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好學 2011. 9. 6. 20:45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7.31)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는 1491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지주 상류계급인 로욜라성 성주인 돈 벨트란의 열두번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신심이 두터웠으나 그들은 로욜라를 수도자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로욜라 역시 어려서부터 장차 용감한 기사로 출세하려고 했다. 그래서 14세의 어린 나이에 로욜라는 왕궁에 수습 기사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왕궁의 예법을 배우며 군사적 경력을 위한 훈련을 쌓았다.

 

로욜라의 어린 시절 세 가지 큰 사건이 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첫째는 ‘탈환운동’으로 스페인에서 마지막 남은 회교도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함으로써, 귀족 출신 스페인 소년들은 모두 언젠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사가 되어 성지를 탈환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재정복하는데 이바지하리라는 꿈을 간직하게 되었다. 신앙적 경건과 애국심이 보태어진 기사도 전통은 이같은 시대상황 아래서 탄생하게 된다.

 

둘째는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이다. 이리하여 세계는 정복과 개척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스페인은 신대륙의 풍요에 힘입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으며 대서양과 지중해의 많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로욜라의 맏형은 콜럼부스의 2차 항해에 따라가기도 했다. 이같은 개척과 정복의 시대에 신흥강대국 스페인에서 로욜라는 태어났고 자라게 된다.

 

셋째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다.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해 유럽은 카톨릭국가와 개신교국가로 나눠져서 오랜기간 갈등하게 되는데, 스페인은 철저히 카톨릭 진영이었고, 로욜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루터가 독일에서 구원에 대해 깊이 명상하는 동안 로욜라는 스페인 궁정의 젊은 멋쟁이로서 무절제한 삶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그는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는 가운데, 방탕자와 싸움꾼으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 그런데 군복무 중 30세였던 1521년, 로욜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해 팜플로나라는 요새를 수비하던 중 폭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가 뭉개지고 왼편 다리에 상처를 입어 치료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성을 점령한 프랑스군 의사가 그의 어긋난 다리뼈를 잇고자 하여, 그의 다리는 두 번이나 마취없이 파손되고 재접합되어야 했다. 결국 종신의 절름발이가 된 로욜라는 다시 군인으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요양기간 동안 로욜라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었는데,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은 주변에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 주었다. 이때 그는 수도자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과 중세의 한 ‘성인의 이야기’였다. 그는 책을 읽어가면서 성인들의 영웅적인 행위와 명성에 대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명상하기 시작했다. 성인들의 위업은 그의 기사도 정신과 조화를 이루었다. “내가 성 프란시스나 성 도미니크처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한다면 어떨까?”이런 가운데 그는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자연히 그는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신비한 종교적 체험에 사로잡혀 회심을 경험한 그는 성모 마리아를 마음속에 모시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리하여 신앙의 새로운 눈이 뜬 로욜라는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외출할 수 있게 되자, 유명한 베네딕토 수도원을 순례하고, 거기에서 밤새 기도를 드린 후, 이튿날 아침 그는 자신의 갑옷과 검을 성당에 바치며 화려한 기사의 복장은 걸인에게 자선하고 그 대신 고행의 복장을 하고, 만레사라는 마을로 가서 한 동굴 안에서 반년 이상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10개월동안 고독 가운데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성수련’이란 카톨릭에서 유명한 책을 기록하게 되는데, 이 책은 카톨릭에서 묵상을 가르치는데 후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전에는 현세의 영예만을 추구하던 그가 10개월간의 수양을 하는 동안 성령의 은혜를 받아 완전히 회개하는 동시에, 자기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동료들을 모아 영적 십자군을 일으켜 끝까지 진리를 위해 싸우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선행의 첫 단계로서, 주님께서 수난 당하신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려고 했다. 그러나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때마침 터키 투르크 황제가 그리스도 신자를 극도로 박해하고 있던 터라,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온 그는 이후 약 11년 간 학문에 정진하였다. 당시 로욜라는 이미 33세였는데, 자기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제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남의 조소를 받아 가며 그 나이에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다음 대학에까지 가서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로 학교를 옮겼다.

