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이 건 목사 (성결교)

好學 2011. 8. 22. 20:38

 

 

순교자 이  건 목사 (성결교)

 

 

이  건 목사(1896- 1951) 


이 건은 1896년 10월 20일 함경남도 북청(北淸)에서 엄격한 유교 가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머리가 명석한 그는 학업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20살 때에는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이 건은 유교의 전통에 젖어든 부모의 슬하에 자라면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가 17,8세가 될 때에 기독교를 접하자마자 곧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대쪽같이 곧고 바른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는 열심히 경건한 신앙행활과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이씨 조선이 한말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어이없이 무너져내리자, 이 건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내다보게 되었다. 유교의 인습에 강하게 젖은 그의 부친은 제사 문제 등의 이유로 그의 교회출석을 몹시 반대하였으나, 갖은 핍박 속에서도 이 건은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였고, 기도에도 열심이었으며, 주일학생을 가르치고, 교회봉사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럴수록 가정의 핍박이 더 심해져서 그가 아끼던 종교서적들을 불태우곤 하였다.

 

1920년에 이 건은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 보조를 받을 수 없었던 그는 피눈물나게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추운 방에서 굶주린 배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2년 동안 공부를 계속하였지만 그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져갔다. 결국 그는 고향친구요 믿음의 동지인 이원균의 권면을 받아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후에 그는 나라를 빼앗긴 조국을 위해 일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겨레를 구원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보다 더 급한 임무임을 깨달은 그는 1922년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學院: 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이 건은 천성이 경건하고 인물이 준수하며 신학문과 구학문을 겸비한 수재였으며, 신학생 시절부터 뛰어난 독서열과 학구열을 보였다. 1925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그해 6월에 평양으로 파송을 받아, 부교역자 김제근(金濟根)과 함께 평양교회(일명 상수리 교회)를 개척하였다. 유학시절의 가난 때문에 병약하였고 뼈가 앙상하였던 그의 사역을 가족은 극구 반대하였으나, 그는 부인과 자녀들을 이끌고 상수리 교회에 부임하여 3년간 목회에 전념하였다. 평양교회의 신자가 100여명으로 늘어나 교회의 공간이 협소해지자, 이 건은 1928년에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에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평안남도 지방 감리목사 대리로서 산하 교회의 감독과 치리(治理) 등에도 힘썼다.  

 

육신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1931년에 이 건은 경성성서학원의 교수로 초빙을 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그는 교무과장 혹은 학생과장의 직책을 맡았으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의 거부로 1934년에 교단이 해산되고 경성성서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썼다. 천성이 강직한 이 건은 신사참배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교 중에도 천황숭배가 우상숭배의 죄임을 강조하였다. "활천"에 기고한 그의 글 '기독교 재림문제'가 곧 이를 잘 보여준다. 밤이 캄캄할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것같이 時代가 暗黑에 빠져들어갈수록 하나님의 擇하신 子女의 빛은 더욱 드러난다. 

 우리가 初夜에 天空을 쳐다보면 별들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깊어오면 天空이 캄캄하여진다. 이때에 별들은 그 값없는 빛을 明朗하게 드러내인다. 今日 우리의 處地도 그러하다. 참빛의 아들된 信者나 敎役者이면 至今이 곧 빛을 드러낼 때이다. ... 末世敎會에도 一邊 主의 在臨을 悲望하며 順福音을 傳하고 있는 者가 많은 것이다. '사데에 오히려 몇 명이 있어 흰옷을 더럽히지 아니한지라, 저들이 合當한 자니 白衣를 입고 나와 함께 행하리라'(묵 3:4) 한 말씀과 같이 우리들은 遺殘者의 班列에서 主를 證據하며 살 것이다.

不義한 자 그대로 不義하고 깨끗하지 못한 자 그대로 깨끗지 못하되 오직 우리들은 信仰貞燥를 굳게 지켜 나갈 것이다." 8,15 광복 후에 이 건은 새로 개교한 경성신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혼란기의 교단 목회자의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교단 기관지 "활천"의 주필도 겸직하여 교단 목사들의 자질 향상, 영적 지도에 힘을 쏟았다. 1950년 6,25전쟁 때에 그는 박현명, 김유연 목사 등과 함께 피난을 가지 않고 신학교를 지키겠다고 남아 있다가, 같은 해 8월 23일 아침에 북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붙들려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의 그에 대한 소식은 알 수 없다

1962년에 내외문제연구소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글 "죽음의 세월"에 의하면, 이 건은 발진푸스에 시달리며 평양까지 끌려가, 북한에서 지하 신앙운동을 일으키던 김인준(金仁俊), 박상철(朴相澈) 목사와 연락하며 수용소 안에서 신앙운동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끝내는 1951년 말엽에 김유연 목사와 함께 순교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성서영해전집(聖書靈解全集), 성서인물강화(聖書人物講話) 및 설교집 "진리의 강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