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데이비드 리빙스턴 [Livingstone, David, 1813~1873.4] 4

好學 2011. 7. 30. 22:35

 

데이비드 리빙스턴 [Livingstone, David, 1813~1873.4] 4

 

 

 

 

 사람은 대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주체가 반드시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범인(凡人)들과는 달리, ‘내’가 아닌 불행한 이웃이 행복해지는 데에 참된 행복의 의미를 찾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미개한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암흑의 세계에 빛을 던져준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불린 위대한 탐험가 리빙스턴의 사랑과 신앙의 정신을 옮기면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이 진정 추구해야할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 봅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무렵, 1840년대의 아프리카 대륙은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고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대륙이었습니다.

해안지방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륙 내부를 성공적으로 탐험한 사람도 없었고, 대륙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상아와 황금과 흑인으로 상징되던 이 미지의 대륙을 최초로 탐험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리빙스턴입니다.

리빙스턴은 181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열 살 때부터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리빙스턴은 이웃들의 불행한 모습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자라나면서 점점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불행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이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중국의 기독교 전도에 관한 책을 읽고 중국 전도를 결심하고, 선교사 자격을 획득하여 중국으로 출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중국행이 불가능해진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미개지 전도를 결정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는 선교사들이 더러 파견되었으나, 아프리카의 미개지 전도는 리빙스턴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토인들이 다른 마을이나 다른 종족을 습격하여 포로로 사로잡아 온 토인들을 가축처럼 부리거나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이렇게 팔린 노예들은 항구로 끌려가 노예선에 실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 되곤 하였습니다.

1840년 12월,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5개월 동안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곧 토인들의 말을 배웠고, 밀림 속에 있는 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자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한밤중, 한 토인이 문을 두드리며 급한 왕진을 청했습니다. 밀림의 맹수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병이란 때가 늦으면 고칠 수 없는 법이오. 옳은 일을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아무 일 없을 것이오.”라고 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위로하며 토인과 함께 캄캄한 밀림 길을 담대하게 걸어 나갔습니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토인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토인들은 리빙스턴이 말하는 친절한 하나님이 바로 리빙스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오지(奧地)에는 미개한 생활을 하는 토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안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서 그들을 깨우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질이 나쁜 토인들이 살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오지로 간다는 리빙스턴의 결심에 반대했습니다.

“나는 이 아프리카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토인들은 병이 들어도 의사가 없어서 그대로 죽어갑니다. 상처를 입어도 치료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나쁜 환경과 습관을 내가 가서 바로잡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서라도 오지로 가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의 결심은 굳건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만나서 결혼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죽음의 사막이라는 칼라하리 사막 북쪽에 있는 느기미라는 호수 부근입니다. 30명의 토인들이 30마리나 되는 소를 끌고 뒤를 따랐습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 무서운 사막의 맹수들,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타는 듯한 갈증, 이 모든 악조건으로 인해 사막 기후에 익숙한 토인들마저 기운을 잃고 쓰러져 갔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은 온갖 고생 끝에 2개월만에 칼라하리 토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은 그곳에서 저마다 타조알 한 개씩 받아들고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고는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칼라하리 토인들은 물이 없는 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물을 가장 소중하게 간수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적의 습격으로부터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물을 타조알에 채워 땅 속에 묻어둡니다.

