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궁핍했던 50년대

好學 2011. 8. 26. 22:29

[인천이야기] 궁핍했던 50년대

 


1950년대는 궁핍했다. 전쟁 뒤에도 먹는 것, 입는 것 자체가 여전히 생존의 목적처럼 여겨졌던 때였다. 아낙네들은 ‘몸빼’에 검정 고무신이 표준 패션이었고, 남정네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사지’나 ‘스몰’이라 불리는 군복을 시커멓게 물들여 입고, 미군 장교용 검은 단화나 속칭 ‘워카’라는 목이 긴 군화를 끌고 다녔다. 그러나 서로 부끄러워 할 건 없었다. 의식주어느 것 하나 변변하게 없었던 혹독한 시련 속에서 차림새를 따지는 것 자체가 허망한 사치였기 때문이었다.


식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한미 양국의 ‘친선 악수 마크’가 새겨진 부대에 담긴 밀가루와 우유 가루가 일용한 양식이었다. 초등 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사흘에 한번씩 밀가루와 우유가루를 번갈아 나누어주었는데, 그 밀가루로 허구 헌 날 수제비를 해 먹거나 칼국수로

허기를 속이며 살았다. 우유 가루는 고급 식품이었다. 어머니들은 이 귀한 음식을 솥에 넣고 쪄서 딱딱한 과자처럼 만들어 주었는데, 아이들은 이걸 하루종일 주전부리 간식으로 입에 물고 다녔다.


형광등 아래서 커피를 마신는 것은 ‘문화적 행위’였다. PX에서 흘러나온 원두 커피 두세 숟갈을 알미늄 포트에 담아 연탄불에 올려놓으면 향긋한 커피 향이 온 집안에 진동하였다. 설거지를 끝낸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조촐한 커피 ‘마실’을 가졌던 것도 이색 풍경의 하나였다. 형광등이 처음 들어온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세상에 이렇게 대낮처럼 환할 수가 있느냐”며 자리를 뜰 줄 몰라했었다.


라디오 청취는 서민들의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대부분 라면 박스 만한 일제였는데 진공관이 발갛게 달아올라야 겨우 소리가 나왔다. 복혜숙, 양주동, 임택근 같은 분들은 당시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라디오 스타였다. 또 USIS(미 공보원)에서 배포했던 ‘자유의 벗’도 인기를 끌었고, 인천문화원에서 저녁 때 학교 운동장에서 틀어 주던 ‘리버티 뉴스’와 문화 영화 등을 구경하느라 손에 손을 잡고 모여들던 일도 세시적 풍속도였다.


요즘 들어 ‘그 때 그 시절’을 돌이켜 보는 생활사 연구와 함께 ‘복고풍’이 유행처럼 인기를 끌고 있다. 인형으로 꾸민 ‘엄마가 어렸을 적에’에부터 초등 학교 교실과 골목길, 영화관, 사진관, 만화 가게 등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회가 도처에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궁핍했던 50년대의 희로애락이 어느덧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好學의 時事 > [인천]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배꼽산’   (0) 2011.08.27
박물관 도시로   (0) 2011.08.27
외세 막은 화도진   (0) 2011.08.27
內洞, 상가 1번지   (0) 2011.08.26
청일전쟁과 보물선 찾기   (0) 2011.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