 이 모든 거짓된 감상주의적 행위를 버려야 할 때다. 그것은 상처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가장 진실된 수단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오직 사랑의 정신으로 행한다면, 그러한 살인보다 더 기독교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미덕으로 바꾸어야 함이 필요한가” 라는 제목의 또 다른 소책자에서, 그는 말한다: “한 사람은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같은 인간을 죽인다면 그는 살인자다. 만일 둘, 열, 백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 역시, 살인자들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가가 그가 선택하는 만큼의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위대하고 고귀한 행위이다. 오직 사람들을 대규모로 함께 모으라, 그러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하는 싸움은 무죄의 행위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될려면 정확히 몇명의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다. 한 사람이 약탈하고 강탈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체 국가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정확히 몇명이 필요한가? 왜 한명, 열명, 백명의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깨어서는 안되며, 많은 수의 사람들은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기에 그의 무리들을 위한 발루의 교리문답 버전이 있다.


무저항의 교리 문답

Q. “무저항” 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A. “악에 저항하지 말라.” (마태복음 5장 39절) 의 명령으로부터이다.


Q. 이것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A.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한 숭고한 기독교적인 미덕을 나타낸다.


Q. “무저항” 이란 단어는 가장 넓은 의미로 받아 들여 져야 하는가-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악에 대해서도 어떤 저항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대로 인가?

A.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세주의 가르침의 정확한 의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다시 말하면,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힘 안에서 모든 의로운 수단으로 악을 대적하여야 하며, 악으로 대적해서는 안된다.

 

Q. 그리스도가 무저항을 그러한 의미로 명령한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A. 그것은 그와 함께 그가 한 말씀에 의해서 나타나 있다. 그가 말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Q. 그가 누구에 대하여 “너희가 옛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A. 구약 성서에 기록된 족장들과 선지자들에 대하여서 이며, 히브리인들은 구약 성서를 보통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른다.

 

Q. 그리스도는 “옛 사람들이 말한 것”이란 말씀에서 어떤 발언들을 언급한 것인가?

A. 노아, 모세,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의 발언들이다, 그 발언에서 그들은 해를 가하는 사람들에게, 악한 행위를 처벌하고 방지하기 위하여, 신체적인 상해를 가할 권리를 인정한다.


Q. 그러한 발언들을 인용해보라.

A.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라”

 

-창세기 9장 6절.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급기 21장 12절 및 23-25절.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레위기 24장 12-20절.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19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 한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신명기 19장 18-21절. 노아, 모세, 그리고 선지자들은 자신의 이웃을 죽이거나, 불구자로 만들거나, 도는 상처를 입히는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한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악행을 한사람은 반드시 죽음이나, 불구로 만들거나, 또는 신체적 상처로서 처벌받아야 한다. 부정행위는 부정행위로, 살인은 살인으로, 상처는 상처로, 악은 악으로 반드시 대적해야 한다. 노아, 모세, 그리고 선지자들은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부인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악에 저항하지 말라,” 즉, 손해를 손해로 맞서지 말라, 그러나 차라리 악을 행하는 자로부터 계속되는 손해를 참으라. 허용되던 것은 금지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저항을 그들이 가르쳤는지 깨닫는 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금지하는 저항을 정확히 알게된다.

 

Q.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피해는 피해로 대항함을 허용했는가?

A. 그렇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금한다. 기독교인은 그에게 해를 가한 자신의 이웃사람을 죽도록 하거나, 되돌려서 그에게 피해를 줄 수 권리를 어떤 경우에도 가지고 있지 않다.


Q. 자기 방위를 위해 그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 수 있는가?

A. 아니다.


Q. 그에게 해를 가한 사람이 처벌 받도록 기소장을 가지고 판사에게 갈 수 있는가?

A.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한것는, 사실상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Q. 외국의 적들이나 평화를 교란하는 사람들과 대치하여 싸울 수 있는가?

A. 확실히 아니다. 그는 전쟁이나 전쟁 준비에 참여할 수 없다. 그는 살상용 무기를 이용할 수 없다. 그는 그가 혼자나 다른 사람과 있더라도, 본인이 직접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피해를 피해로 대항할 수 없다.


Q. 그가 자진해서 투표하거나 정부를 위하여 병사를 마련해 줄 수 있는가?

A.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율법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Q. 그가 통상 군사력, 사형, 그리고 폭력에 의존하고 있는 정부를 돕기 위하여 자진해서 자금을 줄 수 있는가?

