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아다나시우스

好學 2011. 8. 22. 20:47

아다나시우스는 흔히 교회 정통의 기둥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역사 인물로, 기독교의 교리가 정립되지 못했던 초기 기독교의 혼돈상황에서 성경에 입각한 정통교리를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AD296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 부모 아래서 신앙적으로 자랐을 뿐만 아니라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상류층 자녀들이 받았던 고전, 철학, 수사학 등 일반교육도 충실히 받았다. 23살이 되던 AD319년 집사안수를 받았고, AD325년에는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의 서기 자격으로 감독을 수행하여, 로마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했던 최초의 기독교종교회의인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나이 29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전생애의 방향을 결정짓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 애굽 광야의 은자(은둔자, 수도승)들에게 강력한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훗날 그들의 신앙과 생활방식을 일반에게 널리 퍼뜨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장차 수도원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한다.

 

 

AD328년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이 죽자, 32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당시 로마제국 교회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던 교회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에 피선되었고 그로부터 46년간, 그가 죽기까지 이 직위를 기본적으로 유지하였다. 기본적으로 유지하였다는 것은, 그가 당시 기독교세계에서 심각하게 전개된 교리 논쟁 등으로 인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에서 해임당하고 또 복권되기를 수차례 반복했기 때문이다.

 

 

 

 

● 초대 기독교가 해결해야만 했던 최대의 숙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이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구약성경에 예언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교회가 시작된 다음에도 여전히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초대 기독교 역사 가운데 활약했던 속사도, 변증가, 교부들의 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핵심 주제였다.

 

아니 어쩌면 이 문제는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되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사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마찬가지며, 우리의 모든 신앙행위는 헛것이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이단, 사이비의 문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남들이 무어라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질문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한번도 본적도 없는 그분을 여러분은 어떤 존재로 믿고 있는가? 진실로 그분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가?

 

초대교회 당시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며 누구이신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들은 초대 교회 수세기 동안 줄곧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교회의 상황 가운데,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시작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초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논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리우스 논쟁이다. 사실 기독교최초의 종교회의였던 니케아 종교 회의는 바로 아리우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회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감독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번은 알렉산더 감독이 자신의 교구 장로들과 교직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확신에 찬 신학적 견해를 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우스가 일어나 정면으로 감독의 삼위일체 견해를 반박해 버렸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12교구 중 하나를 담당하던 수석 사제였다.

 

당시 교회는 여러 신학적인 주장들이 혼재해 있던 때였는데,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에서는 이미 터툴리안이라는 위대한 신학자에 의해 정리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동방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심지어 단지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따라서 알렉산더 감독이 서방교회에서 이미 인정되고 있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주장하자, 동방교회의 주된 흐름에 영향받은 아리우스는 반발하게 된 것이다.

 

결국 알렉산더 감독은 교회의 신앙과 질서를 어지럽힌 아리우스를 정죄하였고, 아리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하게 된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그곳에서 자기 견해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편지공세를 통해 알렉산더감독에게 아리우스를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한다. 알렉산더감독도 이에 못지않게 편지 공세를 통해 아리우스가 신성을 모독했다고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결국 알렉산더는 감독의 권위와 책임에 근거하여, AD320년경 약 100명의 이집트주교들로 구성된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와 그 동료 성직자들을 파면하였고, 아리우스는 이러한 처분에 승복하지 않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 투쟁하게 된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신학 논쟁이 전체 동방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로마의 황제로 즉위한 사람이 바로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황제였다. 그는 제국의 평화를 위해 교회의 통일을 원했다. 그는 감독을 파견하여 양쪽의 화해를 꾀했지만 양자 간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황제는 AD325년 로마제국 전역의 교회 감독들을 소집하여 종교회의를 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에큐메니칼 즉 세계종교회의라고 알려지게 되는 니케아공의회였다.

 

황제는 안내장을 각 감독에게 보내 장로 2인과 수행자 3인을 동반하도록 했으며 왕복 여비와 체재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했다. 결국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를 정죄하였고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하였으며 니케아신조라는 신앙고백을 내놓게 된다.

