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그레고리 (Gregory)

好學 2011. 9. 15. 21:40

 

대 그레고리 (Gregory)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그레고리 1세(Gregory:540-604)

 

(Magnus)

 

 

● 영원한 도시 로마,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고 서구 사회의 핵심적 도시였던 로마는 410년경 게르만 부족인 서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된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민족들이 수시로 서방을 침략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등불의 역할은 교회에 맡겨졌다.

 

특히 빼어난 능력을 지닌 교황들이 등장해 교회와 세상 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묘비에는 라틴어로 「Consul Dei」라고 적혀있다. 「하느님의 집정관」이라는 이 호칭은 그가 사회와 교회 안에서 수행한 이중적인 역할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세속 권력과 교황의 관계에는 변화가 있었다. 이방 칩입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교황으로 하여금 정부에 보다 깊이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침입자들을 물리칠 수 없었고 서방의 로마 권력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교황권은 민간권력이 결여한 자원과 함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권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많은 개인들이 죄 용서를 위한 종교 당국의 중재 기도에의 답례로서 교회에 자신들의 토지를 유증하였다. 교황은 그와 같이 기증된 재산들을 관리하며 거기에서 나온 수입을 이용해 이전의 정부가 행사했던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레고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식량과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야만인들에게 자로잡힌 개인들을 속량하였고, 로마의 멸망을 면하기 위해 그들과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는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및 프랑스, 스페인, 잉글랜드 등지에 이방 왕국들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황으로서 그는 혼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뛰어나게 완수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교회 역사에서 몇몇 인물에게만 부여되는 「대」(Magnus)라는 칭호를 얻었고, 암브로스, 제롬, 어거스틴과 함께 서방교회의 4대 교부(敎父)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최초의 수도사 출신 교황이다. 탁월한 정치력으로 이탈리아에서 로마 교회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하였으며, 비잔틴 제국과 롬바르드족(族)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등 외교 역량도 돋보였다. 성직의 매매를 금하고 복음화사업·사회사업을 장려하였으며, 특히 빈민·난민·포로·노예를 보호하면서, 로마·시칠리아 등의 교황령(敎皇領)을 확보, 교황권을 확장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멀리 앵글로색슨에게까지 전도하고, 특히 프랑크족(族)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욥기》와 복음서를 비롯하여 많은 성서해설과 서간문·사목규칙(司牧規則) 등의 저술을 통하여 종교·문학 방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성가집 《그레고리오 성가(聖歌)》를 편찬하게 하여 교회음악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워낙 뛰어나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교리상으로 아주 나쁜 몇 가지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연옥설을 만들어 낸 것과 교황권 확립이지요. 사실 자신은 교황이라 불리우기를 단호히 거절했지만, 사실상 교황권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는 일을 다 한 것입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그레고리를 교황의 시초라 생각한다.

 

● 그레고리는 540년경 로마에서, 펠릭스 3세(483~492)와 아가페토 1세(535~536) 등 두 명의 로마교회 지도자를 배출한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고르디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이었고 모친 실비아는 신심이 돈독했다. 아버지는 귀족으로 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나 그레고리의 탄생 후에 가문, 재산, 고위관직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성직자가 되었던 사람인만큼, 그들의 자녀인 그레고리오가 원래 신심이 두텁고 성덕이 출중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레고리는 로마의 귀족가문의 자제로서 당시 로마제국의 최고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으며 수사학, 법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레고리는 특히 성 암브로시우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제롬 등 위대한 신학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을 당시, 30세 경의 그레고리는 이미 유스티노 황제의 신임을 받아 로마 제국의 중직에 취임하는 명예를 획득했으나, 얼마후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레고리는 관직을 사임하고 수도의 길을 선택하여 절제와 금욕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곧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정리하여 시칠리아 섬에 여섯 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로마에 있는 저택을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개축해 성 안드레아에게 봉헌한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모두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헌납하고 자신은 즉시 세속을 떠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수사가 된 그는 전심전력 덕을 닦고, 회칙을 엄수하며,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금식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과격할 정도로 실행한 결과 위(胃)를 크게 해하기까지 해서 이 병은 평생의 고질이 되었지만, 그의 왕성한 정신력은 육체의 허약함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 성경은 우리의 정신은 고결하고 우리의 육신은 사악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몸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육신을 잘 관리할 책임이 있다. 요즘은 육신을 너무 소중히 여겨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 문제이지만, 자신의 몸이 병들지 않고 건강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감당하는데 연약한 육신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그런데 육신에 대한 감각이나 태도는 사람마다 많은 차이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금만 피곤해도, 열만 조금 나도 드러눕고 만사를 제쳐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지간한 감기 정도는 거뜬히 이겨내고 자신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사람도 있다. 몸을 잘 관리하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정신이 육신의 조그만 고통도 참아내지 못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나약하게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접하면서, 저들의 강인한 정신력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모든 충성된 교회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어지간한 육신적 고통이나 어려움으로는 저들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성도 여러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은 우리의 육신의 고통과 연약성까지도 뛰어넘는 능력의 말씀임을 깨닫기 바란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성에서 벗어나서 잘 참을 수 있는 어른스러운 장성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

