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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크리소스톰의 어머니 안두사가 아들에게 주는 ‘이상적인 친구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친구를 갖는 것은 또 다른 자아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일치이고 조화이다. 어떤 것도 동등한 것은 없으며, 일치 안에서 비로소 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등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각자는 열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지닌다. 너는 열 사람 속에서 한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속에서 열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적을 만난다면, 그 적은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을 공격하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패배하고 말 것이다. 공격을 받아도 한 사람에게서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에게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결핍을 경험해보았는가? 그럴지라도 결코 황량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분야, 즉 남은 아홉 사람들에게서 채워질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분야가 보호받을 것이다. 작은 부분이 채워질 것이다. 그들 각자는 20개의 손들을, 20개의 눈들을, 그리고 20개의 발들을 소유하는 셈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눈들을 통해 볼 수 있다. 자신이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을 때, 각자는 나머지 아홉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백 사람이라면, 백 사람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산교회에도 이같은 진정한 동료의식, 가족의식이 더욱 많은 교우들 사이로 확산되어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 크리소스톰은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서 철학과 수사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그 당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었던 정치가이자 법률가였던 리바니우스로부터 받은 수사학은 앞으로의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크리소스톰의 모친은 그를 법률가로 키울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아들은 위대한 스승 밑에서 유능한 대중 연설가로 훈련되고 있었다.
18세쯤 되었을 때,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의 감독 멜레티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모태 신앙이었기 때문에 어떤 결정적인 계기로 인해 그가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경건한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크리소스톰은 금욕적 삶에 마음이 끌렸으며 그때 이후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는 데 마음을 쏟았다. 크리소스톰의 신실한 태도를 보고 안디옥 교회의 감독은 그를 성경낭독자로 삼았다.
또한 크리스소톰은 당시 영향력 있는 교사였던 다소의 디오도레 지도 아래, 일종의 수도승 학교에게서 3년간 신학을 배우게 된다. 이때 크리소스톰은 디오도레로부터 안디옥 학파의 독특한 문자적 성경해석법을 배웠다. 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석가들이 선호한 미묘한 우화적, 영적 의미 대신 성경 기자들이 본래 의도했더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캐는 해석법이었다.
모친 안두사가 죽은 후 크리소스톰은 복잡한 도시를 피하여 안디옥 남부의 산악지방으로 들어가 6년간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 곳에서 그는 신학적 연구, 거룩한 묵상, 그리고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의 건강에 결정적 손상을 입게 되었다.
● AD381년 타의에 의해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안디옥의 감독 멜레티우스는 그를 집사로 안수하였다. 그리고 5년 후 멜레티우스 감독의 후계자 플라비안 감독은 그를 사제로 만들었다. 그 후 크리소스톰은 12년 동안 안디옥 강단에서 감동적이고 웅변적인 설교를 행했는데, 그는 성경 강론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바로 가르쳤으며 그것을 또한 삶에 적용시켰다.
특히 AD387년, 안디옥에서 새로운 국세로 인해 폭동과 유혈 사태가 일어나 황제와 그 가족의 조각상이 모독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처형이 불가피한 상황 아래서 안디옥 시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싸여 황제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당혹감과 절망과 두려움에 싸여 떨고 있는 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크리소스톰은 교정이 필요한 범죄자들, 엄정한 심판을 내려야 하는 재판관들, 근심에 싸여 있는 시민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열정적인 설교를 하였는데, 그 당시의 광경에 대해 ‘그토록 많은 군중이 함께 모였지만 마치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처럼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크리소스톰의 이같은 노력과 교회 감독, 그리고 수도자들의 중재로 인해 마침내 황제로부터 사면이 내려졌을 때, 크리소스톰은 경축의 횃불을 밝히고 군중들 앞으로 나아가 ‘그대들은 이제 선행의 참 빛을 밝히라’고 촉구하였고, 그의 이같은 선지자적 메시지는 시민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크리소스톰에 대한 안디옥 사람들의 존경은 대단하였고, 이후 그에게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된다.
