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기상대

好學 2011. 9. 9. 22:24

인천기상대

 

 

  • 그 옛날 선조들은 기상 현상을 오늘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가뭄이 들거나 태풍이 몰아치는 경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넘어서는 하늘의 일로 보았고, 임금은 이를 자신의 부덕이나 실정 때문이라고 여겨 스스로 제를 올려 하늘의 노여움이 거두어지기를 기원하였다. 이처럼 기상 현상을 왕조나 국운의 쇠퇴와 연관지어 바라보았기에 사관들은 심지어 별의 밝기, 달무리의 모양, 토우(土雨) 같은 여러 현상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기상현상을 비로소 과학으로서 관측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었던 것은 과학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요, 강우량을 측정하여 농업 생산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창의력의 소산이었다. 물론 기우제, 기청제 등을 그만 둔 것은 아니지만, 천문 기상대인 서운관을 두었고, 세종 16년 1434년에는 대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규표 등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또 같은 시기에 관상감에 축조한 소간의대는 해시계인 일영대(日影臺)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상 관측의 절대적 요소인 온·습도, 풍속, 기압 등의 개념이 이 땅에 선보인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일본은 칙령 제60호에 의거 1904년 4월 10일 군사 기밀상 장소를 밝히지 않은 곳(중구청 뒷길 수진여관 자리라는 설이 있음)에 제3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이것이 근대적 기상 관측의 남상이었다.

    그 후 1905년 1월 원래 한국 황실 재산이었던 인천 응봉산 정상 3만평 부지에 목조 2층 69평 규모의 측후소 건물이 세워졌다. 측후소는 당시 최신식 시설인 풍력계, 지동계, 일조계, 자동 강우계, 백엽상, 증발계, 온도계, 천문대 등을 완비하고 매일 오후 3시의 천기예보와 폭풍우 신호, 정오 시보를 냈으며 경성측후소를 비롯한 전국 12개 측후소를 관할하는 한편 일본 중앙기상대와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 등과 정보를 교환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정부는 1945년 9월 인천기상대를 국립 중앙기상대로 재발족시켰으나 6·25전쟁통에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고,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를 서울로 이전하여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1992년 정부 조직 개편에 따라 인천기상대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년으로 우리는 근대 기상 관측 100년을 맞게 되는데 새삼 우리에게 근대화란 무엇이었는지 그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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