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이태석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9. 6. 20:40

 

순교자 이태석 목사 (장로교)

 

이태석 목사(1901-1950)


1919년 경신중학교 1년시에 3.1운동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감시를 피해 고향에 돌아가 태탄사립학교에서 훈도를 하는 등 숭실중학교 편입하여 수학하던 중 학생의열단을 조직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국내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일본에가서 고학하면서 오사카 명교중학교을 졸업 도쿄중앙대학예과를 거쳐 상과를 졸업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귀국시켜 경성성서학원(현서울신학대학)에서 32세로 졸업한 후 첫 목회지로 충남 금산읍 금산성결교회 초대교역자로 파송 3년간 시무하게 하신 후 평양시내 상수리교회, 신암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시다.

 

1945년 해방 후 평양 신임리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교회를 폐쇄하는데 항의하였다. 해방 후 조국해방과 1950년 6.25동란 등 수많은 혼란과 위협의 와중에서도 강단수호와 교인들의 양육을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다가 1950년 6.25가 터지고 국군과 공산군이 교대로 남과 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바람에 교회지도자 목사님들과 성도들 그리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희생당할 때 이태석 목사의 순교도 이런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 9.28 수복 국군북진 평양폭격 공산군의 눈을 피해 살던 이목사의 세 아들과 많은 신앙인들은 숨어있다가 비행기만 나타나면 자유와 평화로 마음이 가득찼다. 이목사와 사모와 네 딸과 손자들이 평남 강서로 피난을 갔고 20세 안팎의 승욱, 승만, 승규 삼형제만은 평양에 숨어 살도록 잔유했다. 사랑하는 세 아들이 평양에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시골서 평양에 와 보곤 하던 이목사는 10월 11일 평양에 왔다가 후퇴중인 공산당에게 끌려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과 구두발로 말로 다 못할 곤욕을 치루며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 이목사의 아들 삼형제와 온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을 했지만 체포된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이태석 목사는 이 기쁜 평양탈환의 자리에 엇었다. 이목사의 행방을 찾던 가족들은 안타깝게도 이목사의 싸늘한 시체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후퇴하던 공산군들에 의해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한모퉁이 반공호속에서 40여명의 납치인사들과 함께 총살되었다.항상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며 평소에 찬송가 226장을 부르던 이목사는 50세의 나이로 험란했던 한 생애를 마감하고 하나님 나라로 영접받아 옮긴 것이다.

 

학구와 독립운동 그리고 목회자의 길을 향하여 뜻을 세워 달려오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의 꽃을 피운 것은 단순한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리에 의한 복음사역의 한 과정임을 입증해 준다.평양서문밖교회 교우들과 친척들의 애도와 찬송중에 장례예배를 마치고 평양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예로 두 아들은 1950년 12월 월남, 차남 이승만 목사는 미국NCC회장으로 있으면서 극동지역선교책임을 맡으면서 이미 80년초부터 북남을 오고가며 소식을 전하였고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PC USA총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수고하는 등 그의 리더쉽을 전 세계에 떨쳤다. 3남 이승규장로는 순교자의 신앙적 유산을 따라 교회에 충성할 뿐 아니라 삼성, 효성, 롯데그룹등에서 기업경영을 했고 은퇴 후 사회복지사업분야에서 장애인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이태석 목사와 사별했던 사모와 네 딸 등 유가족들은 북한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고 딸중에 한분은 의사로, 또 한분은 철도청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부인 김송희사모는 1970년 12월 6일 월남한 두 아들 이름을 부르다가 함흥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