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 막은 화도진
19세기에 들어 인천 앞바다에는 이상한 모양을 한 배들이 자주 출몰했다. 선체는 하나같이 검은 칠을 칠했는데, 조선의 병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데다가 수 백 명의 군사를 싣고도 재빠르게 항진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866년 마침내 프랑스가 함대를 몰고 와 강화에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고, 그 5년 뒤인 1871년 미국이 5척의 군함과 1200여 명으로
강화를 공격해 350명의 군사를 전사케 했다. 병인, 신미 두 양요(洋擾)가 끝나자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굳혀 갔다. 전국 각지에 포군(砲軍)을 집중적으로 설치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871년 영종진, 부평부에 포군을 신설하였고, 1873년 4월에는 인천부에 포수 100명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그 2년 뒤인 1875년에 일본의 운양호가 불미에 이어 초지진과 영종도를 포격하고 수십 명의 무고한 주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척화비(斥和碑)만으로는 외세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급함을 느낀 조정은 해안 방비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1878년 무위소 별장을 역임한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로 하여금 수도 방어의 요충인 인천에 포대와 진사(鎭舍)를 새로 짓게 했다. 공사는 1년 만인 1879년 7월1일 완공되었다. 이 진을 화도진(花島鎭)이라 이름짓고 무위소에 소속시켰다. 진에는 임기 30개월의 별장을 두었고, 인근의 한 면을 이속시켜 상납과 환곡을 관장하게 하였다. 화도진은 후에 훈련도감으로 이관되었다가 훈련도감이 혁파되자 금위영, 총융청, 친군좌영(親軍左營) 등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그러나 당시 고종 황제는 친위병의 성격을 지닌 무위소를 강화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원군이 추진했던 군사 정책이나 외세 방어를 위한 군사 제도를 별다른 대안도 없이 혁파해 지방 군사력의 중추였던 각 진영은 해체되거나 축소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화도진은 1894년 10월 9일 폐쇄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90여 년 후인 1982년, 인천광역시는 화도진을 복원하고 이를 기념한 '화도진 도서관'을 개관하는 등 이 일대를 시민 공원으로 조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번쯤 찾아가 고난에 찼던 인천의 근대사를 되새겨 봄직한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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