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아~ ‘배꼽산’

好學 2011. 8. 27. 21:58

아~ ‘배꼽산’ 

 

 

작고 사진작가에 이종화(李宗和) 선생이 계시다. 1938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의사이면서 사진에 많은 열정을 바쳤던 분이다. 그분이 1965년에 펴낸 '문학산'이란 책자에는 당시로서는 쉬 볼 수 없었던 천연색 사진 12장을 비롯해 흑백 사진 30장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실려 있다. 문학산의 풍광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일품인데, 그 중 압권은 역사의 이끼가 거뭇거뭇 배어 있는 문학산성(文鶴山城)의 장엄한 모습이다.


또 수려한 산 정상에 봉긋하게 솟은 봉화대의 아련한 모습도 잊을 수 없는 정경이다. 봉화대는 멀리서 보면 마치 사람의 배꼽모양 같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인천 사람들은 너나없이 문학산을 '배꼽산'이라 불렀던 것이다. 배꼽산!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가?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은 혈연의 아름다운 흔적, 그것이 배꼽일진대 인천 사람들은 문학산에서 어머니의 품 같은 안온한 모성을 느꼈으리라.


1959년 어느 날 배꼽산의 '배꼽'이 잘려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미사일 부대가 들어섰던 것이다. 산 정상에 들어선 엄청나게 큰 방사형 레이더가 밤낮없이 빙빙 도는 품이 위압감마저 느끼게 했다. 봄철에는 소풍을 가고, 겨울철에는 눈길을 헤쳐 가며 산토끼를 잡았던 추억의 배꼽산이 남의 땅처럼 출입 금지 구역이 됐다. 이종화 선생이 "문학산 북쪽 기슭 돌출부에 옛 무덤이 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비류 왕릉이라고 불렀다"고 전한 바로 그 옛 무덤도 그 후 어찌되었는가 아는 사람이 없다.


지난해 가을, 수십 년만에 배꼽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가파른 낭떠러지에 간신히 걸쳐 있는 일부 석성(石城)만이 유일한 옛 자취였을 뿐, '동사강목'과 '여지도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 유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일망무제의 정상에 서서, 과거 우리가 서슴없이 배꼽산을 훼손했던 것은 스스로 이 땅, 이 역사와의 혈연적 유대를 단절시킨 자기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자문해 보기도 했다.


배꼽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인천사의 발원지요,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파헤쳐지고 잘리고 있다. 만시지탄이나 남구청이 '문학산살리기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비록 비류는 비운의 왕이었지만, 역사에 '미추홀'이라는 이름을 올린 최초의 인천 사람이요, 그 현장이 바로 배꼽산이었음을 재삼 기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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