 

이때 그는 틈틈이 자신이 체험한 신비주의적 신앙을 전파하며 동료들을 규합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되고, 잠시 이단자로 취급되어 결박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미소를 띄며 “나는 예수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30대 중반에 학교로 돌아가서 43살에 졸업했다. 그래서 그는 카톨릭에서 군인의 수호 성인인 동시에 만학도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제자 겸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그들 중 한명이 동양에 카톨릭을 전하는데 앞장섰던 사비에르였다.

 

이들은 로욜라처럼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그들은 몽마르트르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로욜라의 건강 악화로 인해 성지순례는 연기되었고, 의사의 권유로 스페인 고향으로 돌아가 1년간 요양해야만 했다.

 

고향 사람들은 전에는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감고 백마를 타고 씩씩한 모습으로 출정했던 귀공자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놀라기도 했으나, 그가 로욜라 성에 살지 않고 병자의 간호도 해 주는 것을 보고 더욱 그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었다.

 

건강을 회복하자, 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가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또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터키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심히 박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지 순례는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중지하고 그 대신 수도회에 관한 교황의 인가를 얻기 위해 로마로 가게 되었다.

 

로마에서 로욜라는 신비주의적인 그의 주장을 펼치다가 교황청의 제지를 받게 되자, 교황의 권위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맹세하고 드디어 교황청의 인가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회’(제수잇)의 시작이다.

 

로욜라는 수도회의 인가를 받고 난 후 겸손한 마음으로 총장직을 사퇴하려고 했으나, 교황의 직접 명령으로 15년간이나 그 직에 있으면서 회원들을 지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수도회가 종래의 다른 수도회와 다른 점은,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 영적 왕국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분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있다. 그래서인지, 종교개혁 이후 예수회는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개신교도들을 가장 앞장서서 핍박했던 전위대 역할을 하게 된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로욜라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 로욜라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다. 그의 수면은 3, 4시간에 불과했으며, 많이 기도하고 절제, 극기하고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며, 때로는 몇 개의 구운밤으로 식사를 떼우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나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며 온순하고, 매우 사랑에 가득 찬 태도로 대했다. 제자들에게도 항상 그와 같이 할 것을 권하고, 고행은 완덕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또한 건강을 해칠 정도로 가혹히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의 덕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단연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로욜라는 1555년 여름 64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1622년 카톨릭 성인이 되었고, 오늘도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 로욜라와 예수회

 

예수회는 16세기 로욜라가 창립한 카톨릭 내의 결사단체로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고귀한 정신이 변질되어 각국에서 몰락해가는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카톨릭 내에서 교황청의 권력을 옹호하며, 기독교를 핍박·견제하기 위해 세워졌다.

 

* 예수회의 기독교 박해

 

도미니크 수도회가 지휘한 종교재판소는 원래 예수회가 만들었으며 그들이 종교재판 때 사용하던 악명높은 고문 방법도 예수회가 고안한 것들이다. 1545~1546년 사이에 포르투갈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한 사람은 로욜라 자신이였으며, 1655년 포루투갈 종교재판소의 소장은 예수회 회원이였던 니타르드 추기경이었다. 이 밖에도 곳곳의 종교 재판소와 개신교도의 탄압, 학살, 고문, 개종은 거의 예수회가 담당했다.

 

예수회는 각 국에서 로마 교황청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 사회, 종교, 사회조직 등에 침투하였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 암살 등을 자행해 왔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추방된 경험이 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 이후 종교재판을 주도하며 수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하였고, 많은 나라에서 카톨릭을 유지시키기 위해 독재정부와 협력해 기독교인이나 그리스정교회 교인을 고문하거나 강제 개종시켰다.

 

예수회는 파시스트와 나치당을 지원하여 2차 대전을 일으켰는데, 2차 세계대전은 카톨릭 신자인 히틀러와 교황청이 협력하여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전쟁이라고 평가하는 사학자들도 많이 있다. 이 과정 중에 교황청은 히틀러의 대량 학살을 교사(敎唆) 내지는 방조하였고, 한번도 비난한 적이 없으며, 물심양면으로 나치를 지원하였다.

