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이우석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8. 22. 20:40

 

 

순교자 이우석 목사 (장로교)

 

이우석 목사(?- 1942)


이우석은 을미사변을 비롯한 구한말의 어수선한 소용돌이와 함께 복음의 씨앗이 싹터오르는 시절 전북 전주 화원정에서 봉산이씨 이선명씨와 전주 최씨 선자씨의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13세에 예수를 영접하였다.

복음성가단을 만들어 이들이 가는 곳 마다 간증과 연주로 청중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그 복음성가단원중 이석우는 목사가 되었고 현재명같은 훌륭한 음악가가 배출되었다. 예수냐 조상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아버지의 명령에 거역하게 된것은 부위렴 선교사를 통하여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봄 세례를 받고 부위렴 선교사의 눈에 들어 평양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한채 집을 나온 이우석은 학교구내 이발사가 되어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트럼팻연주를 익히며 새로운 양식을 익히니 이 모두 은혜로운 연단이었고 부위렴 목사의 배려였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

 

1941년 하와이 기습한 전쟁과 함께 선교사 추방 당하여 부위렴선교사와 이우석목사가 헤어진다. "일본은 이 전쟁에 이기지 못하고 망합니다" 마지막까지 승리하십시오"하며 헤어지는 부위량 선교사의 말에 기대와 꿈이 되었고 민족을 일깨우는 메시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1942년 신사참배 애국헌납기 등 강압적인 요구로 교회의 숨통이 터지자 이우석목사는 부위렴 선교사가 마지막 남기고 간 "일본은 망한다"고 한 말을 주일 설교때마다 반복하니 일본은 이우석목사를 민족주의자로 지목하고 괴롭히다가 검속하게 된다. 일경의 유혹에 답하지 않기 위해서 이우석은 혀를 깨물어 취조가 불가능해지자 석방한다.

석방 후 보성읍교호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설교에 불온사상이 내포되었다고 연행하는 일은 예사일이 되었다. 목회 심방 경찰서 연행 부흥사경회 --- 모두 마지막기회로 알고 나팔수의 연주는 복음전파도 되었지만 피로함과 무리는 경찰서 연행과 함께 발병된 임파선 염으로 인하여 진안읍교회에 부임을 앞두고

 

1942년 11월 6일 오후 16시 230장을 가족들 앞에 브르며 가족들에게 "도를 굳게 지켜라, 오직 믿음으로 성취하라"는 말을 남기도 주님의 품에 안겼다. 미망인 취금례. 장남 봉일장로 둘째 용일 장로 셋째 영일 새샘교회 담임 넷째 호일은 문화교회 시무중 장녀 영자 권사 차녀 광자 명성교회 충성 (유복녀) 이봉일장로는 순교자유족회 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