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청소년교육]

새생명기도회8-인격은 내 친구가 나를 존경하는 것이다 (창 39:1-23)

好學 2011. 9. 10. 08:44

새생명기도회8-인격은 내 친구가 나를 존경하는 것이다 (창 39:1-23)

 

 

 

창세기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臣下 侍衛隊長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亨通한 者가 되어 그 主人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세기 39:3 그 主人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凡事에 亨通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4 요셉이 그 主人에게 恩惠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家庭 總務를 삼고 自己 所有를 다 그 손에 委任하니  
창세기 39:5 그가 요셉에게 自己 집과 그 모든 所有物을 主管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爲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福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福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所有에 미친지라  
창세기 39:6 主人이 그 所有를 다 요셉의 손에 委任하고 自己 食料 外에는 干涉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容貌가 俊秀하고 雅淡하였더라  
창세기 39:7 그 後에 그 主人의 妻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同寢하기를 請하니  
창세기 39:8 요셉이 拒絶하며 自己 主人의 妻에게 이르되 `나의 主人이 家中 諸般 所有를 干涉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委任하였으니  
창세기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主人이 아무 것도 내게 禁하지 아니하였어도 禁한 것은 當身뿐이니 當身은 自己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惡을 行하여 하나님께 得罪하리이까 ?'  
창세기 39:10 女人이 날마다 요셉에게 請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同寢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세기 39: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始務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창세기 39:12 그 女人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同寢하자' 요셉이 自己 옷을 그 손에 버리고 逃亡하여 나가매  
창세기 39:13 그가 요셉이 그 옷을 自己 손에 버려두고 逃亡하여 나감을 보고  
창세기 39:14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主人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戱弄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劫姦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창세기 39:15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逃亡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창세기 39:16 그 옷을 곁에 두고 自己 主人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창세기 39:17 이 말로 그에게 告하여 가로되 `當身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戱弄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창세기 39:18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逃亡하여 나갔나이다'  
창세기 39:19 主人이 그 아내가 自己에게 告하기를 `當身의 종이 내게 이같이 行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甚히 怒한지라  
창세기 39:20 이에 요셉의 主人이 그를 잡아 獄에 넣으니 그 獄은 王의 罪囚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獄에 갇혔으나  
창세기 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仁慈를 더하사 典獄에게 恩惠를 받게 하시매 
창세기 39:22 典獄이 獄中 罪囚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諸般 事務를 요셉이 處理하고 
창세기 39:23 典獄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凡事에 亨通케 하셨더라.

 

 

「인격은 내 친구가 나를 존경하는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오늘은 새생명기도회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NOBLE FAITH의 I에 해당하는 Integrity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ntegrity는 번역하기 쉬운 단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성실 또는 언행일치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Integrity한 삶을 사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Integrity를 '존경받는 인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Integrity한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존경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요셉의 삶을 통해서 존경받는 삶의 세 가지 키워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최선을 다하는 삶

