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샤를마뉴와 알퀸

好學 2011. 9. 6. 20:50

 

샤를마뉴와 알퀸

 

 

 

● AD632년 마호메트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이슬람은 본격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마호메트의 뒤를 이은 지도자들을 칼리프라고 하는데, 칼리프 오마르의 경우 637년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다른 이슬람 일파는 이집트로 진격하여 641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다. 저들은 이곳에 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파괴했으며 고대의 귀중한 문헌들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초기 사본들을 없애 버렸다. 이집트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697년 카르타고를 장악하고 북아프리카 주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이들에게 정복당한 북아프리카는 기독교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711년에는 이슬람 병사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을 침공했고 얼마 안되어 일부 북부 지역만을 제외하고 스페인 전역이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 곧 이어 저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으로 진격했다. 프랑크왕국은 지금의 프랑스지역에 있던 옛왕국 이름이다. 그러나 732년 투르 전투에서 프랑크의 지도자 찰스 마르텔에 의해 패배 당했는데, 이처럼 프랑크가 이스람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유럽에서의 이슬람의 확장은 정지되었다.

샤를마뉴

 

한편 또 다른 이슬람 군대는 651년 페르시아 전역을 굴복시켰고, 652에 이르러서는 소아시아 지역, 곧 초대교회 바울과 사도들의 주된 활동지였던 지금의 터어키 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배를 타고 키프로스는 물론 시실리와 로마제국의 심장인 이탈리아에까지 진격하여 이탈리아 남부를 공략하였다. 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5년에 걸친 이슬람의 맹공을 용감하게 방어하여 로마제국 동쪽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이슬람교도들의 침략과 정복은 로마제국은 물론 기독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세력은 로마제국이 닦아놓은 길을 통해 진격해왔고, 로마제국의 영토는 고스란히 이슬람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으며, 로마제국의 영토를 따라 전파되었던 기독교는 뒤이은 이슬람의 침략으로, 그 과거의 소중한 흔적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 이슬람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었는데, 특히 동방교회의 손실이 컸다. 수천개의 교회들이 파괴되거나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강력한 북아프리카의 교회가 사라졌으며,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심히 위축되어 버렸다. 예루살렘, 안디옥, 다메섹은 잔인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굴욕을 당했고, 이슬람화 되어갔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다른 지역에서도 더 이상의 기독교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프랑크의 지도자 마르텔에 의해 이슬람의 서유럽 진격이 멈추기는 했으나 이슬람 세력의 도전에 대한 동서방교회의 염려는 극심했다. 이슬람 뿐만 아니라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인해 이미 로마제국은 이름뿐이었고 겨우 교회와 교황권에 의해 제국은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때에 옛 로마제국의 서방지역을 통합하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문예부흥을 일으킨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프랑크 카롤링왕조의 찰스 대제, 곧 샤를마뉴이다. 샤를마뉴는 찰스 대제의 불어식 발음이다.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크의 지도자 찰스 마르텔은 스페인을 점령하고 프랑스로 진격하는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써 서유럽의 이슬람화를 방지할 수 있었다. 당시 마르텔은 이미 실질적으로 왕의 권세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국왕의 칭호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피핀은 교황과 제휴하여, 무기력한 프랑크왕을 강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 카롤링왕조를 열게 된다. 그리고 피핀은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드왕국을 정복하고 그 영지의 일부를 교황에게 기증하기도 한다.

 

피핀이 죽자 두 아들 찰스와 카를로만에게 나라를 분할하여 물려주었는데, 형제 중 맏이인 찰스가 바로 샤를마뉴이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두 형제는 자주 분쟁을 벌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동생 카를로만이 일찍 죽음으로써 형제간의 투쟁은 중단되었고, 형 찰스는 다시 나라를 통합하여 임종 때까지 프랑크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만일 이 두 형제가 오랜 기간 서로 분쟁하며 힘을 소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부분의 나라나 왕조들이 그러하듯, 형제가 계속 싸웠다면 카롤링왕조는 일찍이 지리멸렬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며, 중세 초기 기독교는 또 다른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 어느 집안이든 형제가 싸워서는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뿐더러 그 집안이 올바로 세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어디 개인 가정만 그렇겠는가? 세상의 어떤 단체든 그 구성원이 화합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당장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북한이 통일되지 않는 한,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4대 열강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가운데서 우리나라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생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점에서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 나라, 이 겨레의 통일을 위해 진지하고도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도 북한에 수해가 났을 때, 무상으로 수해복구를 위해 남한에서 지원하자, 많은 분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남한에도 도와야 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북쪽에다 뭐하러 저렇게 퍼주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북한의 문제는 대승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서독은 동독과 통일되기 전, 우리돈으로 수백조원에 달하는 원조를 마구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서독의 교회들이 앞장서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섬김의 사역을 감당했는지 모른다. 교회가 할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정치적으로 어려울 땐 특히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시대의 사명을 깨닫고 일어서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으로 부어주시고 사용하시나 그렇지 않은 교회는 도태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우리 동산교회 교인들도 좁은 개인적 신앙 상태의 답보에서 벗어나,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숙한 교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전통에 의하면 찰스는 AD742년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찰스 마르텔의 손자였으며 피핀의 장자였다. 샤를마뉴는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키가 2m10cm를 넘었다고 하며, 밝은 얼굴과 길고 흰 머리털이 그의 큰 키와 더불어 그에게 위엄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몸과 명랑한 기질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고, 문화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능숙했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했다. 그의 경건에는 가식적인 것이 없었으며 자신이 기독교 원리에 입각해서 통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당시 대부분의 권력가들처럼 본부인 외에도 여러 명의 첩을 데리고 살았다.

