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빛을 따라간 사람들] 썬다 싱 2

好學 2011. 8. 8. 21:37

[빛을 따라간 사람들]  썬다 싱 2 

 

 박 해

 

1904년 12월 18일 새벽의 그리스도 발현 사건은 썬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한 것이다.
썬다는 그날로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기이한 개종소식은 람푸르 일대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시크족의 전통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썬다의 이러한 행동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렇게도 다정스럽던 아버지와 가족들이 매질을 하고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모든 슬픔을 이겨 나갔다.


썬다에게는 아버지 못지않게 조카를 대단히 사랑하던 숙부님이 계셨다. 한 번은 조카의 마음을 고쳐볼까 하고 썬다를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더니 많은 돈과 값진 금은 보석이 가득 들어있는 금고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의 두건을 벗어 그의 발 아래 놓고 아주 겸손한 말로 “네가 만약 그 외국 종교를 버리고 우리와 같이 있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될 것이다”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썬다는 이때 숙부님의 이토록 겸손한 청을 거절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다시 썬다의 눈에는 영광과 자비가 가득찬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숙부님께 담대히 말했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준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 가진 이 평안과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몸이 불사름을 당할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썬다 일가는 학교측과 람푸르 선교측에 항의를 해서 교장을 다른 학교로 전임시켰고, 선교회측의 뉴톤 목사를 법정에까지 서게 하였으며 미션 학교는 문을 닫고 몇 안되는 교인들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로푸르라는 곳으로 집단이주를 해야만 했다.
견디다 못한 썬다는 학교가 문을 닫을 때 그도 고향을 떠나 루디아나시에 있는 장로교 계통의 고등학교로 갔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곳 학생들은 이름만 신자였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고 적이 실망하고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썬다는 계속해서 설복하고 박해하는 가족 친척들에게 자신의 각오를 보이기 위해 시크족의 경전도 버리고,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잘라보지 않았던 두발도 밀어버렸다.
모든 사람들 특히 그 형들은 몹시 격분하여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욕설과 학대를 했다. 밥도 같은 상에서 먹지 못하게 하면서 음식물을 개처럼 던져주었고, 가축과 같이 생활하게 했다. 그러나 썬다는 그렇게 마음 아픈 일을 많이 당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는 결심은 변치 않았다.

 

 집에서 쫓겨남

 

아무리 박해를 해도 변치 않는 썬다 싱의 마음을 알게 된 아버지는 마침내 최후 선언을 하였다. “가문의 이름으로 말하거니와, 우리는 너를 영원히 버리고자 한다. 이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지금 입은 그대로 가거라.” 그렇게도 사랑하던 막내 아들을 아버지는 이처럼 단호하게 버렸다. 십자가를 각오했지만 썬다 싱의 가슴은 터질 둣 아팠다.


집에서 쫓겨난 그 날 밤은 몹시 추웠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신약 성경 한 권 밖에 없었는데, 썬다는 그것을 꼭 쥐고 로푸르쪽을 향하여 하염없이 걷다가 숲 속의 큰 나무 밑에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그는 자신 때문에 쫓겨난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로프르를 향하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몇발자국 못가서 갑자기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배를 움켜 쥐고 기진맥진하여 겨우 로푸르에 닿았고, 우팔 목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문지방을 넘었다. 목사에게 안기자 그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의사가 올 때까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그가 독약이 든 음식을 먹었다는 것과 너무 늦어 살릴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집을 떠날 때 점심밥이라고 준 그 밥덩어리 속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썬다가 살아남아서 부끄러움을 나타내면서 기독 신자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썬다에게는 강한 확신이 떠올랐다. ‘주님께서 나를 무의미하게 죽게 하려고 암흑 중에서 구원하여 한없는 그 축복을 주실 리는 없다. 나는 더 살며 주님의 증인이 될 사명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 썬다는 심한 고통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다음 날 궁금해서 와 본 의사는 그늘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썬다를 보자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의사는 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버마에서 주님을 위한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1905년, 건강이 회복되자 썬다는 루디아나의 또다른 장로교계 학교에 보내졌다.


썬다 가족들의 무례한 침입 때문에 교장은 썬다를 수바투의 나환자 수용소로 보내어, 성공회의 레드만 신부님께 세례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9월 3일, 16세의 그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병원일을 거들어주면서 시간이 나면 우거진 숲 속에 고요히 앉아 묵상을 했다. 자신과 온 세상을 잊어버리고 마음과 뜻을 다 바쳐 눈물을 흘려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핍박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유 세계의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습이었다.

 

 홍포를 입은 썬다

 

그는 어머니의 평생 소원대로 세례를 받은지 33일 만에 전생애를 주님께 바치는 사두로서 세상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사두(인도 종교가)가 입는 사푸론 로브를 입고 인도 말로 쓴 성경책 한 권을 손에 들고 길을 나섰다. 그 외 그의 소유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살아계신 주님 한 분만이 그의 전 재산이고 소유이고 생명이고 힘이었다.
사두의 도복을 입은 16세의 어린 소년 썬다는 마음 속에 불붙는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인도 사람들의 영혼을 건지기 위해 사나운 물을 건너 전도의 길에 나선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인도 종교가의 의복을 입은 썬다를 보고 처음에는 무조건 존경을 하였지만 일단 기독교인인 것을 알면 박해를 하였다.
그는 반석과 같은 믿음과 불같은 정열을 가지고 먼저 자기 고향으로 갔다. 몇 달 전에 죽음을 겨우 면하고 쫓겨난 그 곳에 가서 집집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받은 그 평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했다. 그리고 후로 가사울리, 솔론, 딕사이 그리고 심라에서 야외 전도를 했다. 그리고는 대륙을 횡단하는 장도에 올라 북쪽의 펀잡주로부터 연합주를 거쳐 봄베이, 마드리스, 켈커타까지 전국 순회전도를 하였다. 많은 고난과 핍박이 썬다의 길을 가로 막았다. 동상을 당하며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사람이 없는 산림 가운데 쫓겨나며, 짐승들의 굴에 들어가며, 벗은 발로 이곳 저곳 다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과 핍박은 땅 위의 그 어떤 행복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했다.

 

 첫 번째 입신

 

1906년 17세 되던 해, 썬다는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스토크스씨를 만나 함께 북인도를 돌며 수바투와 라호르에서 나환자를 돌봐주는 일을 했다. 스토크스씨는 프랜시스의 청빈정신을 몸소 실천해 보고자 고국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먼 타국에까지 와서 탁발봉사생활을 하고 있던 전도인이었다. 썬다는 그와 2년 동안 함께 동행하면서 프랜시스 성자의 정신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즉 어느 것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온 세상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주신 평화와 기쁨에 대해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


1911-12년동안 썬다는 북인도로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그때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1912년에는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입신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루는 기도하는 중 문득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경험을 했다. 때때로 그는 이러한 입신 상태에서 몇 시간씩 있기도 했다.


그는 이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결코 입신상태에 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입신은 주께서 주신 선물이다. 인간이 받을 것이지 구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은 사람에게는 값높은 진주이다. 나는 사두로 있는 14년간의 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며 혹 이 생활을 버릴만한 유혹도 당하였지만, 이 입신 경험을 생각할 때는 결코 전 세계를 준다해도 이 생활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썬다는 입신 체험을 통하여 영계에 대한 신비로운 경험과 지식을 많이 쌓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그의 사명감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