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

好學 2011. 9. 15. 21:42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

 

 

 

● 이노센트 3세는 고대, 중세, 근대의 모든 교황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가 이룩한 과업의 분량이나 그가 교회 안팎으로 발휘한 역량, 그리고 그의 행정능력과 수완, 법률적 신학적 공헌, 뿐만 아니라 교회역사의 위기상황에서 그가 교회의 영적 선교에 대해 가졌던 감각 등에서 그의 위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교황 이노센트는 주교, 수도원장, 왕, 그밖의 여러 인물들에게 5천통 이상의 편지를 주의 깊게 써보낸 열정적 사역자였다. 심지어 모로코의 모슬렘 왕에게 편지를 보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복음 전파에 신실한 관심을 보였던 이 교황은 선교사역, 십자군운동, 이단을 되돌리려는 노력, 평신도 교육 등에도 힘을 쏟았다.

 

이노센트의 이같은 사역은 마침내 유럽의 거의 모든 왕들을 복종케 했으며, 그는 자신을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자신을 하나님보다는 못하지만 보통 인간보다는 높은 어떤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교황의 수위권을 최대로 높인 사람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장차 교회의 타락을 가져오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 이노센트 3세는 1160혹은 1161년에 지오바니 로타리오 드 콘티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초기에 로마 근처에서 교육을 받은 후 파리의 대학에 등록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젊은 로타리오는 이런 기회 덕분에 일찍이 성직에로의 소명을 받았다. 그의 삼촌 교황 클레멘트 3세(1187~1191)는 로타리오를 1190년에 집사와 아울러 추기경이 되도록 길러 주었다.

 

로타리오는 추기경으로서 훌륭하게 교회를 섬겼으며 행정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191년 그의 삼촌이 죽었을 때 라이벌 귀족 가문의 일원이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로타리오는 수년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198년 교황이 죽자 로타리오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교황의 관을 받고 이노센트 3세라는 이름을 취하게 되었는데, 아마 이는 교황 이노센트 2세의 생애와 업적을 존경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노센트는 불과 38세의 나이에 교황이 되었기 때문에, 교황으로서의 도덕적 권위와 지도력을 확립하기 위해 즉각 힘을 쏟았는데, 그는 힘써 일하였으며 세세한 일에까지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분명한 목표들을 가지고 기독교계의 수장으로서 직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 젊은 교황은 확고한 옆 모습, 작은 입,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얼굴 생김새가 그의 과단성, 환상적 이상, 힘있는 언변을 특징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교황 이노센트 당시 유럽사회는 많은 변화를 체험하였다. 부의 증대, 새 땅의 개척, 인구 증가, 도시인구 과밀화, 정치권력의 위치변화 등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가운데 모든 상황들이 불안을 자극했으며 심지어 사회혁명의 기운까지 감돌게 하였다. 교황 이노센트에게 있어서 이같은 상황은 질서와 정통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불안은 종종 이단의 모판 역할도 하였기 때문에 그는 여러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교황으로 취임하기 전에도 로마시 행정부의 병폐를 바로 잡는 일에 착수했었다. 이노센트는 교황의 권위를 충분히 발휘하였다. 그는 행정부로부터 쓸모없는 사람들과 분별없는 공직자들을 대부분 쓸어내었다. 앞서 밝혔듯이 이노센트 3세는 열정적인 사역으로 엄청난 일들을 수행했으며, 뛰어난 행정능력과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유럽의 거의 모든 왕들을 복종케 하는데, 그가 왕과 군주, 수도원장, 대학들과 정부 고관 등에게 보낸 편지의 목록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과 각국 지도자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 그의 광범위한 노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로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도시 밖으로 여행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먼저 이슬람세력에 의해 잃어버린 성지에 십자군을 조직, 파견하는 일이었는데,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으며, 1208년에는 이단척결을 위한 십자군이 시작되었고, 심지어 1212년에는 어린이십자군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이노센트 3세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 만연한 이단과 싸우는 일과, 세속적인 범죄로 문제를 야기하는 평신도 통치자들을 다루는 일, 그리고 자신을 모든 사람 앞에서 카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 당시는 교황청이 최고의 절정기에 이르렀던 시기로, 이노센트는 교황에게 전세계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세속세계를 다스리는 권한도 주었다고 주장하며, 교황은 선출된 황제를 심사하여 그 사람이 황제로서 합당하면 교황은 이 선출된 황제에게 축복해 주고 관을 씌워 주어 황제로서 임명을 해주었다. 이렇게 교황이 인정을 해주기 전에는 그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황제 후보자에 불과했다.

