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大權과 竹山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好學 2011. 9. 16. 22:04

[인천] 大權과 竹山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1899년 인천 강화군에서 출생했다. 1912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강화군청 고용원, 면서기 등으로 일하다가 21세 되던 해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3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나 박열 등과 함께 재일 유학생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그 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조선공산당 결성, 한일반제동맹 등에 관여하다가 상해에서 체포돼 6년간 재차 영어의 몸이 되었다.

    광복이 되자 인천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인천지부 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행태에 회의를 느껴 1946년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서신을 발표한 직후 '민전' 인천지부 의장을 사임하고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천명했다. 1948년 5·10선거 당시 인천서 출마해 당선된 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54세 때인 1952년 죽산은 인천 출신 최초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사실상의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해 일약 2백16만 표(22.5%)를 얻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죽산은 정적으로 급부상했다. 여세를 몰아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정부 당국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트집잡아 그를 잡아들였다. 1959년 대법원은 죽산이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하여 사형을 확정하고 그해 7월 31일 형을 집행하고 말았다.

    두 차례에 걸친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자요, 현역 야당 대표가 낸 재심 청구조차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고 황급하게 처형을 강행했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자유당 정권이 그를 거세하기 위해 꾸민 '사법살인'(司法殺人)이라고 보는 한편 죽산을 '시대를 앞서간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형 선고가 있은 직후 죽산은 "나는 만 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한다."며 죽음을 초연히 맞아들였다고 한다. 대선을 치른 최근, 대권에 도전했다가 생명까지 내놓아야 했던 불운의 정치가 죽산은 여러 모로 한국 정치사와 인천의 그 위상을 생각케 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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