A. 아니다, 그 돈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목적은 의로워야 하며, 목적이나 수단에서 선해야 한다.


Q. 그러한 정부에 세금을 낼 수 있는가?

A. 아니다; 그는 자진해서 세금을 내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저항해서는 안된다. 세금은 정부에 의하여 부과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거두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는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독교인은 폭력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그는 당국에 의하여 그것에 과하여진 폭력으로 인하여 손실이 있더라도 당장 자신의 재산을 제공하여야 한다.


Q. 기독교인이 선거에서 투표하거나, 정부 또는 법률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가?

A. 아니다; 선거, 정부, 또는 법률 사업에 참여함은 폭력에 의한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다.

 

Q. 무저항의 교리의 주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A. 그것만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그리고 또한 자신의 이웃의 마음에서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로 인하여 이 교리는 세상에서 악이 시대를 따라서 잔존하여 증가되게 한 것을 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여 그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모든 악의 뿌리인 증오의 감정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그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으니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심지어 악을 극복하는 것이 목적이더라도, 그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해로움을 배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몰아 내어야 하는 그 악한 영을 낳거나, 적어도 풀어주어서 격려하는 것이다. 죄악은 결코 죄악으로 고쳐질 수 없다, 그리고 악은 악으로 극복할 수 없다. 진실한 무저항은 악에 대한 유일하게 진정한 저항이다. 그것은 뱀의 머리를 부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악한 감정을 뿌리 뽑을 수 있다.


Q. 그러나 그것이 무저항의 원칙의 진정한 의미라면, 그것은 언제나 실행할 수 있는가?

A.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다른 어떤 선행처럼 실행될 수 있다. 선행은 자기 희생, 궁핍, 고통,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 목숨 자체의 희생이 없다면 모든 상황하에서 실행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실천함 보다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미 유일한 진리의 생명에서 죽어 있다.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 그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 무저항이 하나의 생명 또는 약간의 물질적인 행복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반면, 저항은 수천이나 되는 그런 희생을 요구한다. 무저항은 구원이다; 저항은 멸망이다. 정의롭게 행동함이 정의롭지 않게 행동함보다, 피해를 보는 것이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 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덜 위험하다, 심지어 현재의 생명에 대한 자신의 관계에 있어서도 덜 위험하다. 모든 사람들이 악을 악으로 저항함을 거절한다면 우리의 세상은 행복할 것이다.

 

Q. 그러나 오직 적은 사람들만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

A. 만일 오직 한 사람만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리고 남은 모든 사람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한다면, 죽은 자의 피로 물든 시저의 왕관을 쓰고 사느니, 적을 위해 기도하면서, 무저항의 사랑의 영광으로 죽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더욱 숭고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악을 악으로 막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한 사람, 아니 수천 사람들이, 문명화된 또는 야만적인 이웃들 사이일지라도, 폭력에 의거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폭력에의한 위험에서 자유롭다. 강도, 살인자, 그리고 사기꾼이 무기를 들고 그들을 대적하는 사람들 보다도 빨리 그들을 평화스럽게 놓아 줄 것이다, 그리고 칼을 빼어 드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바라며, 친절하고 해롭지 않게 처신하며, 손해를 용서하고 잊어 버리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평화를 누리거나, 그들이 죽는다면, 축복 받으며 죽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일 모두가 무저항의 명령을 지킨다면, 명백히 아무런 악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만일 대다수가 그렇게 행동한댜면, 그들은 심지어 행악자들에게도 사랑과 선한 의지의 지배를 세울 것이며, 결코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아니하며, 결코 폭력에 의거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많은 소수라면, 그들은 사회에 매우 유익한 도덕적 영향을 행사하여 모든 잔인한 처벌이 폐지될 것이며, 폭력과 반목은 평화와 사랑으로 대체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오직 작은 소수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세상의 비웃음보다 더 심한 것은 거의 겪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 세상은, 비록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지 목하지만, 무저항에 따른 그들의 보이지 않는 행위로 해서 지속적으로 더욱 현명해지고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소수의 사람들 중에 어떤 구성원 들이 죽음에 처해진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의 뒤에, 순교의 피로서 성스러워진 그들의 교리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그리고 군림하는 사랑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라지지 않는 유산이 될 지어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아딘 발루

