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년 2월 27일 - 337년 5월 22일)는 중기 로마 황제로, 30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병사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어 죽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여기고 있다.
● 앞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를 소개하면서 잠시 언급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어린 시절은 순탄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아버지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는 유능한 로마군 장교였고, 그는 정치적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의붓딸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하고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유배 보내었다.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랐다. 그런데 이때의 경험은 후일 콘스탄티누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황제가 된 다음 로마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정한 것도 이같은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AD312년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친 뒤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 AD324년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이같은 자신의 성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덕분이라고 평생 동안 믿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군인들이 로마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Milvian Bridge)로 알려진 전투에 직면해야만 했다. 당대의 관습에 따라 하루스피시스(희생동물의 내장을 보고 그러한 방법으로 점을 치도록 고용된 사람들)의 조언을 구했다. 성경은 바벨론 왕들이 어떻게 이와 동일한 관습을 따랐는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신들이 그에게 원조를 하지 않아 그 전투에서 패배의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환상을 보게 되는데, 한낮에 하늘높이 십자가의 표시와 '이것으로 이기리라'는 문자를 군사들과 함께 보았고, 그날 밤 꿈속에서도 보았다. 그래서 그리스문자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최초의 두 문자 ‘키,로’(x,p)를 꿰맞춘 표시를 깃발에 붙이고 막센티우스군을 티베르강의 밀비안다리 부근에서 격파하고 대승하였다.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과 국민의 환영을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다음해인 313년 2월 밀라노칙령을 발표하여 신앙자유의 원칙에 의해 그리스도신앙을 공인함으로써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을 그리스도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가 로마에 세운 개선문은 이 승리를 그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라 '신이 준 영감' 덕분으로도 돌리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동상도 개선문과 동시에 세워졌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이 동상에는 "이 구원의 상징 덕분에 저는 당신의 도시를 폭군에게서 구했고, 원로원과 로마 국민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후 AD324년 동방지역을 지배한 리키니우스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다시 그 승리의 깃발을 걸고 리키니우스를 격파하여 제국을 통일하고 그리스도교를 옹호했다.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도구로서 브리튼 섬 북쪽 끝에 있는 해안에서 왔다고 말했으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신의 신성한 힘의 도움을 얻어 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개인적으로 어떤 '신학'을 가졌는가는 313년부터 320년대 초까지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에 관해 쓴 일련의 편지에 특히 뚜렷이 드러나 있다.
도나투스파는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일탈했던 신부와 주교를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걱정한 점은 교회가 분열하면 그리스도교 신이 화를 낼 것이고, 따라서 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누스 자신에게 신의 보복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악마라고 그는 생각했다. 평생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잘못을 제거하고 진정한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황제의 지위를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교'임을 자처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제국 관리들과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가 밝힌 견해들을 보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헌신이 일부 사람들이 언급한 것보다 훨씬 확고하고 분명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신학 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AD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재건하고 확장시켜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거둔 마지막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도시는 그후에도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다. 그의 개종은 그후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종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일찍이 소수 종파였던 기독교는 이후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그 후계자들의 후원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교회는 재산을 늘렸고 교회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교회는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 하지만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신앙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그가 개종한 후 몇 차례 살인 행위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개종한 후 자기 부인과 자기 아들을 죽였다.
콘스탄틴의 첫번째 결혼은 미네르비나(Minervina)와 이루어졌는데 그와 부인 사이에 크리스푸스(Crispus)라는 아들을 얻었다. 두 번째 부인은 파우스타(Fausta)인데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크리스푸스는 뛰어난 군인이 되었고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그렇지만 326년 -니케 아 공의회가 열린 바로 직후- 그는 그의 아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크리스푸스가 둘째 어머니인 파우스타를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같은 사실은 파우스타의 고백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는데, 실은 파우스타가 첫번째 부인의 아들 크리스푸스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몰아내고 그녀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왕위에 앉히려는 의도에서 모함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가난 콘스탄틴은 어머니 헬레나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둘째 부인 파우스타를 들끓는 목욕탕 안에 넣고 질식시켜 죽였다. 동시에, 그는 그의 누이의 아들을 태형(苔刑)으로 죽였고 누이의 남편도 목졸라 죽였다. 이러한 잔인한 이야기는 콘스탄틴황제가 과연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는가를 의심하게 한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수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십자가형을 폐지하고 로마에서 잔 인하게 가해졌던 박해도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를 베푸는 일을 순수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결단하였는가? 아니면 정치적 동기가 있었는가?
