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오토 대제(Otto der Große)

好學 2011. 9. 15. 21:22

 오토 1세는 오토 대제(Otto der Große)

 

 

● 요즘 돌잔치나 회갑, 칠순잔치를 뷔페식당에서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먹을 사람이 손수 덜어 먹을 수 있게 한 뷔페식당 또는 뷔페식 식사방식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뷔페는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위치한 스웨덴에서 시작된 음식문화로, 10세기를 전후로 하여 스웨덴에 근거지를 두고 살았던 바이킹 족이 즐겼던 풍속에서 유래한 식사방식이다. 그래서 한때 뷔페를 ‘바이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이킹족은 당시로서는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유럽 각지에 진출하여 상품을 사고팔거나 강제로 빼앗기도 했는데, 다시 말해 해적질을 일삼았는데, 바이킹들은 오랜기간 항해를 했기 때문에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 먹었으며, 육지에 도착해서는 신선한 음식을 실컷 먹었다. 특히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널찍한 상 위에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자기 식성대로 마음껏 갖다 먹는 식사법이 전통이 되었다.

 

지금도 그 습관이 남아서 스웨덴의 축제일에는 새끼돼지를 통째로 요리하여 상에 올려놓는 경우가 많다. 이런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뷔페식 상차림을 ‘스모르가스보드’라 하는데, 바이킹들이 바다에서 활약한 만큼 해산물 요리의 종류가 많다. 한마디로 해석하면, ‘빵과 버터를 식탁에 놓아 마음껏 먹게 한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빵, 연어, 치즈, 소시지 등 각종 음식으로 이루어진 상차림을 뷔페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식사풍습을 프랑스인들이 뷔페라 불렀으며 2차세계대전 후 점차 세계로 널리 퍼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지금부터 1천년전 유럽 북쪽 바이킹들의 식습관에 따라 오늘 우리 아이들의 돌잔치와 어르신들의 회갑, 칠순잔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 지난 시간 샤를마뉴에 대해 살펴보면서 언급했듯이, 8세기 이교도와 이슬람의 광풍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던 로마제국과 기독교 세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불리웠던 샤를마뉴에 의해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이룩하고 다졌던 찬란한 프랑크 제국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814년 샤를마뉴가 죽자 한 세대가 지나기 전 프랑크 제국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따라서 9세기 이후 10세기까지 서방교회는 최악의 쇠퇴기였다. 왜냐하면 교회를 지탱해줄 어떤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들은 이제 로마 귀족들의 무력한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귀족들은 친척들이나 정치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교황으로 임명함으로써 교회를 지배하였다. 따라서 서방 교회는 밖으로 이방인 침입자들에 의해 유린, 약탈당하고 안으로는 귀족들의 사욕을 채우는 사냥감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서방기독교세계를 더욱 혼란에 빠트린 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반도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던 노르만족의 침입이다.

