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청일전쟁과 보물선 찾기

好學 2011. 8. 26. 22:32

[인천이야기] 청일전쟁과 보물선 찾기

 


인천 앞바다 덕적도 해상에서 ‘보물선’ 고승호의 인양 작업이 한창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 배에는 멕시코 은화인 무역은과 중국의 마제은(말발굽 형태의 은괴) 등이 600t, 시가로 쳐서 1000억 원어치가 실려 있다는 얘기이다. 1975년 10월 신안 앞바다에서 고려와 중국 원대의 도자기 명품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들뜨게 했었고, 최근에는 울릉도 근해에서 러시아 수송함 돈스코이 호의 발견 기사가 보도되자 모 건설 회사의 주가가 연일 상한가를 쳤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바로 그 ‘보물선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 배는 정작 보물선이라기 보다는 ‘해저 묘지’라는게 사실에 가깝다. 영국 의 로이드 보험회사가 공개하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고승호는 청국이 영국으로부터 월 9천 달러에 빌린 상선으로 일반 승무원을 비롯해 청군 대대장 4명, 중대장 15명, 병사 1100명 등 1400여 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이들은 1894년 7월 25일 덕적도 해상에서 일본 군함 낭속호가 발사한 함포 두 발을 좌현에 맞고 30분만에 침몰했는데, 이 때의 탑승자 가운데 700여 명은 지금까지 고승호와 운명을 같이해 수장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비규환의 전장이 오늘 단순한 보물선 인양지로만 각광을 받고 있으니 그날의 원혼들이 다시 한번 세월의 무심함에 통곡을 할 듯도 싶다.


우리는 고승호 침몰 사건을 보물선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뼈아픈 역사가 있다. 이 해전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당시 아시아에서 발호하던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영토 분할의 경쟁을 촉발시켰으며 끝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대상이 되어 역사에 유례가 없는 수난을 당하게 한 원인이었다. 더욱 분통이 터지는 것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중국과 일본이 벌였던 각축전이었던 청일전쟁의 직접적 계기를 우리가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는 ‘역사적 패착’이었던 것이다.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정부는 전라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농민군을 진압토록

했다. 홍계훈이 군사 800여 명과 야포 2문, 기관포 2문을 동원하여 인천항을 출발한 것이 5월 7일이었고, 농민군이 전주마저 함락시키자 청국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5월 31일이었다. 이에 따라 청국 제독 엽지초가 군사 1500여 명을 이끌고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6월 5일이었다.


이를 기화로 일본은 ‘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6월 9일 제5사단 휘하의 혼성여단 선발대와 군함 2척을, 12일에는 혼성여단 800여 명을, 15일에는 보병 3000여 명과 기병 300여 명 등을 잇달아 파견해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게 했다. 그러나 일본의 이 같은 군사 동원은 우리 정부와 단 한마디도 협의가 없었던 불법적인 것이었다.


정부는 물론 일본에게 즉각적인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에 불응하면서 청국을 상대로한 전쟁 구실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그들은 결국 ‘풍도 해전’을 시발로 조선 각처와 중국 내에서 전쟁을 벌여 이듬해 4월 17일 청국과 소위 하관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의 우월적 지배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수모를 겪은 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이다. 그런데 일본은 총리가 앞장서서 신사 참배와 ‘카미카제’의 정신을 부르짖고 있고, “청국과의 합의하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으며 양국 군이 우연하게 충돌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고 뻔뻔스럽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판에 우리는 언제부턴가 피눈물나는 통사는 잊은채 보물찾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같아 안타깝다.

 

'好學의 時事 > [인천]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배꼽산’   (0) 2011.08.27
박물관 도시로   (0) 2011.08.27
외세 막은 화도진   (0) 2011.08.27
內洞, 상가 1번지   (0) 2011.08.26
[인천이야기] 궁핍했던 50년대   (0) 2011.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