 

●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그레고리를 계속 수도원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시대가 그의 능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AD578년 그레고리가 38세 되었을 때, 그는 로마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해에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그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궁정에 로마교회의 사절로 파견된다. 그레고리는 그곳에 머물며 외교적, 정치적, 종교적 경험을 쌓았으며, 또한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는 평생 동안 관계를 맺게 된다.

 

AD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전에 세운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수도생활의 규율 개선과 수도원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같이 절제와 경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종’이 되기 위해 수도원을 위해 일하던 가운데, 그의 나이 50세 때인 AD590년 수도자로서는 최초이며 또 유례없는 만장일치로 로마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된다. 이때 그레고리오는 그 직분을 맡기를 사양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전히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로마교회의 수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이 자신의 영성생활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신심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적이었고, 매우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활동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직책을 수락하고 중세 교회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다.

 

● 로마교회의 수장으로서의 그레고리의 활동은 후대의 교황들과 중세의 교회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는 로마교회의 감독으로서 종교적인 지도자였지만 세속적 업무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레고리는 로마교회의 감독직에 오르면서 그의 행정수완과 광대한 이상, 그리고 불굴의 실천력으로 교직제도를 개편하고 교회의 규율을 강화함으로써 교회 소유의 모든 영지를 쉽게 관할하게 되었고, 교회령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으로 교회의 각종 구제사업은 물론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 실로 로마의 황실의 재정은 바닥이 날 지경이었으나 로마교회의 재정은 나날이 견실해져만 갔다.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누스황제 이후 콘스탄티노플이었는데, 수도의 위치가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보니 아무래도 제국의 서쪽 지역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상당히 위축된 가운데 이민족들의 침공 앞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해 로마와 라베나 사이에 위치한 영토를 점령했지만 로마의 황제는 그들을 쳐부수기 위해 군대를 보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레고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군대를 보내 그들의 왕과 잠정적인 평화를 맺었다. 후에 그는 로마시가 약탈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 롬바르드인들에게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에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남이탈리아, 코르시카, 시실리, 고올, 북아프리카 등지의 로마교회 소유 토지들로부터 들어온 수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입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롬바르드인들로부터 포로를 되찾아 오는데도 사용되었으며, 도시의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지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업무를 이행하는 주최가 로마제국의 황제나 장군, 관리가 아니라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회의 제도는 중앙집권제 형태로 서서히 조직이 강화되어 나갔으며, 그레고리는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 전체를 총지휘하는 총감독의 신분으로 교회의 우두머리였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마침내 그레고리는 당시 무력한 황제를 뛰어넘어 로마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6세기에 이미 로마제국의 동쪽과 서쪽은 소원해져 있었는데, 동방에는 여전히 황제가 있었으나 서방의 속령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이민족 정부에 의해 정복되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로마제국의 동방과 서방 두 세계를 모두 관여하였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그레고리를 ‘보편적 교황’(범 세계적인 교황)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레고리는 그 칭호가 허영심을 자극하고 기독교적 사랑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하면서 그 칭호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종의 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이미 세상의 흐름은 로마교회의 감독 그레고리를 로마제국의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 군사에까지 실권을 쥔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 그레고리교황의 업적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선교에 관한 것이다. 선교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후 유럽 전역의 기독교 전파에 지대하게 공헌하는데, 6세기경 기독교의 분포는 로마제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다. 로마제국 이외의 지역은 무방비 상태였다.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선교 사업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중단되고 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더라도 한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어려운 과정이다.

