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Saint Helena)

好學 2011. 9. 6. 20:51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

 

 

● 헬레나라는 이름은 서양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름인데, ‘태양’이라는 뜻이다. 헬레나[Saint Helena, 250~330.8.18]는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이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로마의 황후이다. 헬레나가 언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녀의 노력으로 밀라노 칙령을 반포케 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기독교신자들을 석방하게 하였으며, 그후에도 많은 예배당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등 기독교 선교의 일대 전기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지셨던 십자가를 발견하는 등, 황폐해진 성지를 복원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녀를 상징하는 문장은 십자가이며, 헬레나는 늘 십자가와 함께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헬레나를 성인으로 숭앙하고 있다.

 

헬레나는 브리텐, 즉 지금의 영국 콜 왕의 딸로서 명성이 있는 공주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비치니아 주에 있는 드레파눔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유한 명문 집안이 아니라 여관을 운영하는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헬레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도와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고 한다. 헬레나가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AD250년 전후로 추측하는데, 그것은 헬레나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황제가 AD274년 2월 17일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래 타고난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므로 마침 그곳에 배속 근무 중이던 로마군의 장교 콘스탄티우스의 눈에 들게 되어,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옮겨 다니는데, 지금의 세르비아에 해당하는 나이수스라는 곳에서 첫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출산한다.

 

 

그러는 동안 남편인 콘스탄티우스는 차차 승진해 로마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중신이 되고 부하들의 신망도 컸으므로, 곧 로마 제국 서부지역의 총독으로서 갈리아 지방, 즉 프랑스와 남부 독일,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 넓은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즉 먼저 그의 부인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것과, 다음은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볼모로 동로마 지역인 소아시아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그런 무리한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야심은 마침내 부인과 아들을 희생시키기로 결심했다. 헬레나는 억울하고 안타까웠지만, 비참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 추방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인질로 소아시아를 향해 떠나게 되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동로마제국 황제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동로마 황제 밑으로 들어가 군복무를 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여러 도시들과 문화 속에서 큰 영향을 받게 되며, 기독교와 접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당시 로마제국은 쇠퇴기였다. 로마의 평화시기는 막을 내리고 변방에서 밀려오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늘 불안한 가운데 살아야 했던 암울한 시대였다.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등극하여 로마제국은 사두 정치를 실시하는데, 사두정치란 넓은 로마제국을 황제 한 사람이 다스리기에는 어려우므로, 서로마와 동로마에 각각 황제와 부제를 두어, 곧 4명의 전제군주가 공동으로 위기에 처한 로마제국을 다스리는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AD293년 콘스탄티우스가 바로 이 사두정치의 부황제(케사르)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라는 칭호를 얻었고, 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 밑에서 부황제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그리고 AD305년 로마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서로마와 동로마의 두 황제가 퇴위하자, 서로마의 부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는 공동황제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당시 로마제국의 정국은 불안하여 정변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후 콘스탄티우스의 정적들은 병에 걸린 콘스탄티우스를 무시하고 새 황제를 세웠으며, 중병에 걸린 콘스탄티우스는 동로마에 있던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이것을 안 동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를 독살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독살 위험 가운데서 겨우 목숨을 건져 아버지에게로 왔고, 부자는 함께 브리튼 섬(지금의 영국)으로 건너가 AD306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을 때까지 변방 브리튼 섬 북부에서 숨죽여 지낸다.

 

 

그러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혼란 가운데서 군부의 지지를 받아 서로마황제로 추대된다. 그는 즉시 어머니 헬레나를 자신의 별장에 모시고 가서 잃어버린 그녀의 황후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복구시켜 주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AD312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며 정적들과 반란군을 무찌르는데,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군대가 로마 인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밀비안 다리의 전투’로 알려진 유명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그 유명한 십자가 환상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보고서 그는 그 십자가를 내세우며 그 뒤를 따라 진군하였고, 그 결과 그는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정식 등극하게 되며, 기독교로 개종을 선언함으로써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 그 후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모친 헬레나에게 왕대비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보내고 아울러 조폐권(造幣權), 곧 로마제국의 화폐를 제조하는 권리를 주고 어머니 고향인 드레파눔을 개조, 미화하여 이를 헬레노폴리스 즉 헬레나의 도시(市)라 개칭하여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기념케 했다. 그러나 이전에 이미 갖은 고생을 통해 세상의 쓴맛을 다 맛본 헬레나인지라, 연기와 같이 허무한 세상의 영화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헬레나는 영원불멸의 행복과 구원을 말하는 기독교에 더욱 마음이 끌리어 마침내 60세에 이르렀을 때에 자진하여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당시 헬레나는 왕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또한 조폐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부유함과 권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귀한 것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헬레나는 자신의 엄청난 재물을 빈민에게 희사하였으며, 예배당 건축을 위한 것이라면 한 푼도 아끼지 않고 모든 원조를 제공했다. 헬레나는 자기의 존귀한 신분을 잊고서, 미천한 사람들과 함께 흔쾌히 모든 예배의식에 참여하였으며,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헬레나의 타고난 아름다운 성품과 이같은 모범적인 신앙행위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더구나 효성스러운 아들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AD313년 밀라노칙령을 발표하게 하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지난 3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수난과 박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아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동로마제국에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게 되었을 때, 헬레나는 예수께서 일생을 지내신 팔레스틴 지방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녀의 지상 소망인 성지 순례를 마침내 AD326년에 이루게 된다. 하지만 헬레나의 성지순례 여행은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사이의 불화로 인해 가정에 불행이 깃들고, 맏손자가 안타까운 죽임을 당하게 되며 또 둘째 며느리가 참상을 당하게 되는 와중에서 가정사의 비극을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해, 헬레나는 거의 나이가 80이 다 되어 예루살렘으로 순례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헬레나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심으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골고다 언덕을 순례하는 중에 주님이 지셨던 거룩한 십자가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골고다 언덕에는 십자가가 아니라 비너스여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헬레나는 인근 여러 곳을 발굴해 고생 끝에 마침내 그곳에 묻혀 있던 세 개의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다른 두개는 강도들의 십자가였는데, 예루살렘 주교의 말에 의하면, 오직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만이 치료의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강도들의 십자가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십자가를 발견할 당시 나무 십자가 뿐만 아니라 못과 같은 잔여물도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보내져서, 못들 가운데 하나는 황제의 헬멧을 조이는데, 그리고 또 하나는 말의 굴레를 채우는데 사용되어졌다고 한다.

 

그밖에도 헬레나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과 삼 일간 묻히셨던 거룩한 무덤 터,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 감람산 등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설하였고, 헬레나의 이러한 신앙적 노고는, 이후 이슬람교의 침략으로 성도 예루살렘이 황폐화 되었을 때도, 성지의 모습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십자가를 비롯 발굴을 통해 얻어진 각종 유물들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에 귀환한 헬레나는 얼마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으며, 그때 그녀의 나이는 만 80세였다.

 

 

● 헬레나의 초상은 이미 앞서 보았듯이 보통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에 망토를 두르고 위엄을 갖춘 왕대비의 복장으로 십자가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헬레나에 대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같이 그녀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는 뛰어났다”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느 때나 많은 일군들을 필요로 한다. 특히 헬레나와 같이, 모든 외형적인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헌신된 여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