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이정흡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9. 6. 20:38

 

 

순교자 이정흡 목사 (장로교)

 

이정흡 목사(1910-1950)


이정흡은 1910년 2월 10일 평남 박천에서 장로 이용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숭실학교와 평양 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어 도회리교회와 용전교회 조사로 시무하여 의료 봉사활동을 펴고 있었다.

부친 이용훈장로는 민족애가 뜨거운 사람으로 도화면 무릉리로 이주해 왔을때 질곡교회 기주복목사가 시무하는 질곡교회 장로로 시무하다가 1945년 해방 후 고당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민주당 곡산군당 위원장직을 맡아 구국운동에 혼신을 경주하게 되었다.

 

이정흡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기주복목사가 목회하던 안주노회 소속 도회리교회를 담임한 이정흡목사는 부친 이장로가 월남할 때도 목양지를 지키겠다며 월남을 거부했다. 그의 목회는 남다른데가 있었다.

 

목사이면서 의사로서 가난한 지방민들에게 의료사업을 베풀어 신, 불신간에 지역사회에 존경받는 목사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그의 교회는 항상 소독내로 찌들어 있었다. 6.25발발하자 인민병원에 근무하라는 공산당의 명령에 대해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원목으로 근무할 것을 요구했으나 "의사가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려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 의사입니다.

 

나를 인민병원에 근무시키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목사로서 근무하게 해 주십시요 그러면 제 의술을 죽어가는 생명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이목사의 제안은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천부당 만부당 한 일로 말씀전하는 원목제도를 허락할 이가 없었다.

이목사의 제안을 거절한 그들은 "악질반동 이정흡이는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을 뿌리채 흔들려는 인민의 적이다."라고 하며 반동으로 몰려 6.25가 터지고 이내 도회리 국민학교로 끌려가 트럭에 태워져 교인들과 함께 어느 외진 들판에서 장렬히 순교한 것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