 

예수회와 교황청 사이에도 권력 타툼이 있었고, 교황청의 권력을 장악한 예수회를 축출하기 위한 시도는 교황의 암살 등으로 좌절 되었다.

 

1546에는 예수회 사제가 교황청 신학자 자격으로 트랜트 종교회의에 참석함으로써 정치적인 색채도 띠게 된다. 교황청은 예수회를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고, 예수회는 이에 부응하여 맡은 소임을 열성적으로 완수했기 때문에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점차 세력을 넓히게 된다.

 

예수회 회원인 라네즈와 모론 추기경은 트랜트 종교회의에서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여 교황청의 권위를 높혔고, 사제들의 결혼과 자국어 예배, 교황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개혁파의 주장을 교묘한 책략과 논법으로 일축시켜 바오로 3세로부터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예수회는 교황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각국의 지도자를 포섭하는 정치조직으로 발전한다. 이를 위해 지도층에 대한 권위 있는 고해성사를 주관하고, 고위층 자녀에 대한 교육을 담당한다. 무섭게 성장하는 예수회의 세력에 당황한 교황청은 예수회 회원수를 60명으로 제한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조치는 금세 풀렸고, 1556년 로욜라가 사망할 당시에는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 예수회에 대한 명사들의 경고

 

"나는 죽는다... 제수이트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교황 끌레망 13세-

"매우 위험한 자들! 그들은 절대로 제국에서 용납되지 아니할 것이다." -나폴레옹 1세-

"진리의 우물에 독약을 탄 자들" -토마스 칼라일-

"제수이트들은 영원히 박멸되어야 한다." -교황 끌레망 14세-

"제수이트들은 피의 행동에는 명수들이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제수이트...흑암, 잔인, 배반, 전재독재제, 죽음" -존 아담스 대통령-

"만약 미국이 자유를 박탈당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체제를 통하여 올 것이다." -죠지 워싱턴 대통령-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카톨릭교 사제들로부터 피신시켜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W.K.클리포드 교수

 

 

* 그 밖의 예수회 활동

 

해외 선교에 힘을 기울인 예수회는 피정복민을 수탈하는 각종 경제활동에 참여하였고, 지금도 북 아프리카의 가장 부유한 지주는 예수회 신부이다. 멕시코에서 그들은 은광과 설탕공장을 운영하였고, 파라과이에서는 차와 코코아 농장과 카페트 공장을 소유하였고, 소를 키워 매년 8만두씩 수출하였다.

 

팔라폭스(Palafox) 주교는 1647년 교황 이노센트 8세에게 "남 아메리카의 모든 부는 예수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중국에서 예수회 신부들은 50%, 100%의 고리로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이러한 예수회의 탐욕과 부정, 음모와 권력장악은 어느 곳에서나 적의와 증오를 유발시켰다. 그 결과 예수회는 18세기 중반까지 30여 차례의 추방을 당했다.

 

프랑스에서는 1762년 4월 6일 예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영장을 발부하였다. "위 단체는 문명국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단체이다. 그것은 위 단체의 본질이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모든 권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위 단체는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복음 완성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은밀하고 사악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추구해 온 단체이다." 결론적으로 예수회의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모독하고, 시민사회에 유해하며, 국민의 권리와 왕권을 무시했고, 통치질서를 위협하였고, 국가적 소요를 조장하였으며, 종교적이며 기본적인 모든 윤리를 파괴한 조직으로서 그들 가슴 속에는 극악한 부패를 담고 있다."

 

프랑스에서 예수회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고에 귀속되었으며, 예수회 회원들은 예수회 서약을 철회하고, 프랑스 목사의 일반적인 규칙을 따를 것을 맹세함으로써 겨우 추방만은 면할 수 있었다. 파라과이의 예수회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되었고,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에서도 쫓겨났다.

 

19세기에 예수회는 자유주의자들과 충돌을 빚어 1834년에 포르투갈에서, 1868년에 스페인에서, 1848년에 스위스에서, 1872년에 독일에서 , 1901년에 프랑스에서 또다시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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