온갖 은사와 인기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설교 사역에 대해 자만하지 않았다. “나의 사역은 흙탕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땅의 한 구획을 깨끗이 청소하려고 하는 사람의 일과 같습니다.”
● AD397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넥타리우스가 죽자,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곳의 감독으로 선출된 것을 통보받고, 멀리 도주했으나 납치되다시피 하여 그 이듬해인 AD398년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습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기독교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세속적인 도시였다. 크리소스톰은 성직자와 수도승, 수녀, 유력한 평신도들 사이에서 공히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크리소스톰은 왕실에 속한 감독의 생활 스타일을 거부함으로써 기독교의 일반 민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나 그의 열성적 치리 활동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사치 및 악덕에 대한 그의 탄핵은 수많은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의 삶의 태도가 그의 최악의 적이었다. 크리소스톰은 회유적 수법이 부족하고 강직하였다.
이것은 요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을 하면서 어딜가도(그곳이 공직사회든, 교육계든, 종교계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라고 종용한다.
그는 사제관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다. 스스로 철저한 금욕적 삶을 살았다.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고 타인에게는 항상 관용을 베풀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담대했고 헐벗고 힘이 없는 자들에게는 늘 동정을 베푸는 자였다. 그는 만찬에 초대되는 것을 거절했고 성경말씀대로 마음은 늘 초상집에 있었다. 늘 독방에서 기도하며 극단적인 단순한 삶을 살았다. 교회 주변과 길거리에 즐비한 거지들은 외면한 채 호화스런 공중목욕탕과 화려한 궁궐과 교회 안에서 부와 화려한 옷과 좋은 음식을 즐기는 관행에 젖어 있던 당시의 부도덕을 질타했다. 간악한 성직자들을 훈련시켰고, 부도덕한 사제들을 올바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갔다.
그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생활도 부요한편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삶은 단벌옷으로 만족했고 음식도 기름지고 맛있는 것을 피했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에 대한 시민들의 존경심은 대단했고 그의 말에 떨었으며 그는 성자의 칭호를 받았고 황제도 그를 두려워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이방 민족들이 많이 있었는데,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목회 영역을 고트족에게까지 확대시켜,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통역자를 대동해서까지 저들에게 설교하러 다녔다. 그리고 멀리 다뉴브 강가에 살고 있는 고트족과 스킨디안족에게 선교사들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나중에 추방을 당한 가운데서도 그는 선교의 일에 관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크리소스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감독으로 활동할 당시, 황제는 아카디우스였으나 실권은 유트로피우스가 잡고 있었다. 하루는 유트로피우스의 학정에 못 이겨 일단의 무리가 예배당으로 피하여 들어왔다. 유트로피우스는 즉시 그들을 잡아들이려 병사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서슬퍼런 병사들의 위협에도 크리소스톰은 그들의 예배당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트로피우스는 이 일을 황제에게 고하여 재가를 얻으려 했지만, 황제의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트로피우스의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그를 처단하기 원했다. 성난 군중들이 그를 뒤쫓았다. 유트로피우스는 이전에 군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배당으로 숨어들었다. 크리소스톰은 다시 한번 예배당으로 난입하려는 성난 군중들 앞을 막아섰다. 그 누구라도 도피성을 범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 크리소스톰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곧 대주교로서 황제와 황후의 치부와 전횡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그의 설교는 황후 유독시아에게는 가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크리소스톰은 황후의 음모에 의해 AD403년 그의 나이 58,9세 경,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황후는 부패한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하여 크리소스톰이 소아시아 지역 종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타한 틈을 타, 그에게 모반죄라는 혐의를 씌워 감독직에서 파면하고 민중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추방하였다. 하지만 민중 폭동에 대한 두려움과 지진에 의해 야기된 사회혼란 때문에 황후까지도 크리소스톰의 재소환을 청원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에 복직되었다.