오십년 동안 발루는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책들을 썼으며 출판하였다. 이들 작품들은 그들의 명료한 사상 그리고 웅변같은 해설로 돋보이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 문제는 모든 가능한 각도에서 보아진다, 그리고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는 모든 기독교인에 대한 이 명령의 구속적인 본질은 굳건히 확립된다. 구약과 신약 성서로부터 무저항의 교리에 대한 모든 일반적인 이의들이 제시된다, 예를 들면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 내었던 일 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반증하는 주장들이 이어진다. 이 행위의 규칙의 실용적 합당함이 성서와 별도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의 실용성에 대한 통상의 반대론들은 선언되며 논증된다. 그리하여 그의 저서의 한 장은 예외적인 경우의 무저항을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무저항의 규칙이 적용하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 법이 보편적 권능이 없음을 증명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들을 인용하면서, 그는 규칙의 적용이 필요하며 합당한 것은 정확하게 그것들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측면이 없다, 그 자신 쪽이든, 그의 반대자 쪽이든, 그의 저서들에서 그것들이 뒤따르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러한 작품들이 가져야 하는 오해의 여지가 없는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거론한다, 그리고 우리는 발루의 작품들이 꽤 알려졌을 것이며, 그가 표명한 개념들이 받아들여 졌거나 반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인 게리슨의 작업은, 그의 무저항 협회의 창시 및 그의 선언에서, 퀘이커들과 나의 서신들 보다 더욱, 기독교의 지배적인 형태가 힘에 의한 무저항에 대한 그리스도의 율법으로부터 떠난 것은 오래 전부터 관찰되었으며 지적되어 온 오류였으며, 그리고 사람들은 시정하기 위해서 애써왔으며, 아직도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확신을 시켜주었다. 발루의 작업은 훨씬더 이러한 시각에서 나를 확신시켰다. 그러나 게리슨의 운명은, 그보다 더한 발루의 운명은, 같은 방향을 향하여 오십년 간의 완고하고 끈질긴 작업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알려지지 못한 점에서, 그러한 모든 노력에 대한 일종의 무언의 그러나 집요한 침묵의 음모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나를 확인시켰다.

발루는 1890년 8월에 죽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시각에 관한 미국의 잡지(종교 철학 잡지, 8월 23일)에 그에 대한 부고가 있었다. 이 칭찬하는 알림에서 발루는 교구의 영적 감독자였으며, 그는 팔천 내지 구천의 설교를 하였고, 천 쌍을 결혼 시켰으며, 그리고 오백개의기사를 썼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헌신한 목적에 대해 말하는 한 줄의 말도 없었다; 심지어 “무저항”이란 단어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그것은 퀘이커들이 이백년 동안의 모든 전도와, 그리고 또한, 그의 협회와 잡지 그리고 선언을 기초한 아버지 게리슨의 노력의 경우처럼, 발루의 평생 작업도 마찬가지 였다. 참으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결코 존재 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체크 힐치스키의 저서에서, 우리는 힘에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를 설명하며 이 계명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질타하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작품들이 파묻혀 있음에 대한 놀라운 예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최근에 알려졌으며, 여태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나의 책이 독일에 등장하자마자, 나는 프라하로부터, 그곳 대학의 교수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아직 출한된 적이 없는 15세기의 체크인 헬치스키의 한 작품이 존재함을 내게 알려 주었으며, 그 제목은 “신앙의 그물” 이었다. 이 작품에 대하여, 그 교수가 말하기를, 헬치스키는 내가 나의 저서 “나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표현한 것과 같은 진리의 그리고 거짓의 기독교에 대한 정확하게 똑같은 시각을 표현하였다고 했다. 그 교수는 내게 헬치스키의 작품은 [페테스부르크 학술 저널]에 처음으로 체코어로 출판될 것이라고 썼다. 나는 그 책 자체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헬치스키에 대하여 알아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프라하 교수가 내게 보낸 독일어 책과 피핀의 체코 문학 역사로부터 아래의 정보를 얻었다. 이것은 피핀의 설명이었다:

