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성 바실(St. Basil the Great)

好學 2011. 8. 22. 20:51

성 바실(St. Basil the Great)

 

 

바실(St. Basil the Great)은 지금의 중앙 터키지역인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에서 AD330년경 태어났다.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는 성경에 나오는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와는 다른 곳이다.)

 

그의 집안은 일찍 복음을 받아들여 그 지방의 대표적인 기독교 집안으로 맥을 이어왔는데, 후일 그의 조모, 모친, 누이, 두 형제가 성인으로 추대될 정도로 독실한 신앙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자라게 된다. 바실의 형제자매는 모두 10명이었는데, 장녀는 누나인 마크리나였으며, 바실은 장남이었다.

 

바실의 부친의 이름도 바실이었는데, 바실의 부친은 종교적인 가르침 외에도 세상적인 학문에도 눈을 뜰 수 있도록 바실을 이끌어 주었다. 겨우 10세밖에 안된 바실은 공부를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웅변술을 배웠다. 그리고 바실은 원래 법률가와 연설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워 아테네로 건너가 수학하며 수사학과 문학을 배웠다. 아테네에 있는 동안 바실은 미래에 로마 황제가 될 율리안과 교유했으며, 일생동안 절친한 친구로 지내게 되는 그레고리를 만나게 된다.

 

 

뛰어난 재능과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젊은 바실은 공직 생활에 뜻을 두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바실은 수 년에 걸쳐 그동안 배웠던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의 인생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누나 마크리나의 신앙의 모범과 가르침이었다. 그의 누이 마크리나는 세상적인 성공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고, 바실은 누나 마크리나의 가르침과 모본을 통해 이를 계기로 진정한 신앙인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세례를 받고서는 금욕적 생활을 위해 고위 공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AD357년, 27살의 젊은 바실은 애굽,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지의 광야를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여러 수도원들과 사막의 은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통해 수도원적 삶을 배웠고, 여기서 큰 감명을 받은 바실은 그들의 본을 따라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서원한다.

 

그는 친동생 그레고리와 또 친구 그레고리(같은 이름이다)와 함께 대부분의 재산을 팔아 조모의 집이 있는 소아시아의 본도로 물러가서 모친과 누이가 설립한 여수도원 근처에, 주의를 흩뜨리지 않고 기도와 명상에 전념할 수 있는 작은 수도공동체를 창설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은, 훗날 모든 동방 수도원 운동의 규범이 된 기본적인 수도원 규칙을 만들게 되는데, 바실은 수도사들의 기본적 삶을 위해 '대규율'(Longer Rules), 즉 55개의 규율과 '소규율'(Shorter Rules), 즉 313개의 작은 규율을 썼다. 바실은 이 규율에서 특히 상부상조의 사랑과 헌신을 가진 기독교적 삶이 성경적 공동생활임을 강조했다.

 

그런 후 바실은 362년 남동생 세바스테에게 그 수도원의 지도직을 물려주었고, 자신은 금욕적 삶을 통해 수행했는데, 바실은 밤새 기도하기도 하고, 한 가지 옷 이상을 입지 않고, 목욕을 하지 않으면서 완전한 덕을 세우는 삶을 살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그는 경배의 모습으로 명상하는 기도를 권하면서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발전시켰다. 또한 복음적 방침인 가난, 자선, 그리고 무조건적인 복종보다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면의 명령,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따른 완전한 순종을 강력히 주장했다.

 

 

● 그런데 주변 상황은 바실로 하여금 공공 생활을 영구히 떠나 은거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362년 가이사랴로 되돌아 온 바실에게 로마제국 황제 배교자 율리안은 서신을 써서 자신의 궁정으로 들어와 사역하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363년 잠시동안 본도 지역으로 물러가 금욕적 삶을 지속했다. 그러나 가이사랴의 감독에게 설득을 당해 그는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와 목회 사역에 종사하게 된다.

 

바실은 AD364년에 안수를 받고 사제가 되는데, 사제로 있으면서 그는 많은 설교집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너무나 웅변적이어서 당시 감독 유세비우스로부터 질투심을 갖도록 했지만, 신임을 받았다.

 

367-368년 갑바도기아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여 고통을 당하자 바실은 자신의 가문 부동산들과 재산들을 팔아 굶주리고 있는 자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하였다. 이런 위기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구별을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병든 자들을 위한 병원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을,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소를 지었다.