노르만(Norman)족은 게르만족 중에서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지방에 거주했던 종족으로 ‘노르만’이란 ‘북방인’이라는 뜻이며, 바이킹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인구가 불어나면서 그곳에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족속들이 차갑고 메마른 땅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시작하는데, 본래 항해술이 능하고 모험심이 강한 것을 바탕으로 약탈적 이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무자비한 침입, 싸움, 약탈 등으로 ‘해적 민족’으로 유럽 각지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금의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심지어 지중해 시칠리아 섬에까지 진출하여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노르만의 이동은 처음에는 약탈적이었으나 유럽 각 지역에 정착하게 되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원주민과 융합, 동화하여 중세 유럽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이처럼 바이킹이 서부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을 때, 샤를마뉴 이후 프랑크제국은 삼분되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발전하게 된다. 오늘의 프랑스로 발전한 서프랑크는 샤를마뉴의 카롤링(카롤링거) 왕조 이후 위그 왕조가 들어서 수백년간 치세했으나, 독일지역의 동프랑크는 바이킹과 헝가리의 마자르족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여 왕국이 무너지고 여러지역에서 독자적인 지도자를 추대해 연합부족국가 형태를 이루게 된다. 그 결과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등 다섯 곳에서 독립적인 지도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지속적인 마자르족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한명의 왕을 선출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새잡이왕 하인리히’라고 알려져 있는 하인리히1세가 등장하여 부족간의 화합을 꾀하고 마자르족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 왕국의 안정적 기틀을 마련하고 자신의 아들 오토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오토 1세는 오토 대제(Otto der Große)라고도 불리는데, 그의 초기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한때는 전투를 치르는 아버지를 따라다닌 것으로 보인다. 930년 잉글랜드왕 에드워드의 딸 이디스와 결혼했는데, 아버지 하인리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어, 하인리히가 죽기 1개월 전 936년, 24세의 나이로 아헨에서 독일 제후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부친 하인리히 1세가 자기 수하의 제후들을 다루는 데 애를 먹은 반면 오토는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주장했다. 그때문에 바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불만을 품은 작센의 귀족들이 오토의 이복형의 지도 아래 상대편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복형은 패배해 살해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들도 왕에게 항복했고 귀족들은 직위에서 쫓겨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3년후 이번에는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오토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동생 하인리히는 형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2년후 하인리히는 다시 국왕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 음모는 이내 발각되었고 다른 가담자들은 처벌받았지만 하인리히는 또다시 용서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형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와 같은 내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시간을 내어 왕국의 변경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동쪽으로는 슬라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북쪽에는 그리스도교 선교를 덴마크로 확대하기 위해 3곳에 주교관구가 창설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난 뒤 오토는 프랑스의 내분 중재자 역할을 하는 등 서유럽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 옛말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이 있다. 제 몸을 먼저 가다듬고 가정의 질서를 잡으며 나라를 잘 다스린 후에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태평천하로 이끄는 위대한 일도 먼저 자신을 가다듬고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을 가다듬고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토1세는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올라, 계속되는 혈족들의 반란과 이방족의 침입, 그리고 외부세력과의 전쟁 가운데서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용기백배하여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를 평정한 의욕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오토1세의 경우 혈족의 도전을 많이 받았는데, 이후에도 첫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몇몇 유력자들의 지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평정되었지만 그의 일생은 형제들과 자식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우리는 가정의 화평을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가정이 평화롭지 못하면 참으로 이웃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 여러분 가정이 불신 가족이 있는가?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시가 되어 자주 찌르고 상처를 내는가? 먼저 그같은 불신 가정 가운데서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고 이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그 영혼을 절대 미워하거나 저주하거나 무관심하지 말고, 진심으로 힘을 다해 기도하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평소 생활을 통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된 자신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아무리 고달프고 속상하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지워진 십자가라 생각하고 거부하지 말고 기꺼이 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넉넉히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기 바란다.

 

바깥 전투에서 아무리 승리했다 할지라도 가정 안에서의 영적 전투에서 실패하고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그 대상이 부모이든 남편, 아내이든, 지식이든, 자기주장만 내세워서는 늘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죽어지면 다툼과 불화가 일어나지 않겠지만, 맞서게 되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성도들은 가정에서 먼저 죽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가정에서 권위적이고 명령에 익숙한 가장들은 교회에 와서도 그 버릇을 그대로 드러낸다. 가정에서 불만에 가득찬 주부들 역시 교회에 오면 교인들을 대상으로 공격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된다.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제단을 쌓아야 하고, 가정에서 먼저 말씀 앞에 굴복하고 주님을 만나며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고 아름답게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 깨어진 가정들로 말미암아 상처입은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 동산교회에 와서 진정한 평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 951년 홀로 된 이탈리아의 왕후 아델라이데가 그에게 지원을 요청해오자 오토는 이탈리아로 진군해 롬바르디아 왕을 자칭하고, 당시 첫째 부인을 상처했던 오토는 아델라이데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곧 독일로 돌아와야 했는데, 앞서 밝힌대로, 첫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몇몇 유력자들의 지원을 얻어 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토는 형세가 불리해 작센으로 퇴각해야 했으나 장기간의 전투 끝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오토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동쪽의 슬라브족을 모두 복속시켰고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이 늘어갔다.