“ ‘신앙의 그물’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며, 그것은 사람을 세속의 바다의 깊은 곳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죄악에서 끌어 내어야 한다. 진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진실한 신앙을 이단으로 잘못 알고 있는 때가 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해서 진실한 신앙이 무엇으로 이루어 지는지 가리켜 주는 것이다, 비록 아무도 이것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둠에서 사람으로부터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율법을 쉽게 이해하도록, 헬치스키는 기독교 사회의 원시적 조직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조직은, 그가 말하는 바, 이제 로마 교회에 의해서 가증스러운 이단으로 여겨진다. 이 원시 교회는 평등, 자유, 그리고 형제애를 기초로하는 사회 조직에 대한 그의 특별한 이상이었다. 헬치스키의 시각에서, 기독교는 아직도 이러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회가, 왕과 교황이 필수적인 사회적 계급과 같은 불필요한 모든 기타 형태를 찢어 없애는 그 자체의 순수한 교리로, 돌아 가는 것이 오직 필요할 뿐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사랑의 율법만이 충분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헬치스키는 기독교의 타락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시대로 돌리는데, 교황 실베스터는 그의 모든 이교적 도덕 및 삶과 함께 그를 기독교 교회로 받아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답례로 교황에게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부여했다. 그 시대 이후로 이 두 지배 권력은 끊임없이 서로가 오직 외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도왔다.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전 세계를 오직 그들의 권력에 복종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을 부추겨서 서로 살인하고 약탈하도록 하였으며, 그리고 교리에서나 삶에서 기독교를 무익한 것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헬치스키는 전쟁의 수행과 사형에 관한 권리를 완전히 부정한다; 모든 병사들, 심지어 ‘기사’ 마저도 오직 난폭한 행악자-살인자이다.”

똑같은 설명은, 약간의 전기적 내용 및 일부 헬치스키의 작품들에서 발췌한 것들을 추가한 독일어 저서에서도 주어지고 있다.

이런식으로 헬치스키의 가르침의 취지를 배운다음에, 나는 좀더 끈기를 가지고 그 학회의 잡지에 “신앙의 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고, 그리고 나서 이년 삼녀, 그리고 아직도 그 책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그 책의 인쇄가 시작되었다가 중지된 것을 안 것은 1888년 이었다. 나는 인쇄된 교정쇄를 구하여 그것들을 끝까지 읽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놀라운 책이었다.

그것의 일반적 경향은 핀에 의하여 완벽한 정확함으로 주어졌다. 헬치스키의 근본적인 사상은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의 시절에 속세의 권력과 손을 잡으므로써, 그리고 그러한 상태로 발전해 나가면서, 완전히 왜곡되었으며 전적으로 기독교적이기를 중단해 버렸다. 헬치스키는 자신의 저서에 “신앙의 그물” 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모토는 제자들을 사람들의 어부라고 부르는 복음서의 구절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이런 비유를 전개하면서,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모든 세상을 그의 신앙의 그물에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물고기들은 그물을 찟고서 거기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모든 나머지들은 더 큰 물고기들이 만든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왔다, 그래서 그물은 거의 텅비어 있다. 그물을 찟은 큰 물고기들은 통치자들, 황제들, 교황들, 왕들이며, 그들은 권력을 포기 하지 않았으며, 진실한 기독교 대신에 단순히 그 가면만을 걸쳤다.” 헬치스키는 정확하게 이들 시절에 무저항을 실천하는 메노나이트 및 퀘이커들 그리고 과거에 보고밀라이트, 폴리시안 및 다른 교파들에 의해 가르쳐졌으며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가르친다. 그는 기독교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온순함, 온유함, 평화스러움, 피해에 대한 용서, 한쪽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함이 예상되는 것으로, 폭력의 사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폭력은 권력에서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는 것을 가르친다.

헬치스키의 추론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통치자나 병사가 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정부나 교역에 참여할 수 없으며, 또는 심지어 땅의 소유자가 될수 없다; 그는 오직 장인이나 농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공식적인 기독교를 공격하였음에도 분서됨을 피한 몇 안되는 작품중의 하나이다. 모든 그러한 소위 이단적인 작품들은 그들의 저자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공식적인 기독교의 오류를 고발한 작품들은 거의 없다. 그 책은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특별한 흥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런 흥미는 제껴 두고라도 여러가지 관점에서 그것은 그 목적의 심오함에서, 그것이 쓰여진 나라의 언어의 놀라운 힘과 아름다움에서, 그리고 그것의 오래 되었음으로 해서 가장 두드러진 사상의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지만 사 세기가 넘는 동안 인쇄 대기중에 있으며, 그리고, 몇명의 학식있는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 모든 작품들은, 퀘이커의 것이든, 게리슨의 것이든, 발루의 것이든, 아니 헬치스키의 것이든, 복음서의 신조들 위에서, 우리의 현재 세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거짓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며 증명하고 있으므로, 영적인 교사들과 그들의 무리들 전부의 사이에서, 관심, 흥분, 대화, 그리고 토론을 일깨웠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반드시, 기독교 교리의 가장 본질을 다루고 있으므로, 연구되고 진리로 수용되거나, 아니면 논박되어 거부당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들에게 똑같은 운명이 반복되었다. 가장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 신자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믿음이 없는 자유주의자들 마저도,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가 그것들에 대하여 똑같이 한결같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진실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 진 모든 것들은 무시되었거나 잊혀진 상태에 있다.

