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好學 2011. 9. 15. 21:43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 이래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라고 칭송하는 영국출신 목회자이다.

그의 부모는 영국 글로스터 지방에서 ‘벨’이라는 여관을 운영하였다. 화이트필드가 2살 때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재혼할 때까지 그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소년화이트필드는 쾌활한 성격을 나타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었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나서 마을 어른들 앞에서 연설하는데 자주 뽑히곤 했다. 그는 특히 희곡읽기와 자신이 모든 역을 맡아 연기하는 것(1인극, 변사?)을 좋아하였다. 15세 때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어머니를 도와 여관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학교로 되돌아갔고 매우 부지런히 공부했다.

 

화이트필드는 18세에 옥스퍼드 펨브로크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입학하자 곧바로 찰스와 요한 웨슬리형제가 이끄는 홀리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절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는 홀리클럽 회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뜨겁게 신앙의 문제와 구원문제 등을 탐구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1735년 21세 때, 중병을 앓는 가운데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 그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내어밭기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1736년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필드는 성공회 목사가 되는데, 그는 소년시절에 다니던 교회에서 최초의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이 젊은 목사가 어찌나 열심히 설교하였던지, 그 당시 성공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설교를 들은 교인 수십 명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화이트필드는 즉시 브리스톨과 런던에 있는 여러 교회의 청빙을 받았고, 군중들은 젊은 목사의 뜨거운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신앙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왔던지 그가 먹거나 잠잘 시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숙소에 쇄도하였고, 그가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 만일 이 세상에서의 출세만이 그의 목표였더라면, 화이트필드는 전생애에 걸쳐 계속해서 그러한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갈채와 환호를 기꺼이 버리고 웨슬리 형제의 전도여행을 돕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웨슬리형제는 미국에서의 선교여행에서 실패하고 피폐한 심령으로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화이트필드의 미국선교여행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처럼 미국에서도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의 환대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화이트필드는 그곳에 고아원이 필요한 것을 보고는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와 고아원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화이트필드는 실내 예배당이 아니라 옥외설교를 자주하였다. 처음에는 탄광 광부들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의 설교를 듣고 수일내로 수천명의 회중이 모이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군중들은 크게 은혜를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곧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는 철저한 통회자복으로 나타났다.

 

이후 화이트필드는 기회만 허락되면 어디서든지 설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교회가 허용되면 교회에서 설교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것이든 설교단으로 쓸 만한 것, 예를 들면, 돌담, 승마대, 풀더미 등 어떤 곳에든 올라서서 설교하였다. 그는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열정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그래서 다른 목사들에게도 이같은 옥외 사역을 권유했고, 그들 중 특출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의 친구인 찰스와 요한 웨슬리였다.

 

● 이렇게 웨슬리 형제와 더불어 화이트필드는 영국전역에 복음을 전하면서 잠든 영국의 심령을 깨우는데 앞장선다. 그러나 곧 화이트필드와 요한 웨슬리 사이에 교리상의 견해 차이가 있음이 분명해졌다. 화이트필드나 웨슬리나 다 성공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영국국교회인 성공회는 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화이트필드는 그가 성직을 받을 때 서약한대로 칼빈의 신학을 고수했으나, 웨슬리는 그가 받아들인 알미니안주의 입장을 수호하였다.

 

알미니안주의란 17세기 초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사상의 한 분파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인본주의적 요소가 강한데, 이것은 감리교 신학의 핵심이다. 그에 비해 칼빈주의란 개혁교회의 중심신학으로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신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여튼 웨슬리는 화이트필드가 회집시킨 군중 앞에서 ‘예정론’을 비롯 칼빈의 신학을 반대하는 격렬한 설교를 했다. 하지만 웨슬리의 이같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필드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를 따르던 수천 명의 추종자들을 웨슬리에게 보내어,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웨슬리의 사역을 돕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웨슬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칼빈주의 교리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고, 이것은 애석하게도 개혁신학의 큰 줄기에서 감리교파가 분리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 1740년 26세의 나이로 미국을 두 번째 방문한 화이트필드는 미국남부 조지아에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설교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수천 명의 회중이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이때 그의 설교를 들은 유명한 인물 중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미국독립선언이 기초를 놓은 대표적인 인물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자연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미국 달러 지폐 중 제일 큰 단위는 100달러인데, 100달러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 바로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화이트필드에게 크게 감화받았고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화이트필드와 생각이 달랐지만 결국에는 화이트필드를 도와 고아원을 건립하는데 앞장서는 등 여러 일을 하게 된다.

 

화이트필드가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목회자는 청교도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나단 에드워드였다. 그리하여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로 시작된 미국의 영적 각성을 뒤이어 등장한 화이트필드의 사역으로 인해 미국전역으로 더욱 확산되어 나갔으며, 이로 말미암아 미국에서 하나님의 일을 크게 부흥시켰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이른바 미국의 대각성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대각성운도의 결과로 1백여 년 뒤, 우리나라에까지 미국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찾아오게 된 것이다.

 

● 1741년 영국으로 돌아온 화이트필드는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가 없는 동안 웨슬리는 사람들을 그의 적대자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고 런던의 길거리에서 다시 설교를 시작했고, 회중들은 다시금 화이트필드에게로 나아왔다. 이처럼 교리적인 논쟁에서 웨슬리와 많은 부분 일치되지 못했지만, 그는 항상 웨슬리 형제를 막역한 친구로 생각했는데, 후일 웨슬리형제는 화이트필드가 자신들에게 베푼 친절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화이트필드의 친구들은 그를 위해서 큰 목조창고를 예배처소로 지어주었고, 그곳은 언제나 몰려든 회중으로 가득가득 넘쳐났다.