●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을 가진 크리소스톰은 또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한번은 황후 유독시아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는데, 거기서 크리소스톰은 광적인 군중들의 아첨을 개탄하는 설교를 거리낌 없이 쏟아내었다. 그러자 그의 적들은 그의 설교들을 왜곡, 과장하여 황후에게 고했고, 화가 난 황제는 그에게 퇴임을 명령했다. 하지만 크리소스톰은 불복했다. 결국 AD404년 부활절 세례예식 중에 황제의 군대들이 들이닥쳐 집례중인 감독을 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크리소스톰의 지지자들을 처단하고 크리소스톰은 아르메니아로 추방당한다.
230통 이상되는 현존하는 그의 모든 서신들은 이 마지막 유형 기간에 씌어진 것들이다. 이미 60이 넘은 나이에 허약한 몸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지만 크리소스톰은 오히려 그의 유형지가 진정한 순례지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의 대적자들은 크리소스톰을 흑해 먼 북동쪽 연안에 있는 피티우스로 가라고 명령했고, 그곳으로 이동하던 크리소스톰은 AD407년 여름의 퇴약볕 아랫서 잔혹한 대우를 받던 그는 흑해 근교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죽음은 사실상 순교였다.
죄 없는 크리소스톰 감독이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황후와 반복음주의자들에게 항의하면서 폭동을 일으켰고, 이때 콘스탄티노플 시내에 있던 성 소피아 대성당은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이슬람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전의 성 소피아 대성당이 불탄 후 6세기에 유스티니안 황제 때 새로 건축된 것이다.
크리소스톰이 남긴 귀중한 글들이 현재까지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경건하고 살아있는 예배의식 등은 이후 교회 발전에 아주 크게 공헌하였다. 크리소스톰의 예식서는 1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정교회에서 매주일 집전되고 있다.
● 크리소스톰이 감금되었을 때 있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감금된 크리소스톰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주님, 저에게 이렇게 조용한 기도실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황제와 황후는 그를 흉악범들이 가득한 곳으로 보냈다. 그 곳에서 또 크리소스톰은 "이 불쌍한 죄수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고 저를 이곳으로 파송하시니, 주님 감사합니다."는 기도를 드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황제와 황후가 이제는 크리소스톰을 사형시키기로 했는데, 그때의 크리소스톰의 기도는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 같이 부족한 자에게 그러한 영광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였다.
결국 크리소스톰을 존경하고 따르던 많은 백성들의 동요가 반란으로 바뀌려고 하자 황제와 황후는 사형을 중지시키고 유배를 명령하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크리소스톰은 "주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이 부족한 종이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까?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가 자신을 유배 보내는 황제와 황후에게 한 마지막 설교는 이것이다. "황제든 황후이든 누구이든지 저에게 어떤 핍박을 한다고 해도 저는 상관치 않습니다. 그들이 저를 쫓아내면 저는 엘리야 같이 될 것이고,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 같이 될 것이고, 바다에 던지면 요나 같이 될 것이고, 돌도 치면 스데반 같이 될 것이고, 목 베임을 당하면 세례 요한 같이 될 것이며,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 증거한 진정한 하나님의 용사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다.
크리소스톰이 죽은 후 오래지 않아 그에 대한 변호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AD438년 그를 죽게 했던 황제와 황후의 아들인 동로마제국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그의 유골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사도교회에 재매장되었다. 데오도시우스 2세는 존경의 예를 갖추어 크리소스톰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부모가 행했던 죄악에 대해 용서를 빌게 된다.
15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크리소스톰은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면서 그 어떤 세속적 부귀와 편의주의에 결코 굴복하지 않고 교회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나갔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으며, 청빈과 진리, 그리고 이웃사랑의 실천자로서, 또 황금의 입을 가진 열정의 설교자로서, 요한 크리소스톰은 오늘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교회와 성직자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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