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이창현 영수

好學 2011. 9. 6. 20:39

 

 

순교자 이창현 영수

 

이창현 영수(1898-1950)


이창현은 1889년 8월 15일 황해도 청곡면 평천리에서 이성지씨의 3남 3녀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창현은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났지만 고집도 남다른 편이었다.

한번 옳다고 여기는 것은 숱한 매를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번복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취학전에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다. 이창현은 나이가 들어 신학문의 전당인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었다.

 

북한쪽 주민들은 북장로교의 극성스러운 선교사들의 전도로 일찍부터 예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 신유의 은총을 나타내는 부흥사가 되고 싶었고 애기전도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1919년 30세가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나 교역자들이 숫하게 끌려가 매를 맞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3.1운동의 전후를 통하여 감동만 받은 것이 아니라 변절자들의 슬픈 모습도 목도했다. 평원교회 영수가 되어 죽을때까지 영수로 봉사했다. 일제하에 신사참배의 올무가 싫어서 시골교회에 몸담고 살았고 해방 후에 주일선거 반대, 기독교도연맹가입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순수한 믿음을 지키려 노력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나서 공산당의 탄압은 더 무서웠고 공산당과 타협을 거부하고 순수하게 믿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는 진리를 사수해 교회 뒷산으로 끌려가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총성과 함께 구덩이에 쓸어넣었다.

 1950년 11월 18일 62세 환갑이 지난지 3개월째 되던 해에 순교를 했다. 함께 총살당할 때 귀바퀴만 뚫고 지나가 붕대를 감고 살아 한달만에 돌아온 유정엽선생이 나타나 순교현장에 대해 그때의 상황을 증언 해 주었다.

 

후손들은 월남하여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선교사로 순교자의 신앙유업을 계승해가고 있다. 이선각집사. 이선장 장로. 이복단권사(성지기도원 원장) 이복녀권사. 이승조목사(육군군종감 역임 현재 문성교회 담임) 이승신목사(러시아 선교사). 이순혜전도사(성지기도원 부원장). 양영근목사(러시아 선교사)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