 

화이트필드는 그해에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칼빈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스코틀랜드에서 화이트필드는 크게 영접받았고, 화이트필드의 열정에 힘입은 스코틀랜드의 목회자들은 새로운 힘과 열정으로 설교하게 시작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곧바로 영국 중부 웨일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11년 연상의 과부와 결혼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으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화이트필드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화이트필드는 웨슬리 형제의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부터 화이트필드를 웨슬리와 함꼐 감리교의 창립자겸 지도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화이트필드는 웨슬리와는 신학이 달랐다. 화이트필드는 웨일즈에서 그곳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칼빈주의 감리교회를 결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웨슬리가 런던에서 제1회 감리교 회의를 개최하기 18개월 전의 일로서, 나중에 웨슬리는 화이트필드의 조직과 여러 가지 운영방식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 감리교파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무렵, 화이트필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미국에서 진행하고 있던 그의 사역에 열광주의가 침투하여, 이로 인해 그의 사역이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든 항해 끝에 미국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거의 중환자 상태였다. 그가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죽어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회복되었으며, 3년 후 모든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영국에 돌아온 화이트필드는 자신이 이끄는 칼빈주의적 감리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가 지도자 자리에 앉아있는 한, 웨슬리의 지속적인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 뻔했고, 미국에서의 사역 때문에 영국에만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에게 지도자의 자리에 계속 남아 줄 것을 요쳥했으나, 그는 “화이트필드의 이름은 소멸시키고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화이트필드는 남은 생애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살아간다. 그는 교파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복음주의 운동을 도왔다. 감리교뿐만 아니라 영국성공회 내의 복음주의 운동도 그의 영향력 하에서 크게 부흥하고 확산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장로교도들과 회중교회주의자들, 그리고 침례교도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 매우 빈번하게 웨슬리를 도와 설교하였다.

 

제임스 스티븐 경은 화이트필드의 생애와 성격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만일 전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박애정신이 인간의 마음속에 불타올랐다면 그것은 조지 화이트필드의 마음 속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편애함이 없이 무지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주었다. 그들을 위한 운동을 하면서 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욕이나 반대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오해와 잘못들에 대하여도, 모든 것을 견뎌내는 온유함과 거부할 수 없는 사라의 무기로 맞섰다. 그의 자비의 샘은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참으로 화이트필드는 진리의 사람이자 사랑과 화평의 사람이었다. 그는 전 영국을 변화시킨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의 선구자였고, 미국 대각성운동의 주도자였으나 일평생 겸손함을 잃지 않았으며, 남녀노소, 빈부귀천, 교리와 교파를 뛰어넘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위대한 사역자였다. 사실상 미국의 모든 교파들, 감리교나 장로교나 침례교 등, 모든 미국의 개신교 교파들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그는 프린스턴대학, 펜실바니아대학 등 미국 50개 대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만일 조지 화이트필드가 없었다면 미국의 현재 모습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 화이트필드는 매우 부지런한 삶을 살았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으며 이러 5시에는 설교하였다. 우리로 치면 새벽기도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당시 영국 런던에서 새벽기도회로 수백명이 모여들 수 있었다는 것은 상상치 못할 일이었다. 그는 하루에도 여행, 편지쓰기, 영적 구도자들과의 면담 외에 두 번씩 반복해서 설교하기를 자주하였다. 그는 일평생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길이로 보면 사도바울의 여정 몇 곱절의 거리를 다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번 항해하면 몇 달씩 걸리는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왕복했으며, 영국 국내에서는 물로 유럽까지도 수없이 다녔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어디든지 그가 머물게 되는 집안의 누구에게라도 설교함으로써 하루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22세부터 이런 방식의 삶을 시작한 그는 45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필드는 55세 사망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사역했는데, 일평생 화이트필드는 3만 회 이상 설교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화이트필드에 관련된 사진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검색포탈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미국, 영국 사이트에서 그의 초상화와 사진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의 절반이 설교하는 그림이었다. 그만큼 화이트필드는 설교자로서 큰 사명을 다한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면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일평생 몇 번이나 설교할 것 같은가? 계산을 해보니 저의 경우 주일설교, 새벽기도회설교, 수요기도회설교, 심방설교, 각종 애경사, 행사설교 등 일년에 대략 1천 번쯤 설교를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 30년 목회하면 우리도 대략 3만번 정도 설교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전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부흥을 일으킨 이유를 여기서 조금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국교회는 참으로 말씀이 풍성한 교회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말씀의 내용과 질이 문제인데, 목회자들이 다시 힘을 내어 개혁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고 전한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을 확신한다.

 

화이트필드의 유해는 설교자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산 그의 생애에 걸맞게, 메사추세스주 뉴베리포트에 있는 최초의 장로교회 설교단 밑에 묻혀 있다. 화이트필드가 모든 인류에게 전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여러분들은 거듭나야만 합니다’였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죽어가던 시대를 살리는 생명의 메시지가 되었다. 화이트필드의 이 메시지가 오늘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도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러분은 거듭나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