 

샤를마뉴는 중세 초기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로 꾸준한 정복사업을 통하여 영토를 넓혀나갔는데, 그는 교황의 요청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롬바르드족을 정벌하고 독일에서는 완강히 반항하는 사나운 색슨족을 정복하여 정통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겼던 스페인 북부 지역을 도로 찾았다.

그후에도 정복 사업은 계속되어 아버지가 소유했던 영토를 두 배로 확장했다. 남쪽으로는 로마에 이르는 이탈리아 전역, 북쪽으로는 오늘날의 독일에 해당하는 지역의 대부분, 그리고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 전체를 장악했다. 그는 영토를 넓힐 때마다 포교단을 보내어 피정복민을 정통 기독교에 귀의시키는 일을 강력히 추진했다. 군사적 정복에 수반되는 이와같은 선교적인 노력은 특별히 로마교황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

 

샤를마뉴는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는 교회는 인간의 영혼이요 국가는 몸으로 비유할 수 있으며, 교회와 국가는 나름대로의 책임영역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한 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교회의 통치자는 국가의 통치자가 내린 결정에 대해 논해서는 안되며, 주교들은 국가의 수장에게 종속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아버지 피핀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점령한 땅을 교황령의 영토로 귀속시켰으며, 언제나 교황령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처럼 교회 일에 헌신적이었던 샤를마뉴는 매일 아침 미사에 참여했고, 저녁마다 저녁기도를 했으며, 교회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훌륭한 책들을 낭독하게 하여 듣는 것을 즐겼는데, 특히 그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을 좋아했다. 샤를마뉴 치하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한 부서로 인식될 정도였는데, 왕이 앞장서서 교회 개혁을 이끌어나갔다. 수도원 제도의 개혁이 있었고, 새로운 교회들이 건립되었으며, 새로운 건축물들이 출현했다. 교회의 예식이 개혁되었고, 그레고리안 찬가는 크게 부흥하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침수에 의한 침례는 물을 붓는 세례에 의해 대체되었다.

 

● 중세 초기 서유럽의 교회는 기독교를 심각하게 오염시켜왔던 이교도의 관습들과 싸우느라 수많은 노력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샤를마뉴는 참람한 우상숭배를 몰아내는 일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그런데 그는 성직자와 교인의 다수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한, 이교 사상을 근절하거나 기독교 이상국가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알퀸이다. 샤를마뉴의 통치기간은 카롤링 왕조의 문예부흥기였다. 샤를마뉴 자신은 비록 교육받은 인물은 못되었으나 학문을 장려했다. 그는 자신의 문예부흥을 완수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만난적이 있는 잉글랜드 요크 출신의 학자 알퀸을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알퀸은 능숙한 시인이요 작가였으며 성경주석가이자 신학자였다. 게다가 그는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교과서도 출간한 인물이다. 영적 무질서와 교회의 타락이 편만하던 시대, 이민족과 이슬람의 침입으로 불안과 혼돈이 절정을 이루던 시대, 알퀸은 기독교신앙으로 그 시대의 영혼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샤를마뉴를 도와 예배 의식을 개혁하고 신학적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스스로 왕실과 성직자를 교육시키는 동시에 지속적인 교육을 위해 공공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교구 학교를 설립하고 도서관을 건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런 점에서 근대의 교회 교육가들, 공공 교육가들, 신학 교육가들은 모두 샤를마뉴와 알퀸에게서 크게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공공 교육과정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문을 알아야 했다. 알퀸과 샤를마뉴는 나중에 십계명을 추가하였다. 이것이 무질서했던 당시 상황에서 민중들의 정의와 도덕 부흥의 출발점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 기독교 역사에서 알퀸과 샤를마뉴의 우정에 비길만한 우정관계는 찾기가 어렵다고들 말한다. 이 두 사람은 마치 다윗과 요나단처럼, 서로를 격려하며 의지하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시대를 살려내었다.

 

● 알퀸은 아마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요크민스터의 학창 시절 이전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거기에서는 자신의 스승들이 유년기로부터 ‘어머니의 애정을 가지고’ 그를 돌보아 주었다고 언급한다. 그가 쓴 윌리 브로드의 전기에서 그는 윌리 브로드의 부친 윌 길스와 자신이 어떤 혈연관계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그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면 이는 알퀸이 교양 있는 기독교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가 735년경 요크 근처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이나 세례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알퀸은 요크의 교장 앨버투스의 눈에 띤 조숙한 아이였다.