 

961년 오토는 주변 나라의 핍박을 받고 있던 교황 요한 12세가 도움을 청하자 2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그리하여 로마에 당도한 오토는, 50세가 되던 이듬해 요한 12세에 의해 성베드로 성당에서 아내 아델라이데와 함께 황제와 황후의 관을 쓰게 되는데, 이것은 샤를마뉴 이후 다시 서유럽에 제국이 탄생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샤를마뉴의 프랑크제국은 샤를마뉴가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기는 했으나 신앙심이 깊었던 샤를마뉴는 로마황제의 직위에 관심이 없었고 또 대관식 후에 로마를 방문한 적도 없었으며, 당시 동쪽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제국의 수도로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프랑크제국은 하나의 기독교제국이기는 했으나 로마제국이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는다.

 

반면 오토의 경우는 달랐다. 일반적으로 오토가 이룩한 제국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일컫는데, 오토는 로마제국의 재건과 황제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황제의 관을 쓰기 위해서 그는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단순히 ‘제국’으로만 불리던 오토의 동프랑크왕국은 그 아들 대에 이르러 ‘로마제국’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교회의 독립을 위한 교황들과의 다툼이 끊이지 않자 12세기 프리드리히 1세에 이르러 고대로마 전통의 보전자인 그리스도교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이란 이름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15세기에 이르러 제국이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잃자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정식명칭이 나타나게 된다.

 

어떻든, 오토가 죽은 후에도 ‘신성로마제국’은 어떤 형태로든 8세기 이상 살아남았다.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체코, 그리고 이에 인접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5세기까지 힘과 권력을 계속해서 휘둘렀고, 1806년 나폴레옹 시대까지 그 이름을 존속하며 유럽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 오토는 중세 교회의 보호자로서 큰 역할을 했고, 서유럽, 이탈리아, 비잔틴 등과의 교류를 통해 ‘오토의 문예부흥’이라고 불리는 중세유럽의 문학, 예술의 융성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오토의 주된 업적은 주로 제국을 강화한 데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교회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오토는 교회에 의식적으로 토지를 늘려주고 주교들에게 제후로서의 온갖 특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다.

 

오토의 머리 속에는 주교와 신부들은 독신이므로 왕권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족벌세력을 형성할 위험이 없고 상속 또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이들의 사후에 영토를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이렇게 교회를 왕권 유지의 한 축으로 생각한 오토는 주교와 수도원장 등 교회의 고위성직자를 직접 임명했다. 이로서 수도자나 사제는 왕의 관리가 되었고 교구나 수도원은 왕실 소유의 기관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오토는 로마황제의 관을 쓰자마자 로마의 통치자는 자신이라는 것과 교황도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하지 않고는 교황이 될 수 없다고 천명하고 교황도 직접 임명하고 파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오토의 교회정책은 성직자들을 황제의 통치 아래 둠으로써 교회와 제국을 하나로 묶는 신성정치체제였다.

 

그의 이같은 정책은 혼란스럽던 교황청의 개혁을 도와 교황권의 권위 확립에 공헌하기도 했으나, 성직자의 임명을 세속 권세자가 행함으로써 이후 불가피하게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샤를마뉴의 경우 신앙심이 투철한 이들을 주교로 선택하고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던 반면 오토와 그 후계자들은 이해관계에 맞는 이들을 성직에 세움으로서 성직과 성사까지 돈으로 사고파는 등 초대교회의 박해보다 더 한 폐해를 교회에 끼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을 이룬 오토대제가 중세 기독교에 드리운 그림자였다.

 

오토대제 이후 중세교회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종교에 대한 세속권세의 개입으로 인해, 투철한 헌신이나 신앙심과 관계없이, 훈련받지 않은 성직자들이 임명되었으며,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잃고 세속권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성직자들로 말미암아, 교회는 물론 시대 전체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중세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구원을 받았을까? 성경 한줄 제대로 읽지도 못한채 교회와 세속권력에 복종해야 했던 일반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러면 또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영적, 도덕적 상황은 어떠한가? 특히 우리나라의 상태는 어떠한가? 왜 우리가 지도자들을 위해, 교회뿐만 아니라 교계를 위해,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해야하는가? 교회와 함께 멸망하지 않도록, 교회와 함께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