  Integrity한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키워드는 최선입니다.
  요셉의 일생은 ‘어디에서 사느냐’라는 장소의 문제보다 ‘어떻게 사는가’라는 태도의 문제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인생이었습니다. 요셉이 살던 곳은 애굽이었습니다. 우상이 창궐한 그 애굽에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는 신앙을 보여준 존재가 요셉이었습니다. 퇴폐성이 가장 심한 애굽이라는 곳에서 최고의 도덕성을 유지하였던 존재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우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좋은 장소로 이동하는 것, 우리나라도 이 맹모삼천지교 맹종자로 가득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교육열이 대단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이민까지도 서슴지 않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민족입니다. 강남 8학군에 대한 맹신이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강남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가기만 하면 대학 진학이 보장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멸치가 태평양에서 자란다고 고래 되는 것 보셨습니까? 결코 그런 일 없습니다. 동해의 멸치를 태평양에 갖다 놓아도 멸치 그 이상으로 크지 못합니다. 동해에서 컸을 때보다 조금 더 클지는 모르겠지만 환경 부적응과 태평양 멸치떼의 왕따현상 때문에 비쩍 마르게 됩니다. 성장하지 못합니다. (성도들 웃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종자입니다. 큰 종자는 어디 있든지 크게 되어 있습니다. 고래의 종자로 태어났으면 고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멸치의 종자를 가지고 있으면 어디에 갖다 놓아도, 강남 8학군에 갖다 놓아도, 이민을 간다 할지라도 멸치밖에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종자가 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꿈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큰 꿈이 요셉으로 하여금 Integrity한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Integrity한 삶이란 태도의 일관성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어디에 있든지 최선이라는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어디에 있든지 최선이라는 삶의 태도를 견지했던 존재였습니다. 신앙의 최선을 보였고 윤리의 최선을 보였고 직업에 대한 최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최선은 자신의 환경을 뛰어넘게 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동해 같이 작은 바다, 자기를 열악하게 만드는 애굽이라고 하는 그 바다 가운데에서도 그가 고래와 같은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선이라도 하는 삶의 일관된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히브리어의 원 뜻은 눈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인정받았다는 것이지요. 보디발이 요셉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일하는 모습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을 다하는구나, 정말 최선을 다하는구나, 저 사람이라면 내가 일을 맡길 수 있겠구나’라고 해서 총리의 직무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2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 아니했다”라고 말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최선을 다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일을 맡기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선을 다한 삶의 결과입니다. 최선은 사람에게 인정받습니다. 최선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보통 교계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첫 번째 설교를 잘한 목사는 계속 설교를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뜨거운 기도로 준비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설교를 위해서 그는 굉장히 많은 독서를 했을 것입니다. 그 처음의 최선의 습관이 두 번째, 세 번째에도 연결되어서 계속 설교를 잘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에 최선을 다했더니만 첫 번째의 최선이 습관이 되어서 두 번째에도 적용되고 세 번째에도 적용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최선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습관이 되어지면 어떠한 일을 맡든지 간에 열매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스미스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게으름은 사단의 공작소이다’ 게으른 자가 시험에 쉽게 들고 게으른 자가 유혹에 자주 넘어지게 됩니다. 게으름은 우리를 악하게 만드는 출발이 되고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짓지 않으려면 열심히 살면 됩니다. 내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 집중적인 최선을 다하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부지런하여 열심을 다해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하고 열심을 다해 주를 섬기라,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열매가 존경입니다. 인류의 많은 위인들을 추적해 보십시오. 위인들의 특징은 최선입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존경을 갖다 준 것입니다.



2. 과정의 성공을 추구하는 삶

  Integrity한 삶의 두 번째 키워드는 과정입니다.
  결과의 성공보다는 과정의 성공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18살에 끌려왔습니다. 감옥에서 2년 살고 나왔을 때 30살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보디발의 집에서 생활한 시간은 10년이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인정한 것은 10년이라고 하는 시간의 열매였습니다. 처음에 딱 보자마자 ‘너 잘하게 생겼어!’하면서 총무로 맡긴 것이 아닙니다. 10년 동안 시간의 열매를 통해서 총무라고 하는 직분을 받긴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과정을 통과한 존재, 그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한탕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어떤 중학교 선생님이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부모님으로부터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건물하나 물려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건물 하나 물려받아서 임대료 받으면서 그냥 놀고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부자여서 무엇 하나 물려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한탕주의입니다. 과정을 무시하는 모습입니다. 로또복권에 대한 열풍이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도 한탕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중심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부정적인 열풍이 로또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재미로만 한다고 한다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탕주의거든요. 과정을 통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견뎌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7일이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40년이라는 광야생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성숙되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예가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한 다음 가장 먼저 직면한 난관이 홍해였습니다. 그 홍해가 갈라진 다음에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신앙의 연단을 받으면서, 시간의 연단을 받으면서 요단강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홍수 때라 엄청나게 창궐한 상태에 있습니다. 발만 담궈도 죽을 판인데 어떻게 요단강을 건넜습니까? 아직 갈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한 발을 내디뎠더니 물이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40년의 열매였습니다. 믿음이 미숙했을 때에는 보고 건넜습니다. 갈라진 것을 보고 건넜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시간의 과정을 통과하니까 이제 요단강이 갈라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건너는 성숙자로 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과정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기도하고 난 뒤에 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년365일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1시간 기도했습니다. 어쩌다 2시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원망합니다. 이것은 영적 한탕주의입니다. 세상에만 한탕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한탕주의가 있습니다. 1년에 딱 1번 기도한 것을 가지고 인생 전체가 평탄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모습들…… 이것이 우리 모습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앙도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나만 이렇게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도 거짓말하고 살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을 텐데, 나도 세금 떼어먹으면 회사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만 이렇게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이미 부패한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어떤 사회입니까? 과정에 대한 평가가 정확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을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는 사회, 나만 이렇게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건강한 사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이렇게 헌금해서 뭐하나, 나만 이렇게 봉사해서 뭐하나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만드는, 정당한 과정에 대한 평가를 해주는 교회, 그런 자들을 직분자로 세우는 교회, 그것이 바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비록 그 과정이 뒤쳐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불안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선한 과정을 통과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존경입니다. 존경은 과정을 성공한 자의 열매입니다. 선한 과정을 믿음으로 견디면 반드시 존경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3. Coram Deo