 

이노센트 교황은 1209년 오토라고 하는 사람에게 대관식을 해주었다. 오토는 황제가 되기전에 이탈리아 중심부에 교황의 영지를 확보해주고, 독일의 주교선거 즉 성직자 임명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오토가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이노센트는 프리드리히 2세라고 하는 사람을 새로 황제로 임명해 버렸다. 결국은 2명의 황제가 서게 되는데, 1214년 오토가 죽고난 뒤 프리드리히 2세가 정식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의 필립2세의 경우, 그가 왕비와 이혼을 하자, 교황은 프랑스에 있는 모든 성직자에게 성직을 중지하도록 성직정지령을 내렸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이 세례도 못받고, 결혼도 못하고, 고해도 못하고 죽으면 다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었다. 곳곳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결국은 왕은 교황의 명령에 굴복하고 왕비와 재결합하게 된다.

 

영국왕 존은 대헌장에 서명했던 유명한 왕이다. 그런데 존왕이 켄터베리 대주교를 선출하는일에 관여했다. 그러자 이노센트3세가 다른 사람을 대주교로 임명해 버렸다. 여기에 대해서 존왕이 반대를 했다. 그러자 교황은 존왕을 파문시켰버렸다. 그리고 영국을 상대로 제4차 십자군을 선포하게 된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결국 1213년 존왕은 교황에게 굴복하고 영국땅 전체를 교황에게 바치게 된다.

 

또한 이노센트는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회(탁발수도회)를 정식 교단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교회의 질서 뿐만 아니라 선교적 열망도 대단했다. 한마디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종교적, 정치적 감각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 1215년 로마에서 개최된 4차 라테란 회의는 이노센트 3세의 생애에 있어 최고의 시점이었다. 유럽 각지로부터 1,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황의 말을 듣고 교회와 모든 기독교 국가에 대한 교황의 지도권을 선언하였다. 이 회의에 70명의 총대주교와 대주교들, 4백명의 주교들, 8백명의 사제, 수도원장, 평신도들이 참석하였다. 이같은 규모는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주요한 사항 몇가지를 살펴보면,

 

1)화체설이라고 하는 교리가 채택되었다. 화체설 교리는 카톨릭의 대표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로, 성만찬에서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여 높이 드는 순간, 기적적으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3백년 후 종교개혁 당시 가장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

 

2)동방 기독교가 서방 기독교에 종속한다고 선언한다. 이노센트3세는 자신이 전세계의 교회를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모든 주교는 자기 관할의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세속 통치자들이 그들을 압제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보호하여야 함을 명시함으로서,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자 했다.

 

4)일반사제에게 도덕성을 고양시켰다.(독신을 지키며, 음주, 도박, 사냥, 장사, 여관에 자주 가는 것,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

 

5)성직 세습을 금지시켰다.

 

6)평신도는 1년에 한번은 사제에게 고해를 하도록 해서 평신도가 이단에 빠졌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7)이단으로 확정된 사람은 세속군주에게 위임해서 처벌하게 하고 재산은 몰수했다. 그러나 교회가 이단으로 확정지은 사람을 군주가 처벌하지 않으면 교황은 군주를 파문했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황은 신민들이 불복종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했다.

 

라테란 회의는 한마디로 교황은 세상의 황제보다 우월한 존재로 교황은 전세계 교회의 최고지도자일뿐만 아니라 세속세계의 지배자임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흔히 라테란 회의는 독재적 교황의 뜻에 맹종한 모임으로 묘사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카톨릭교회의 권세가 최고조에 이른 절정기였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여튼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교황 재직 18년 동안 깊은 헌신과 활력, 열정, 신실함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다가 1216년에 죽었다. 그의 뛰어난 정치적, 종교적 역량 발휘가 없었더라면 중세의 교회는 보다 빨리 와해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교회를 향한 열정은 오히려 교회를 더욱 세속화시키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 무엇에든지 열심 있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 아브라함 링컨은 ‘열심이 없으면 회개함도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열심’ 자체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열심’이 곧 ‘진리’이거나 ‘구원’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면을 생각해야 한다.

먼저, 기본적으로 우리는 열심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게으르고 나태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미적지근해서는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많다. 그래서 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하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열심 있는 사람인가? 먼저 자신에게 그것을 질문해 보기 바란다.

 

다음은, 열심은 있으되 어떤 열심이냐 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바람직한 일에만 열심인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전해 듣고 교회에 출석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한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같은 열심은 오히려 교회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의 열심이 교회에 덕을 세우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데 유익한 것인지를 항상 돌아보아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특심하였으나, 그 열심으로 인해 교회를 핍박하는 괴수가 되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열심은 교회를 세우고, 생명의 복음을 이방 땅끝까지 전하는데 귀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우리의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먼저 미지근한 믿음, 게으르고 나태한 믿음에서 벗어나서 열심을 냅시다. 그리고 복음으로 거듭난 새피조물로서, 자신의 열심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교우들을 유익하게 하는데 귀하게 쓰이도록, 늘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참으로 지혜롭고 충성된 주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