 

드디어 370년 갑바도기아 가이사랴의 감독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감독이 된 바실은 교회의 연합을 위해 노력했다.

 

율리안의 뒤를 이은 로마황제 발렌스는 371년 가이사랴를 지날 때, 바실에게 니케아종교회의 전통을 잇는 정통신학을 굴복하라고 요구하면서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설교를 그만두라고 명했다. 바실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아마도 황제는 지금까지 진짜 감독을 만나지 못하셨군요"라고 말했다. 황제는 바실의 저항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다나시우스와 친밀하게 지내면서 동방의 많은 감독들이 니케아신조에 대한 회의감을 떨쳐 버리도록 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황제 발렌스는 바실로 하여금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발렌스는 바실에게 뇌물을 주면서 이단적인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묵인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리들을 보내 공공연히 위협을 가하였다.

 

 

여기에 관련된 내용은 그의 남동생인 그레고리가 남긴 기록에 잘 표현되어 있다. 모데스투스라는 장관이 와서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일삼았다.

 

“너의 주권자인 로마황제의 종교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에 굴복하고 순종하겠느냐?”

 

“그것은 나의 진짜 주권자의 뜻이 아닙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께 보잘 것 없는 자인 나 역시 어떤 피조물에게도 경배를 드릴 수 없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너 보기에 내가 어떤 존재냐? 이런 명령을 내리는 우리가 네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느냐? 너의 친구보다도 못한 자로 보이느냐?”

 

“당신이 장관이고 존경받는 자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하나님과는 비교될 수 없는 자입니다. 당신과 사귀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신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친구로 사귈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이기 이전에 기독교의 독특한 표시입니다.”

   

이 말은 들은 장관은 매우 분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쓴 말을 내뱉는다.

 

“네가 나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두려워한다니요? 당신의 말대로 무엇이 저를 두렵게 할 수 있을까요? 재산 몰수, 추방, 고문, 죽음이 나를 두렵게 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러면 이런 것들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물론 그렇습니다. 재산 몰수라 하셨는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빼앗길 것이 없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란 다 떨어진 누더기 옷과 몇 권의 책뿐입니다. 추방이라고 하셨는데, 갈 곳도 없고 거할 곳도 없는 나에게 추방이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그네로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고문이라 하셨는데, 곧 땅에 묻힐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셨는데, 죽음은 저의 은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존재하고, 그리고 그분에게 되돌아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에 놀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에 관해 말한 사람을 만난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제대로 살아가는 감독을 만나지 못한 셈입니다. 언행심사가 일치되는 감독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바실은 황제의 명에 굴복하지 않을 만한 신앙적 용기가 충분히 있었다. 황제 발렌스도 감히 그를 해임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세력과 명성은 대단하였다.

 

 

● 우리가 현재 통상적인 수도승 생활로 생각하는 내용 중 다수가 사실상 바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들 가운데 다수가 남과 함께 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고립된 금욕생활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수도승들이 ‘거룩함’을 경쟁하기보다 서로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바실은 이같은 신앙공동체들은 각 교회 감독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공동체의 인원을 관리하기 쉬운 범위로 제한하여 약 30명 정도의 공동체가 적당하며 엄격한 절제생활과 내핍생활을 강조하였다. 하루에 7회 기도하는 수도원의 규칙은 바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아마 수도승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도록 한 일일 것이다. 바실은 그러한 사람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많은 관리들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바실은 이 일을 위해 자기 교회 주변에 커다란 건물들을 지어, 나그네들의 숙박소, 병원, 나병 환자들을 위한 특별 치료소, 학교, 그리고 사회적 구제 기관을 운영하였다.

 

375년 자신의 마지막 말이 될 수 있는 성령론을 썼다. 바실은 성령의 신성의 강조한다. 그의 기본적 입장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성령께서도 행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피조물들의 창조, 갱생, 그리고 성화에 관한 책임은 성령에 있으시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신성을 소유하셔야한다는 것이다. 또 바실은 행동가로서 학교, 병원, 그리고 자선 단체들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특별히 캅바도키아에 있는 수많은 문둥병자들을 개선하는데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를 가리켜 '대' 바실이라 부르게 된다. 하지만 이단들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자못 정치적인 행동을 취하곤 했다.

 

379년, 즉 49세의 나이로 바실은 세상을 떠났다. "오 주님, 당신에 손에 저의 영혼을 부탁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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