그러나 아직도 더욱 놀랍게도, 다른 두권의 책들은, 그것들은 나의 책이 나오자 듣게 되었는데,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1824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디몬드의 책 “전쟁에 관하여” 와 1864년에 쓰여진 다니엘 무서의 책 “무저항”을 의미하고 있다. 이 책들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특히 놀라운데, 그것들의 본래의 가치들을 떠나서, 두권의 책들이 이론적이기 보다는 삶에 대한 이론의 실용적 적용을, 기독교의 병역 의무에 대한 태도-이것은 요즈음의 보편적 징병제 시대에 특히 중요하며 흥미가 있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전쟁이 자신의 종교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국민은, 정부가 그에게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명령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내가 생각하기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은 현대와 같이 보편적 징병제 시대에 특별히 중요하다. 모두 다가--아니, 적어도 과반수이상의 사람들이-기독교인들이며, 모든 사람들이 병역 의무에 소집된다. 기독교도인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명령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디몬드의 대답의 요지이다.

“그의 의무는 겸허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복무를 거부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확실한 생각을 해보지도 않은 채, 정부의 대책들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들에 달려 있거나, 정부들이나 통수권자들이 그들의 국민을 대신하여 옳고 그른 것의 문제를 결정하며, 국민들의 의무는 단순히 복종하는 것이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오직 사람의 양심을 흐릴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부의 회의들에 참석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나는 정부의 범죄 행위에 책임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이 범죄 행위인 줄을 알면서, 그것들을 실행함을 돕는 것은 우리의 통치자들의 범죄 행위가 우리의 것으로 된다. 그들은 정부에 복종해야 하며, 그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그들에게서 그들의 통치자들에게 이전 된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을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맡긴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들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없다; 선한 것이 장점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행위들에서 악한 것에 대한 책임도 없다, 왜냐하면 그 행위들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 배우도록하는 그들에 대한 명령에서 바로 똑같은 것이 전달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즉, 장교 혼자만이 그의 명령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들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의 예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당신의 장교가 당신에게 이웃의 아이를 죽이라고, 당신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를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당신은 복종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전체 논리는 실추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한가지 문제에서 통치자를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디에다 당신이 그들에게 복종할 수 있는 선까지를 긋겠는가? 기독교에 의해서 그어진 선 말고는 없다, 그리고 그 선은 합리적이기도 하며 실용적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기독교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유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군대에서 복무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 사람들은 위대한 임무의 달성이 그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라. 세상에서 인류의 운명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달려 있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종교에 대한 그들의 충실함에 달려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고백하게 하라, 그리고 말로써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고통으로서 그것을 위해 일어서라.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가 살인을 금지한다고 믿는다면, 살인에 당신의 손을 얹게 부탁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나 명령들에 유의하지 말라. 폭력의 사용에 대한 그러한 확고한 거부를 통해서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에게 약속한 축복을 내려 달라고 기원하라, 그러면 당신이 인류의 개혁에 도움을 주었음을 인정하는 때가 올 것이다.

무서의 책은 “무저항은 확고하다”, 또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이 세상의 왕국이 분리되다.”라고 불린다. 이 책은 똑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미국 정부기 남북 전쟁 시기에 그 시민들로부터 병역 의무를 부과하고 있을 때 쓰여졌다. 그리고 그것 역시 언제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상황하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그 작가의 서문에 언급한 내용의 취지가 있다: “양심을 근거로하여 싸우기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무방비’ 또는 ‘무저항’ 기독교인들로 불려진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방어하는 것, 병역에 복무하는 것, 또는 원수에 대해 전쟁을 하는 정부의 소집을 거부한다. 최근까지 이 종교적 양심의 가책은 정부에게 정당한 구실로 여겨졌으며, 그것을 요구한 사람들은 복무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시작될 때 대중 여론은 이 문제에 대해서 들끓었다. 그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의 고통들과 위험들을 감수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정부의 보호 아래서 이익들을 함께 하였으면서도 이제 절실하며 위험한 때에 나라의 방어하는 노력들과 위험들을 짊어 짐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태도를 괴물이며, 비이성적이며, 그리고 의심스럽다고 선언하는 것도 심지어 당연했다.”