역사가 두란트(Durant)는 콘스탄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그의 개종은 진실된 것이었는가? 종교적인 신념의 행위였는가? 정치적인 지혜의 극치였는가?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거의 그리스도인의 예배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비록 그가 의지적으로 제국의 단합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불일치 의사를 표명하는 자를 억압하였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독교계를 동요시켰던 신학적인 관심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볼 때 이는 분명해진다. 그의 치세기간 중, 그는 주교들을 정치적인 조력자로 취급하였다. 그는 주교들을 소환해 공의회를 주재하였고 대다수가 일치하는 의견에 동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참된 신자라면 그리스도인이 먼저 되어야 하고 그 후에 정치가가 되어야 하는데 콘스탄틴에게 있어서는 그 반대가 되었다. 기독교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는 혼합물이었다. 비록 그가 이교 신전들로부터 자기의 상을 제거하고 자기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못하도록 선포했다고 할지라도 백성들은 계속 황제의 신성을 말했다. 최고 지도자로서, 그는 이교예배를 돌보고 계속 그 권리를 보호하였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는 의식에서 반반씩 이교도와 기독교 의식을 사용했다. 태양신 마차가 시장에 진열되었으며 그 마차 위에 십자가를 놓았다. 콘스탄틴에 의해 만들어진 동전들은 십자가가 특징적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그러나 또한 마(Mars)나 아폴로(Appollo)를 나타내는 것들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는 계속하여 농작물을 보호하고 질병을 고치는 이교도의 마술적 방식을 믿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성지 순례를 떠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326년 황실에서 일어난 비극을 속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헬레나는 여행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종교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교회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의 장모인 유트로피아도 맘레에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누워 있었던 성스러운 무덤이 발견되자 콘스탄티누스 열광하면서 그 자리에 웅대한 교회를 새로 짓도록 선동했으며, 노동력과 물자를 무제한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설계와 장식에 대한 제안도 아끼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 건축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특히 관심을 쏟은 것은 하기아소피아와 사도교회였다. 로마에서는 320년대 후반에 성베드로성당이 착공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이 성당 건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했고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한편 트리어와 아퀼레이아, 누미디아의 키르타, 니코메디아, 안티오크, 가자,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교회들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관심 덕분에 발전했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리키니우스를 무찌르기 전에도 그는 신학자이자 논쟁가인 락탄티우스를 트리어로 불러들여, 맏아들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말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그리스도교도를 위해 성경을 새로 발간해 보급하도록 했다. 그는 군대를 위해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었고, 원정중에는 막사 안에 이동 예배당을 설치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의식 및 그리스도교도가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된 수많은 법률을 공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세례식을 연기했다. 그가 헬레노폴리스에서 병에 걸린 것은 아마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으로 추측된다. 치료에 실패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 했지만, 니코메디아 근처에서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황제의 자줏빛 옷 대신 세례받는 사람이 입는 하얀 옷을 걸쳤다. 그는 337년 5월 22일 죽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에 묻혔는데, 무덤 주위에는 사방에 각각 6개씩 기념물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과대망상증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확신, 즉 자신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해 인생과 공직을 바쳤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후계자들에게 할 일을 많이 남겨놓았지만,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개인적 선택이었다.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를 신의 섭리가 실현된 것으로 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역할을 13번째 사도의 역할로 평가한 것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의 역할은 무엇인가? 비록 실수도 많고 어리석은 행동도 많이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자.
'好學의 神學 > [世界信仰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레고리 (Gregory) (0) | 2011.09.15 |
---|---|
오토 대제(Otto der Große) (0) | 2011.09.15 |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Saint Helena) (0) | 2011.09.06 |
샤를마뉴와 알퀸 (0) | 2011.09.06 |
성 패트릭 (0) | 2011.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