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이유택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8. 22. 20:40

 

 

순교자 이유택 목사 (장로교)

 

이유택 목사(1905-1949)


이유택은 1905년 1월 9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운곡동에서 이퇴계 선생의 후예로 태어났다. 4대독자 유복자로 태어나 한문을 읽다가 14살에 조혼하여 15살에 첫 딸을 낳았다.

그는 예안보통학교에 다니든 중 평양에서 온 김선생이란 분을 알게 되어 예수를믿게 되어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집안 어른들의 "그래 네가 그토록 야소를 믿으려면 할 수 없다. 너는 이 문중에서 나가야 하느니라"는 호통에도 이유택은 부동자세로 엎드려 입을 열줄 몰랐다.

4대독자이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식은 그대로 살려둘 필요가 없다하여 가문회의에서는 처형하기로 결정하여 멍석말이를 하고 발로 밟아 처형하는 한창 도중에 문중의 어른들이 곰곰히 생각하고 "그런대로 쓸모있는 놈을 그대로 죽이기는 애석하다"하여 중단했다. 멍석말이에 풀려난 그를 보고 있던 문중 어른 중 외삼촌이 신주단지를모두 끄집어 내어 냇가에 내동댕이 치고 신주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니 이런 놈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낫을 던져 찍었지만 다행히도 빗나가 목숨을 구했다.

 

 어린 중학생의 몸으로 슬하에 딸 셋이 있었고 문중에 축출을 당해 가족을 먹여 살리랴 학비를 벌랴 갖은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머리가 비상하여 시간에 쫏기면서도 항상수석을 차지하여 매퀸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매퀸은 이유택을 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유학을 시킬 계획이었지만 김인서 장로가 매퀸에게 길선주목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훌륭한 젊은 전도사를 찾는다고 하니까 이유택을 소개했다.

 

이유택은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7년 32회로 졸업한 후 평양노회에서 1937년 목사안수받고 신현교회 담임으로 부임. 1938년 9월 10일 제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가결시킬 때 이미 금강산 수양관에서 10일동안 주기철, 김화식목사와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이유택목사는 땅을 치고 울었다.

 

1938년 농후회사건에 연루되어 주기철목사와 함께 주동자로 몰려 경북 의성 경찰서로 잡혀가 7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았다. 출옥 후 1941년 신현교회는 폐쇄 당하고 남신의주 교회에 부임 해방을 맞았다. 일제에 의하여 신앙의 용장이 된 이유택목사는 해방 후 신현교회를 재건함과 동시에 이북 5도 연합노회를 결성하는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재건된 신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을 권유받았지만 500명의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어 교회를 사수하다가

 

1949년 12월 28일 공산당에의해 문제의 교역자로 검거가 되었으니 이듬해 일으킬 6.25의 전초전이었다. 수요일 찬양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가든중 어둠속에서 나타난 내무서원이 그의 팔장을 끼고 "갑시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 이목사는 가족이나 교인들에게 작별인사 한마디 못하고 영원히 오지못할 곳으로 가고 이삼열목사가 부친의 뒤를 이었다. 이삼열목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 은퇴 교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