 

중세 초기 선교의 첫 번째 대상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이미 3세기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200여년 명맥을 유지하다가 로마교회의 계속적인 보살핌과 협조가 없어 자라지 못하다가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인해 그마저도 소멸될 처지였다. 이때 영국의 교회를 다시 살린 것이 바로 그레고리교황이었다.

 

그가 베네딕트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 한번은 로마의 노예시장에서 너무나 하얀 피부와 금발을 지닌 앵글로색슨족 소년들이 노예로 매매되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용모에 감탄한 나머지 그들은 영국인 즉 라틴어로 ‘앙글리’가 아니라 천사 즉 ‘앙겔리’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시켜, 그들의 영토에서 할렐루야를 부르도록 해야겠다고 말하면서, 본인 스스로 영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로마감독에게 요청한다. 물론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는 언젠가는 꼭 영국을 선교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후 그레고리가 교황이 되면서 영국선교의 꿈은 실현되는데, 그는 AD596년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과 함께 40여명의 수도자들을 영국으로 파견하였고,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가운데 1년후인 597년 성탄절에는 만여명의 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그레고리가 선교사들에게 내렸던 선교 지침이다. 그는 영국에 살고있는 브리튼(Briton)족이나 골(Gaul)족속의 토착 언어를 존중하고, 교회 설립시 토착 문화적인 특성을 고려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레고리가 선교사 일행을 통하여 영국에서 한 선교사업과 또한 그 후에 그들의 뒤를 따라서 영국에 간 선교사들의 활동은 영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하는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같은 그레고리의 선교지침은 오늘 우리의 선교사역에도 귀한 교훈을 준다. 가톨릭의 선교방식이 너무 세속화되고 토착화, 우상화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개신교의 너무 도전적이고 독선적인 선교방식도 변화가 필요하다.

 

● 그레고리는 부패하고 세속적이던 수도사들과 교직자들의 부패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검소한 삶을 장려하였다. 교직의 매매를 금지했으며, 마구잡이로 이루어지던 교역자가 되는 통로를 하나로 통일시켜 교직의 질서를 잡았다. 그리고 교직자들이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보수를 금하였으며, 교직자의 독신 제도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레고리는 교회의 예식과 관련하여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의 천주교 미사는 그레고리에게서 영향받은 바가 심히 크다.

 

신심 깊은 영성가이자 탁월한 행정가, 정치가였던 대 그레고리 교황은 14년이라는 다소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는 역사적 전환기에 교회의 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교회역사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레고리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함께 변천하였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능한 행정가요, 경건한 수도사였으며, 수완 좋은 외교가였고, 건전한 도덕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리를 중세 시대 초기의 이민족들에게 구체적 방법으로 전달한 역량 있는 저술가였다. 특히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대 그레고리 교황’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질 만큼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그런데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듯이, 그레고리교황 역시 세속의 정치 등에 너무 관여하다보니 신앙과 교회의 변질을 초래하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과 계획을 자기 뜻대로, 혹은 세상에 맞추어 실행하다 보니,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성경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레고리가 확립한 신학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연옥설인데, 생전에 교회생활에서 죄에 대한 해결을 받지 못하면 최종적으로 구원 얻기 전에 연옥으로 가는데,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자들을 위해 미사를 올림으로써 연옥에 있는 자들이 해방되어 천국으로 간다는 연옥설을 체계화시켰고, 성인들의 유골을 숭배하게 했으며, 성상 사용을 권장하고, 성찬은 주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제가 기도하면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지지하였다.

그가 쓰러져 가는 로마제국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지탱하려다보니 이같은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를 기독교 신앙 안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이것이 결국에는 교회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실히 살아야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한다. 그러나 ‘열심’이 곧 정답은 아니다. 바르지 못한 열정, 정직하지 못한 열심은 오히려 비극을 잉태하며 퇴보를 가져온다.

주님을 섬기되, 지혜롭고 충성되게 섬기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