  

많은 연설가들과 작가들이, 우리의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건대, 이런 태도를 비난하기 위하여 일어섰다, 그리고 성서는 물론 보통 상식들을 근거로하여 무저항이 죄악임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히 당연하였으며, 많은 경우들에서 그 작가들은 옳았다-옳았다, 즉, 그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혜택을 포기하지 않고 병역 의무의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러나 무저항 자체의 신념에 대해서는 옳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작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무저항의 규칙의 구속적인 본질을 증명한다, 즉, 이 명령은 완전히 명료하며, 오해의 가능성이 없이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 보다 사람에게 더 복종하는 것이 의로운지 숙고하라” 고 베드로와 요한이 말했다. 그리스도가, “힘으로써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이것이야 말로 정확하게, 병역 의무에 있어서 그에 관한 주장에 대해,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태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원리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작가는 그것을 결정된 것으로 여긴다. 두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폭력에 의존하는 정부에 의하여 수여되는 혜택을 거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군대에 복무하기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지는, 작가는 그것을 자세히 고려한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율법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그가 전쟁에 나가지 않으므로, 정부 기관, 법정, 또는 선거 등의 어느 것도 이용해서는 안되며,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에 대하여서 당국들, 경찰, 또는 법률에 호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책에서 그는 구약성서와 신약 성서와의 관계와, 기독교도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부의 가치를 다루며, 그리고 무저항의 교리와 그에 대해 행해진 비난들에 대한 약간의 고찰을 한다. 작가는 이와같이 말하며 그의 책을 결론짓는다: “기독교인들은 정부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점에서 정부에 복종할 수 없으며, 더우기 그것에 참여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 밖으로 데려갔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축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기대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영혼이 그들을 만족하게 하며 모든 위치에서 행복하게 한다. 만일 세상이 그들을 참아 준다면, 그들은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만일 세상이 그들을 평화롭게 두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륻은 지상에서 나그네들이며 그들은 아무런 정해진 거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묻는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가지 오직 필요한 것은 “그들의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심지어 이 두권의 책에서 주장된 신념에 관한 문제는 접어 두고라도, 전쟁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기독교인의 의무에 대해서, 우리는 실용적인 중요성과 그 문제를 결정할 시급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수백, 수천의 퀘이커들, 메노나이트들, 우리의 모든 두호보르스티, 몰로카니 및 어느 정해진 교파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폭력의 사용-그리고 결국, 병역 의무-는 기독교와 상반된다고 여긴다. 결국 매해마다 러시아의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근거로 복무를 거부하는 약간의 사람들이 병역 의무에 소집된다. 그렇다면 정부가 그 사람들을 풀어 주는가? 아니다. 정부가 그들을 강제로 가게 하는가, 그리고 불복종의 경우에 그들을 처벌하는가? 아니다. 이것이 1818년 정부가 그들을 처리한 방법이다. 여기에 카르스 출신의 니콜라스 미라비요프의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검열을 거치지 않았으며, 러시아에서 알려져 있지 않다:

 

"tiflis, October 2, 1818.

“티플리스, 1818년 10월 2일

  

“아침에 사령관이 내게 말하기를, 탐보프 정부의 지주에게 소속된 다섯 명의 농부가 최근에 죠지아로 보내졌다. 이 사람들은 병사로서 보내졌으나 그들은 복무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여러번 채찍을 맞고 태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복무하기 보다는 차라리 가장 잔인한 고문들과, 심지어 죽음도 쉽게 받아들이려 했다. ‘보내 달라’라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를 놓아 달라;

우리는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그리고 황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왜 그에게 공물을 바쳐야 하는가;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어떤 사람을 전투에서 죽이려고 나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켜야 하는가?