 

8세기에 요크 성당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관들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재로우와 켄터버리의 그것보다 우수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것들에 필적할만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알퀸은 암브로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베데, 뵈티우스, 카시오도루스, 키케로, 그레고리 대제, 락탄티우스, 루칸, 오로시우스, 플리니, 스타티우스, 버질 및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의 작품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영국 도서관들의 자료들 가운데 꽤 많은 것이 675년 이후 해외로부터 도입된 것이었다. 알퀸 시대에 사본 찾기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젊은이로서 그가 앨버투스를 로마까지 수행한 것은 그와 같은 사본 찾기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 여행을 통해 이 교장은 알퀸에 대해 점차 감탄과 신뢰를 두게 되었다.

 

앨버투스가 766년에 요크의 대주교가 되었을 때 그는 알퀸을 그 성당 학교의 자기 후계자로 삼았다. 15년 동안 알퀸은 아주 탁월하게 근무하였다. 그후 780년 교황은 대주교 에언볼드에게 영대를 하사하였으며 에언볼드는 알퀸을 로마로 보내 알퀸의 영대를 청구하도록 만들었다(이 물건은 어깨 위에 걸치는 멍에 같은 의복으로서 이것을 걸치는 자가 교황의 직무에 동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교적 최근의 시대에는 모든 대주교들이 이를 청구하여 직무의 조건으로서 받았지만 에언볼드의 시대에는 이것이 영예의 표식이었다. 따라서 알퀸의 용무는 커다란 특권이었다). 바로 이 여행 중에 알퀸은 파르마에서 찰스 대제(샤를마뉴)를 만난다.

 

● 790년 알퀸은 요크로 돌아왔다. 하지만 샤를마뉴에 대한 그의 책임은 계속되었다. 796년 알퀸은 샤를마뉴의 초청을 받아들여 성마르틴 대수도원 원장이 된다. 거기에서 그는 생애 말년을 보내게 되는데, 거기에서도 알퀸은 수도원 학교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어거스틴 연구에 중점을 둔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경연구에서 문법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경 읽고 쓰기 교육 지도자들과 수도승들을 훈련하는 프로그램도 시작하였다. 이때 알퀸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서유럽 각지로 흩어져 유럽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데 기여하게 된다. 알퀸은 성경을 비롯 많은 고서들을 필사하여 남기는데도 열성을 보였는데, 이 작업 과정에서 실내의 밝고 화려한 조명을 발명하는 부차적인 성과도 거두게 된다.

 

알퀸은 804년 예기치 못하게 죽었으나 그가 중세초기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샤를마뉴를 도와 카롤링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데 어떤 인물보다도 많은 일을 해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중세 서유럽의 문화적 어두움을 걷어내는데 앞장선 인물이 되었다.

 

● 샤를마뉴는 800년 교황의 영토를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성베드로 성당에서 성탄절의 첫 미사 후,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고, 레오3세 교황은 그의 머리에 제국의 왕관을 씌워주면서, 그를 로마인의 황제라고 선언하게 된다. 샤를마뉴는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계승권을 인정받은 로마황제로서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대리자로 불리운 샤를마뉴에 의해 로마제국이 일시 부활되었으며, 프랑크 제국과 로마 교회의 긴밀한 제휴로 말미암아, 이교도와 이슬람의 광풍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로마제국과 기독교세계는 한숨을 돌리게 된다.

 

샤를마뉴는 이제 옛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샤를마뉴의 제국 내로 찾아 들어와 카롤링 왕조의 문예부흥 운동을 도왔으며 제국은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이룩하고 다졌던 찬란한 프랑크 제국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또 다른 이민족 노르만인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 루이와 그의 손자들은 샤를마뉴와 같은 능력과 열정을 지니지 못했다. 814년 샤를마뉴가 죽자 한 세대가 지나기 전 프랑크 제국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샤를마뉴 이후, 9세기 말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안팎의 문제들이 서방 기독교계를 계속 약화시켰다. 카롤링 제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서방에는 더 이상 어떤 군사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부에서의 이슬람교도의 지속적인 공격과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새로운 공격자들의 물결과, 스칸디나비아의 노르웨이인들의 거의 압도적인 움직임은 더 심한 분열과 혼돈을 가져다 주었다. 세계의 종말은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1000년에 가까이 가면서 많은 사람들은 심각하게 그 종말을 예상하였다.

 

교황권에 있어서 이때는 절망의 시대였다. 교황에게는 이제 그들을 지탱해줄 어떤 힘도 없었다. 10세기에 유럽의 공공질서와 문화가 거의 다 붕괴되었다. 모든 곳에서 교회 재산은 이방인 침입자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샅샅이 약탈 당하거나 귀족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성직자들은 점점 직무에 대해 무관심해졌고 그들의 무지와 부도덕은 증가하였다. 중세 암흑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