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이창실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9. 6. 20:38

 

순교자 이창실 목사 (장로교)

 

이창실 목사(1890-1949)


이창실은 상해 무관학교 제 2회 졸업식에 졸업생 대표로 선서를 낭독하였다. 주님 사랑이 곧 겨레사랑이고 겨레사랑이 곧 주님 사랑임을 실천할 무대에서 다시태어나는 이창실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번뜩였다. 이창실은 1890년(경인) 4월 21일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송학리에서 이영기씨의 5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시 한문서당에서 수학. 정신이 총명하여 천재란 별명을 들었고 송천교회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에 입학 수업하였고 학예회를 개최하고 토론회 연설회를 하면 매번 일등연사로 칭찬이 자자하며 부친이 그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고 귀가하여 형제분이 교회를 열심히 봉사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어 소래에 있는 금세학교를 졸업한 후 풍천양재학교 교사로 4년 광선학교에서 5년을 근무하였고 1917년부터 전도사에 임명되어 송학교회, 금곡, 진목 3교회를 시무하다가 1918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신학교 2학년때 3.1운동에 참가한후 고향 은율로 돌아와 3.1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장연경찰서에 체포 구금당했다 온갖 고역을 치룬 후 출옥했지만 1920년 .구월산대-독립혁명군 사건에 연루되어 밀정에 의해 대장등 7명이 전사당하고 교회지도자 24명이 고발당하여 쑥대밭이 되는 위급한 상황에서 쫏기는 몸이 되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군관학교에 입학 제2회로 졸업한 것이다.

 

 1921년 8월 32세의 나이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3월 16일 풍천장날 시장중앙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선두시위하며 독립만세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항일투사들과 구월산 구엽사 지하실을 열락본부로 정하고 상해 임정과 연락인으로 군자금을 모집케하고 상해 임정에 들어가 광복군에 입대 훈련받고 무력항쟁에 밀명을 받고 은률로 잠입해 시민들 앞에 동립선언서를 낭독해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송화 지구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과 교전끝에 체포당해 7년형을 받고 해주, 평양, 서울, 마포 등지 형무소에 수형생활을 하다가 1925년 9월 대정가에 경사로 특사 운운하며 석방하였으니 5년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출옥했다.

 

1927년 해창교회 전도사4년 1930년 재영읍교회 4년간 전도사 1934년 재령군 북율면 거실포 교회 시무중 신학교에 입학 1935년 3월 평신을 28회로 졸업하고 동 4월에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2월에 거실포 교회에 위임목사로 취임하니 46세로 18년 만에 졸업을 한 것이다.

 

1940년에 남천읍에 장로교회를 세우고 목회하였으나 독립군이라는 전직이 따라붙어 항상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한때 군민들의 원에 의하여 평산군수로 지낸바 있으며 해방을 맞아 사리원 남부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을 거부하고 월남하지 않고 끝까지 강단을 지키다가 1949년 4월 부활절예배를 마치고 공산당 내무서의 문제 교역자 검거령에 연행돼 영영 불귀의 몸이 되었다. 공산군은 독립운동가라면 대접을 해 주어야 할 이창실목사를 오히려 항일투쟁 경력 때문에 이목사를 살려둘 수 없다하여 체포되는 즉시 총살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창실목사의 재판시에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송화읍 일심재판시에 판사가 7년형을 언도하고 피고로서 할말이 있으면 하라하자 이목사는 나는 무엇으로든지 여기 김남섭보다 우수하다. 지성으로던지 인격으로던지 독립운동 한것으로든지 무엇으로든지 그보다 우수하다 나는 김난서보다 10배 일을 더한 나인데 왜 나는 7년 김남섭은 12년으로 판정하니 아무래도 이 재판은 오판이니 내게 형을 더 달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방청석은 박수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진실여사. 아들 성진은 의사로 활약했는데 1947년 3월 공산군에 납치당한 후 소식이 없다. 자부와 두딸은 월남하여 여전도사로 성업의 대를 이었고 그 손자는 이응삼목사로 영락교회 부목사로 14년간 목회 하다가 1996년부터 현재 순교자기념선교회 총무로 수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