당신은 우리를 토막내어 죽일 수 있지만 우리는 병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 대해 동정을 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자선을 베풀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배급품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것들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것들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그들 농부들이 한 말이었으며, 그들은 러시아에 그들 같은 사람들이 다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네 번 씩이나 각료회의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문제를 황제 앞에 제출하기로 했다, 그리고 황제는 그들을 교정을 위해 죠지아로 데려 가라고 했다, 그리고 최고 사령관에게 명령하기를 이 농부들을 나은 정신을 갖도록 함에 있어서 그들의 점진적인 성과에 대한 보고서를 매달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 교정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전체 일화는 정말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극비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정부가 75년 전에 취한 방법이었다.-이것은 정부가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이며, 사람들로부터 계획적으로 숨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정부가 행동하는 방법이며, 예외적으로 독일의 메노나이트들의 경우에는, 케슨 지방에 살았으며, 병역 의무에 대한 탄원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숲속에서 노동으로 그들의 복무 기간을 감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메노나이트들이 종교적 근거로 군대에 복무하기를 거부한 최근의 사건들에 있어서, 정부 당국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행동했다:

시작하자면, 그들은 그 피고인을 교정하며 그리고 그를 “나은 정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시대에 사용되는 모든 강압 수단에 의거 한다 그리고 이들 대책들은 극비리에 실행된다. 나는 1884년 모스크바에서 복무를 거부한 한 사람의 경우에서, 그의 거부가 있은지 두달 후에 그 사람에 대한 공식 서신이 큰 책만큼 쌓였으며, 국방성 내에서 절대 비밀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주로 그 피고인을 신부들에게 보내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에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항상 복종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권고함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이 못하므로, 영적인 당국들에 의하여 충고들 받은 뒤에, 그들은 그를 헌병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 뒤에, 일반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범법에 대하여 아무런 정치적인 이유가 없음을 알아내고, 그를 다시 돌려보낸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의사들에게, 그리고 정신병원에 보내어 진다. 이 모든 절차 중에 기소된 범죄자로서 그는 자유를 박탈당하며 모든 종류의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네 가지 경우들에서 되풀이 되었다.) 의사들은 그를 정신병원에서 내 보낸다, 그리고 나서 그를 자유롭게 놓아 주는 것-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가 행한 것처럼 복무를 거부하는 것을 조장할 것이기에-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그가 병사들 사이에 남겨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종류의 비밀스런 계책이 동원된다, 그것은 병사들이 역시 그로부터 병역 의무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그들이 확신하는 것처럼, 전혀 그들의 의무가 아니며 그것과는 정반대인 것을 배울까 두려워서이다.

정부로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과거에 행해진 것처럼, 그 무저항인을 매질이나 또는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가 모두 고백하는 교리를 믿기 때문에 그를 공개적으로 사형에 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종을 거부한 사람을 자유롭게 두는 것도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부는 그 사람을 학대하여 강제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거나, 이런 저런 방법으로, 공개적으로 그를 사형하지 않고서, 아무도 모르게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찌하였든 그 행위 및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숨기려 한다. 그리하여 모든 종류의 계첵과 계략과 잔인함으로 그를 꼼짝 못하게 한다. 그들은 그를 전방에 보내거나 부추겨서 불복종하게 만들며 군율을 어긴 죄로 심문하여 규율 대대의 감옥에 가두며, 그곳에서 누구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마음대로 학대할 수 있거나, 그들은 그를 미쳤다고 주장하여 정신병원에 가두어 둔다. 그들은 한 사람을 이런식으로 타쉬켄트에 보냈다-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그를 타쉬켄트 군대에 전출하는 것처럼 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옴스크로; 세번째 사람은 불복종으로 기소하여 감옥에 수감하였고; 네번째 사람은 정신병원에 보냈다.

어디에서나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 된다. 정부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칭하는 바, 자유주의 및 진보된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의도적으로, 폭력이 그 차체로서 가장 두렵고, 엄청나며, 타오르는 형태로서-다시 말하면, 그것이 누구더라도, 어느 사람이든 살인하기 위하여 준비된 병사들의 군대의 형태로서-기독교의, 또는 심지어 사회가 그의 원리라고 고백하는 인류애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음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말해졌으며, 쓰여 졌으며, 또는 행해졌으며, 또는 행해지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 진다.


그런 결과로 해서, 내가 좀더 높은 지배 계급들의 태도에 대하여 얻은 정보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및 미국에서, 이 문제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이들 지배 계급에서는 진정한 기독교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적대적인 태도가 존재하며, 그것의 모든 표출들에 대하여 그들이 침묵함에서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남을 내게 인식시켜 주었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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