이 마을의 여자들은 타조알에 물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축축한 땅을 찾아 보릿대처럼 생긴 풀줄기를 땅에 꽂고는 입으로 물을 빨아 올려서 타조알 속에 채워 넣는 데 세 시간이나 걸립니다. 리빙스턴은 이런 불편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 주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에게 신앙심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천막을 치고 곧 환자를 치료하면서,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도 금방 토인들과 사귈 수 있어서 그들을 의심하던 토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열병에 걸렸을 때 토인들이 다 함께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본 리빙스턴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몰랐던 야만적인 토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고생을 무릅쓰고 온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착한 마음을 그들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후, 리빙스턴은 목숨보다 사랑하는 딸을 열병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는 슬픔을 몰아내고 다시 일어나서 칼라하리 사막을 지나 더 북쪽에 있는 마콜롤로라는 마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아프리카의 진기한 식물이나 동물, 토산물 등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 조사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마콜롤로에 도착했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은 그곳에 짐을 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1851년, 그는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잠베지 강을 발견하여 강의 모양과 너비, 깊이 등을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냄으로써, 당시 아프리카의 지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공으로 영국 지리학 협회로부터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어디에든지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리빙스턴이 거주하고 있는 마콜롤로에도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었습니다. 토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노예를 팔아서 그 돈으로 총을 사들였습니다. ‘노예 매매를 그만두게 하려면, 먼저 문명국의 물건을 손쉽게 얻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오지에서 해안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뚫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생활 수준도 높아질 것이고, 또 편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리빙스턴은 오지에서 해안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을 탐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길만이 아프리카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자, 그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탐험길에 올랐습니다. 이번 여행은 도중에 야만인이나 맹수에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유언장을 써 놓고 떠났습니다. 서해안을 향해 나아가던 리빙스턴은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열이 계속되어 음식을 삼킬 수 없었기에, 그는 눈에 띄게 야위어 갔습니다. 그는 소 잔등에 엎드려 비를 맞으면서도 “서해안, 서해안으로!” 하고 계속 일행을 재촉했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이 치보크 마을을 지나가려 할 때, 그 마을의 토인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나와서 일행을 막아섰습니다. 마을을 지나가려면 두 사람의 토인을 두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이 강경하게 거절하자, 토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창을 쳐들었습니다.

  리빙스턴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는, 토인 대신 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여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을 따라온 토인들은 소가 아까워서 차라리 자신들이 노예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리빙스턴은 “너희들의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 너희들 모두의 목숨과 자유를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그러한 리빙스턴이었기에 토인들은 그를 ‘빠빠(:추장에 대한 경칭)’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에도 사나운 토인들의 많은 방해와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드디어 바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오지에서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마콜롤로를 떠난 지 반년만인 1854년에야 포르투갈의 식민지 항구 루안다에 도착했습니다. 쇠약해진 리빙스턴은 영국 군함으로 옮겨져 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몸이 완쾌되자, 그는 여행 중에 조사해온 지리, 동물, 식물, 그리고 각 지방의 토산물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냈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노예매매를 금지하도록 힘을 써 달라고 편지도 써 보냈습니다.

  다시 마콜롤로 마을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이번엔 동해안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서해안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사나운 종족들이 있기에, 토인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다시 여행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토인들은 그들의 빠빠가 이토록 자신들을 위해 걱정해 주는 것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리빙스턴은 “행복의 빛은 동쪽에서 비친다는 말을 굳게 믿고 탐험을 할 것이오” 라며 동해안을 향해 몇 명의 일행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도중에 일행은 토인들이 일컫는 ‘소리내는 연기’가 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토인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연기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서운 요술쟁이가 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연기가 되고 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연기의 정체는, 바로 너비가 1700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큰 폭포였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폭포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일행은 다시 강을 내려가 5개월 후에는 동해안에 도착하여,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 횡단에 성공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은 다음 탐험 준비를 위하여 일단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영웅이며 아프리카의 성자이신 리빙스턴 만세!” 영국 국민들은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그를 환영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불러서 칭찬의 말과 함께 명예훈장을 내렸습니다.

  이후, 나일강의 수원지를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탐험하던 리빙스턴은, 폐병[이질]을 얻어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리빙스턴이 나일강 수원의 탐험에서 최후를 맞았을 때, 토인들은 사랑하는 빠빠 리빙스턴의 주검을 미이라로 만들어, 9개월 동안의 험난한 모험길을 무릅쓰고 동해안의 영국 영사관으로 운반하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 세상은 아프리카에 뿌려진 리빙스턴의 인류애가 아름답게 열매맺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바쳐 미개한 토인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아프리카의 아버지 리빙스턴! 미개한 토인들에게 그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모습이었고, 그들의 목숨을 아끼고 보호했던 인자한 아버지였습니다.

