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임성근 장로

好學 2011. 9. 15. 21:47

 

 

순교자 임성근 장로

 

임성근 장로(1886-1950)


임성근목사는 1886년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동창리에서 조그만 과수원을 경영하는 임창화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읽고 그의 나이 19세에는 그보다 나은 학자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한학에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이같이 한학에 깊이를 더하던 무렵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남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이유로 부모에게 숱한 매를 맞아가면서 부모를 설득해 예수를 믿게 했고 29세에 동창교회 초대장로로 세움받았다.

 

1919년 33세에 동창 장날을 기해 안악 학생들과 연대해 3.1우동을 주도했다. 임장로의 기지로 동창 장날 조기를 받는 김장독에 태극기를 감추어 장터에 내 놓았다가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우어주고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동창 장날이 되면 상인들이 조기를 받기 위해 종종 김장독을 동원하기 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3.1만세 시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1년만에 황태자 탄생으로 특사되었다. 출옥 후 그는 동창교회 조사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일제는 예배시간이면 두명의 정복 경찰관으로 칼을 차고 참석해서 신사참배를 하나 안하나를 감시하였다.

처음에는 교인들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악랄한 일경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색출해 배급을 중지해 버리고 말았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교인들이 하나 둘 고집을 꺾자 괴로워하던 임성근 전도사는 신사참배 강요에 못이겨 가족을 이끌고

 

1943년 만주로 건너가 장사를 해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1945년 그렇게 그리던 해방은 되었으나 해방 후 장개석 군대가 패배하고 팔로군이 만주땅을 점령하게 되자 임성근 전도사는 재산을 몰수 당하고 인민재판에 회부 당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런 인민재판중에도 어떤 변호인의 정직한 변호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감사하며

 

1948년 가족을 이끌고 빈손으로 귀국했다. 김익두목사가 시무하는 서부교회에 전도사로 이명을 받아 사명을 다해 전도사일에 열중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김익두목사를 모시고 교회를 사수하는 중

 

1950년 10월 13일 공산치하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반공의거가 안악에서 일어나 북진하는 UN군을 환영하고 공산군은 물러가라고 외치게 되자 북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은 반공의거의 보루로 지목되는 신천 서부교회로 몰려가 새벽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을 무차별 사격했다. 김익두목사와 임성근 전도사 이천실집사 등 다수와 인근교회 청년3명도 그자리에서 총살되고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