 

이때 아다나시우스는 알렉산더감독을 수행하던 집사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할 수는 없었으나 이후 그는 니케아공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이라는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 니케아회의에서 아리우스파를 정죄했지만, 논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후 50여년 동안 계속되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교회의 정치적 상황과 로마 황실의 불안정한 정책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불안정한 로마제국을 하나로 묶으려고 하는 정치적인 데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니케아공의회에서 정죄당한 아리우스파 사람들은 이후 지속적으로 복수를 하게 되는데, 알렉산더 감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32이라는 젊은 나이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피선된 아다나시우스는 결연하고 요지부동한 태도로 니케아신조를 옹호하였고, 따라서 아다나시우스감독은 반대파의 가장 대표적인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를 공교회로 받아들이라는 콘스탄티누스황제의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였고, 결국 젊은 감독 아다나시우스는 반대파의 교묘한 정치적 음해에 의해 반역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39세 되던 AD335년 지금의 독일땅인 트리엘이라는 곳으로 귀양가게 된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죽자 로마제국은 황제의 세 아들에 의해 삼분되었다. 장자인 콘스탄티누스 2세는 주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서방을, 둘째 콘스탄티우스는 주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을, 셋째인 콘스탄스는 로마를 비롯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중앙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맏아들과 막내는 당시 서방교회의 입장에 따랐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교리를 인정하였고, 따라서 독일지방에 귀양가 있던 아다나시우스는 그리하여 AD338년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귀된다.

 

하지만 황제의 맏아들과 셋째 아들이 주도권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자 셋째가 서방을 통치하게 되었고, 제국의 동방은 둘째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다나시우스가 사역하던 알렉산드리아는 아리우스파가 세력을 잡고 있던 동방에 속했기 때문에, 아다나시우스는 다시 추방되어 로마로 피신하게 된다.

 

이처럼 교회정치와 로마 황실의 상황 변화에 따라 아다나시우스는 이후에도 수차례 추방과 복귀를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같이 추방과 귀향, 감독으로의 복귀가 계속되는 가운데, 아다나시우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더욱 확고히 세워나갈 수 있었다.

 

 

아다나시우스는 60세 되던 AD356년에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는데, 그는 감독직에서 쫓겨난 뒤 6년동안 젊은 시절 많은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내었던 이집트 광야의 수도사들 틈에 피신해 있으면서 집필에 전념하였다.

 

아다나시우스는 무척 많은 수의 작품을 집필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당한 여러 차례의 유형 기간 중에 기록된 것들이다. 그는 특히 이집트 광야 유형기간에 많은 작품을 썼는데, 광야의 적막함과 팽팽한 영적, 정치적 상황이 그에게 비상한 영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다나시우스의 글은 같은 시대 다른 사람들의 글과는 달리 단순하고 투명하며 매력적인데, 그것은 아리우스파와 수없이 투쟁하는 상황 아래서 썼던 글이기 때문에, 문학적 세련미나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기보다는 논쟁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역사나 인류의 역사로 볼 때, 위대한 문학작품이나 심오하고 영향력 있는 종교적 저술들은 대부분 역경 가운데서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지내오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가장 빛났던 때가 언제였는지 되돌아보라. 신앙생활 가운데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모든 여건이 평탄하고 문제가 없고 일이 잘 풀릴 때인가, 아니면 모든 여건이 어렵고 고달프고 힘들었을 때인가? 아마 대부분,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탈출구는 보이지 않고, 오직 주님밖에 길이 없어, 눈물로 간구하며 주님을 부르짖는 가운데,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던, 바로 그때의 경험들이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신앙생활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실감하며 은혜와 감사와 기쁨이 넘쳤던 때였을 것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조개가 진주를 품게 되는 것은, 모래가 들어와 조갯살에 상처를 내고, 그 아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조개가 끊임없이 분비물을 내어 모래알갱이를 감싸는 가운데 진주가 탄생하지 않는가? 소나무의 송진이 땅속에 들어가 오랜 세월 지내며 돌처럼 굳어진 것이 호박이라는 보석이다. 예전에 한복 마고자에 많이 사용하던 보석인데, 호박 역시, 소나무에 상처가 나고, 거기서 흘러나온 송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픈 상처의 흔적들이 이처럼 보석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고난과 고통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고난과 고통이 끝나는 곳에는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아다나시우스는 69세때도 감독직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연로한 까닭이었는지 시골집으로 낙향하였다가 황제가 바뀌자 다시 복귀한다. 이후 성령훼방론자들과 투쟁하다가 AD373년 고단한 인생 나그네길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77세였으며, 그가 집사로 선출되어 안수받고 교회 일을 시작한지 54년째 되던 해였다.

 

 

서양에 이런 격언이 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라. 그러면 네 정신을 잃을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라. 그러면 네 영혼을 잃을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신비의 영역이다. 인간의 제한된 지성으로 온전히 파헤치려는 태도는 인본주의적인 교만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독교 교리를 몰라서는 안되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서도 안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 공부하되,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잠시 보류해 두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것이다.

 

혼란한 초대교회 시절,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통교리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유배생활을 당하며 고난을 겪었던 아다나시우스의 삶을 생각하면서, 성경말씀 속에서 바른 지혜를 얻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승리하며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