  세 번째 Integrity한 삶의 키워드는 친구입니다.
  오늘 9절을 보면 요셉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죄를 짓고 못살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고 하지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意識)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어디에도 계십니다. 시편139편에 보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스토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보십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간통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하게 간통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통한 것을 다윗의 신하가 알고 있었습니다. 밧세바를 부르러 갔던 신하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비밀이 없습니다. 모든 죄는 상호성을 갖고 있습니다. 혼자만 짓는 죄는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피해자를 낳게 되어있고 우리의 죄는 들통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직장인이 인사고과를 걱정해서 실적을 과장해서 보고했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인사고과를 높게 받아서 빨리 승진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누구도 손해 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 한 사람의 성공은 곧 다른 사람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라이벌직원이 나를 이상하게 봅니다. 은근히 이상하다는 소문을 냅니다. 저런 실적이 나올 수 없는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것이 점점 퍼져 나가면서 결국은 들통이 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사람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그 죄를 까발리셨어요. 그러므로 지혜자는 사람에게 드러나기 전에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채찍을 통해서, 사람의 도구를 통해서 내 죄가 들통이 나기 전에 무릎 꿇고 회개하는 것 그것이 지혜자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면…… 망신당합니다. 망신은 사람을 통해서 드러내는 하나님의 뜻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 무시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눈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눈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됩니다. 사람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핍박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착해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선해 보이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착해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악해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도 역시 악하게 보십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사람이 ‘저 사람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 거짓말쟁이야.’ 하면 하나님도 그렇게 보십니다. 악하게 보는 데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측근이 중요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Integrity한 삶을 산다는 것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평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D.L.Moody(AD 1837-1899)는 ‘인격이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의 당신의 모습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천운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친구가 바라본 당신의 모습, 이것이 인격입니다.’ 내 친구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리 엄마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내 아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내 회사 동료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것이 인격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시선이 내 인격의 실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D.L.Moody는 한마디 더 했습니다. 아내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진짜 크리스천이다. 강대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 크리스천으로 인정받는 것은 피를 토하는 순교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을 받을 때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입니다.
  여러분,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사람의 눈을 의식하십시오. 그렇게 살면 우리는 죄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를 정죄할 수 있다는 두려움,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의 모든 인격을 들통낼 수 있다고 하는 두려움, 그 마음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인격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Integrity한 삶의 키워드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최선을 다하십시오.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열심을 다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에게 존경을 줄 것입니다.
  둘째, 과정을 통과하십시오.
  선한 과정을 이루려고 몸부림치십시오. 그 과정이 여러분에게 열매를 줄 것입니다.
  셋째, 친구의 시선을 의식하십시오.
  친구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진짜 인격자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