  무지했기에 야만스러웠고 그래서 죄악으로 어두웠던 암흑의 아프리카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무지를 일깨우며, 노예매매라는 비인도적인 죄악과 용감히 싸우면서, 사랑과 희생의 길을 걸어간 그의 숭고한 삶을 대하면서, 온 천하를 꾀는 자 마귀의 올무 속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도 모른 채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우리들에게, 생명의 등불을 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미개한 토인들이 리빙스턴의 전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것처럼, 무지했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깨어나, 비로소 우리들이 추구하며 살아가야 될 참된 삶의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생명과 참된 행복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희생과 봉사의 길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가치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리빙스턴 박사가 아니신가요?    
 

  출처 : 하~ 하~ 즐겁냐??

 

 

 

 아프리카 탐험가 리빙스턴(1813-1873)은 스코틀란드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서 독학으로 기초 교육을 마친 뒤에, 글래스고 대학에 들어가 의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 후에 런던 전도교회의 의료 전도사가 되어, 1841년에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1846년에는 칼라하리 사막을 넘어서 느가미를 발견했으며, 1851년에는 잠베지 강을 발견했다. 그는 이어서 1855년에 잠베지 강 상류를 발견한 다음, 1856년에 영국으로 돌아가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1858년에서 1863년까지 다시금 아프리카 탐험을 한 뒤, 1864년에 귀국해서 <잠베지 강와 그 지류 탐험기>를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865년 세 번째로 다시 아프리카에 건너갔다. 리고는 나일 강의 수원(水源) 탐험에 나섰으나, 그 후 5년 간 전혀 소식이 끊어진 채 생사불명이 되었다.

 

  그 당시 영국 태생으로서 미국에 건너가 신문기자가 되어 <뉴욕 헤럴드> 지에서 활약하던 스탠리(1841-1904)기자는, 뭇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리빙스턴을 찾아서 아프리카 탐험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스탠리는 만난을 극복하며 수색에 나선 다음, 1871년에 이윽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리빙스턴을 우지지에서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리빙스턴 박사는 열병에 걸려 몹시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노쇠한 몸으로 아프리카 오지의 흑인들을 위해서 의료 봉사와 포교에 몸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탠리 기자는 리빙스턴 박사에게 다가갔을 때, 혹시나 해서 조심스러운 질문을 했다.

 

                   "리빙스턴 박사가 아니신가요?(Dr. Livingstone, I presume?"

 

   리빙스턴 박사는 고개를 나직하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험한 요지를 찾아 온 스탠리 기자와 손을 맞잡고는, 기쁨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음식을 준비시켰다. 그 때 노소를 막론하고 선량한 토인들은, 모두들 기쁜 듯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스탠리 일행에게 감격적인 장면을 보여 주었다.

 

  스탠리 기자는 열병으로 시달리는 리빙스턴 박사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리빙스턴 박사는 토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 곳에 묻히겠다고 거절했다. 어쩔수없이 스탠리 기자는 석별의 정을 나누고 귀국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그 후 2년 만인 1873년에 리빙스턴은 북로디지어의 방겔루 호반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영국 정부에서는, 암흑 대륙에서 봉사와 포교를 위해서 그 생애를 값지게 바친 리빙스턴 박사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서,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이장시켰다.

 

   그는 토인들의 교화에 힘썼고 또한 노예 매매 방지에 공헌하는 등, 암흑 대륙과 접촉한 초기의 유럽인으로서 가장 인도적인 봉사를 한 위인이었다. 그는 결코 백인의 우월성을 내세우지 않았고, 기독교적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원주민의 구제를 위해 거룩한 헌신을 했던 것이다.